종교개혁 500주념 기념 시리즈 7
민주국가에서 민의는 어떻게 표현할 수 있나? 국민이 정부와 공권력에 의사 표현을 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선거다. 국민의 뜻을 대변하는 국회의원과 대통령을 선출하는 권한이야말로 민주국가에 가장 중요한 권한이다. 그런데 그들이 국민의 뜻을 대변하지 않고 사리사욕을 채우고 권력을 농단할 때 어떻게 해야 하나?
사마천은 사기에서 진나라가 허망하게 멸망한 원인을 두 가지로 들었다. 첫째는 진시황의 폭정이고 두 번째로는 위아래 언로가 막혔기(雍蔽之 國傷也, 언로가 막히면 나라를 망친다.) 때문이라고 하였다. 왕조 시대에도 백성의 뜻을 받들기 위하여 여러 가지 제도를 두었다. 조선 시대는 상소, 신문고 제도, 가전신정(駕前申呈, 임금이 행차할 때 왕 앞에 직접 나아가 억울함을 호소)으로 끊임없이 민의를 표현하였다. 그러나 왕이 귀를 막고 폭정을 행하던 조선 말기 백성은 벽보라는 형식으로 자신의 의사를 나타내었다. 민주사회에서도 조선과 비슷한 방식으로 민의를 표현한다. 인터넷을 통해서, 혹은 성명서를 통해서, 나아가 평화로운 방법으로 시위를 하므로 민의를 나타낼 수 있다.
그러나 만일 인권을 탄압하고 폭력을 행사하고 백성의 재산권을 침해하면, 그 정부와 권세자에게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혁명을 일으켜야 할까? 아니면 끝까지 참고 견디며 서면으로 의사표시를 해야 할까? 루터 당시 농민들은 그런 고민을 하였다.
종교개혁 당시 농민들은 ‘슈바벤 농민들의 12개 조항’을 발표하여 자신들의 뜻을 전하였다. 농민들이 고통스러웠던 것은 영주의 엄청난 세금뿐만 아니라 교회서 거두어들이는 십일조였다. 교회는 농민의 십일조 뿐만 아니라 소나 가축이 일한 것의 십일조도 거두어갔다. 아무리 무식한 농민이라도 이중으로 십일조를 거두는 것은 부당하다고 호소하였다.(2조에서) 귀족은 자기들의 즐거움이나 취미를 위해 사냥, 수렵, 고기 잡는 것을 금지하였다. 우리 땅의 짐승인데 우리도 잡을 수 있게 해 달라. (4조에서) 남자가 죽으면, 그의 재산을 아이나 부인에게 상속하지 못 하고 영주가 다 가져갔다.(11조에서) 결국 농사꾼은 자유인에서 소작농으로 마침내 노예로 전락하였다.(3조에서)
중세에는 세 가지 신분이 있었다. 하나는 방어신분(Wehrstand)이다. 이들은 황제나 왕, 제후와 귀족들로 행정권과 사법권을 가진다. 둘째는 교직신분(Lehrstand)이다. 이들은 성직자들로 말씀선포와 가르치는 일을 한다. 셋째는 생산신분(Nährstand)이다. 이들은 농민, 수공업자, 상인으로 생산과 경제활동을 하며 방어신분과 교직신분을 먹여 살려야 한다. 루터나 중세 농민 모두 이런 봉건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신분은 바뀔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르네상스가 일어나면서 농민들은 깨어나기 시작하였다. 인문주의자들은 그리스, 로마의 고전에서 인간이 지니는 가치를 발견하였다. 그들은 신 중심의 중세 세계관에서 인간의 개성과 창의성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운동을 문학과 예술 분야에서 일으켰다. 이러한 정신은 문학과 예술의 범위를 넘어 평범한 백성에게까지 퍼져나갔다.
그리고 당시 최고 권력이던 교회 권력에 저항하는 개혁자들이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부패하고 타락한 교회 권력을 향하여 개혁을 외칠 때마다 무지한 농민들은 열광적인 반응을 보였다. 특히 루터가 제시한 만인 제사장 설이나 모든 사람이 성경을 해석할 권한이 있다고 하였을 때 농민들은 감동하였다. 루터가 ‘크리스천의 자유’에서 보여준 명제 “그리스도인은 만물 위의 자유로운 주인으로서 아무에게도 종속되지 않는다.”는 말이 비록 신앙적 의미라 할지라도 농민에게는 충격이었다. 지금까지 정치, 경제, 종교적 억압상태에서 허덕이던 농민들에게 큰 자극이었다. 하찮은 농사일도 성직자만큼이나 중요한 하나님의 일이라는 가르침은 농민을 깨웠다.
무지하다고 생각했던 농민들이 드디어 일어났다. 슈바벤 농민들이 첫 번째로 내세운 조항은 이러하다.
“모든 교회는 이제부터 담당 목사를 직접 선출하고자 한다. 선출된 목사는 거룩한 복음을 인간적인 것이나, 교리나 명령을 더 하지 말고 크고 분명하게 우리에게 설교해야 한다.”
성직자들이 기득권과 체제를 유지하기 위하여 설교하지 말고 진정한 복음을 선포하라는 요구였다. 현대 우리들의 시각으로 보면 너무나 당연한 요구다. 사실 루터 역시 그들이 요구한 12개 조항에 대해 상당 부분 동의하였다.
그러나 중세 천 년 동안 유지하여 온 신분제도와 기득권이 성명을 발표한다고 바뀔까? 권력자들이 언제 자발적으로 백성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 적이 있었던가? 그들이 가진 권력과 기득권을 기쁨으로 내려놓으며 백성과 함께 행복하게 사는 나라를 만들어 보자는 때가 있었던가? 농민들의 성명서와 요구조건은 코 푸는 휴짓조각과 같을 뿐이었다. 마침내 농민들은 인간적인 기본권을 찾고자 평화의 도구인 농기구를 무기 삼아 전쟁을 일으켰다. 그것이 바로 중세 시대 수도 없이 일어났던 농민전쟁이었다.
1517년 종교개혁을 일으킨 지 불과 4년이 지난 1521년 12월 비텐베르그에서 폭동이 일어났다. 3개월 동안 진행된 폭동은 끔찍하였다. 루터는 보름스 회의 이후 바르트부르크(Wartburg)성에 숨어 독일어 성경을 번역하고 있었다. 루터 대신 종교개혁을 이끌던 칼스타트(Karlstadt)의 지도로 비텐베르그에 폭동이 일어났다. 가톨릭 교인은 위협을 당했고 사제는 제단에서 머리채를 잡힌 채 끌려나갔다. 성상 숭배가 우상숭배라고 가르치자 군중은 성상을 끌어내고 쓰러뜨리고 쪼개고 불태웠다.
이제 겨우 종교개혁의 불씨가 붙었는데 그것이 걷잡을 수 없는 폭력 사태로 발전하는 것을 본 루터는 급히 비텐베르크로 내려와 그들을 진정시켰다. 그는 교회 개혁을 빙자한 폭력은 종교개혁을 무산시킬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을 느꼈다. 1522년 “반란과 봉기에 대해 주의하도록 모든 크리스천에 주는 진지한 경고”라는 논문을 발표하였다. 교회 개혁은 폭력으로 이룰 수 없음을 역설하며 우리가 싸워야 할 것은 육이 아니라 영이라고 하였다. 루터는 아직은 사회개혁, 신분 개혁을 할 때가 아니고 지금은 종교를 개혁해야 할 때라고 생각했다.
당시 교회(교황)와 국가(왕, 제후)는 세력 다툼을 하고 있었다. 한때는 교회가 세속 권력을 좌우하기도 하고, 반대로 세속 권력이 교회의 권한인 성직 임명권이나 교회 재산을 넘보기도 하였다. 루터는 정치와 종교의 완전한 분리를 꿈꾸었다. 1522년 바이마르 궁전의 요한 공작 앞에서 루터는 ‘세상 당국에 대하여, 어디까지 복종해야 하는가.’를 설교하였다. 그는 여기서 두 왕국론을 전개하였다. 세상 당국은 교회 일에, 교회는 세상 당국의 일에 염려하거나 간섭해서는 안 된다. 완벽한 정교분리였다.
그러나 루터의 두 왕국론은 후일 히틀러 정권에 독일 교회가 침묵하고 나아가 동조하는 모습을 보이는 토대가 되었다고 칼 바르트는 비판한다. 루터는 교회가 악한 정부에 대해서도 침묵해야 한다고 가르쳤기 때문이다.
농민들은 루터의 설교에 동의할 수 없었다. 악한 정부에게 피해를 보고, 재산을 빼앗기고, 종으로 전락하여 고통 받는 것은 성직자인 루터가 아니라 바로 자신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피를 흘려서라도 인간의 기본권을 찾고 싶었다. 1524년 농민들은 마침내 전쟁을 일으켰다. 루터는 그들을 찾아다니면서 폭력 사용은 안된다고 설교하였지만, 듣는 사람이 없었다. 루터는 구원의 도리를 바로 증거하는 종교개혁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였다. 혹시라도 농민의 폭동과 반란과 전쟁으로 종교개혁의 싹마저 다 뿌리뽑히지 않을까 염려하였다. 반대로 농민들은 구원받는 것뿐만 아니라 기존의 체제를 완전히 뒤바꾸는 혁명이 필요하다고 믿었다.
농민들이 반란을 일으킨 튀빙겐 지역에 다니면서 설득하다 실패한 루터는 격정적인 성명서 “도적질하고 살인하는 농민 강도 떼들에 대항하여”(1525)를 발표하였다. 그는 영주들에게 살인하고 약탈하는 농민을 무자비하게 진압할 것을 촉구하였다.
“할 수 있다면 찔러라. 몽둥이질하라. 그리고 목을 졸라라. 이로써 너희에게 죽음만이 기다릴 뿐이다. 너는 성스러운 죽음을 결코 맞이하지 못하리라. 지금 시대는 얼마나 놀라운가! 다른 사람들은 기도로서 천국을 맞이할 때, 너희는 제후의 당연한 폭력에 의해서 피 흘리며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루터는 농민들이 종교개혁을 망가뜨리는 것으로 해석하고, 그들을 저주하였다. 농민들은 영혼이나 육신이 10번 이상의 죽임을 당해도 마땅하다고 하였다.
루터의 이러한 모습은 개혁자라기보다는 수구 보수적인 종교인의 모습이라고 비판을 받는다. 루터는 실용주의자였다. 그는 종교개혁을 망가뜨리고 싶지 않았다. 할 수 있다면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제후의 힘을 빌려서라도 종교개혁을 이루고 싶었다. 농민전쟁은 종교개혁을 무너뜨리는 요인이 될 수 있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러나 가톨릭이나 일부 독일 제후들은 루터가 농민전쟁의 정신적 리더라고 생각하였다. 루터의 사상이 농민 전쟁을 촉발하는 요인으로 작용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루터는 제후의 편에 서서 농민전쟁을 강력하게 진압할 것을 설교하였는지 모른다. 종교개혁이 성공할 지 실패할 지 모르는 불안한 시대에 살았던 루터는 한계를 보일 수밖에 없었다.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킨 지 30년이 지나 유럽 전역으로 종교개혁의 불씨가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루터가 그토록 꿈꾸었던 종교개혁이 점차 안정을 찾기 시작할 즈음 제네바의 칼빈은 2세대 종교개혁가로 활동하였다. 칼빈은 루터보다 교회의 책임을 강조하였다. 교회는 중요한 사회적 문제에 대하여 침묵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교회 회의를 통해 결의함으로써 사회에 대하여, 정부에 대하여 분명한 의사를 표명하라고 가르쳤다. 사회는 종교와 더불어 분명한 개혁 대상이고, 그 역할을 교회가 찾고 감당해야 한다. 구약성경에서 선지자들이 억압받고 고통받는 백성을 대변하여 악한 왕에게 목숨을 내걸고 하나님의 정의를 외쳤듯이 교회도 이 세상에 할 말은 할 수 있어야 함을 가르쳤다. 칼빈은 그의 책 기독교 강요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만일 그들의 명령이 하나님께 반대되는 것이라면 그 명령은 존경하지 마라. 이런 경우에는 집권자들이 가진 위엄을 조금도 염려할 필요가 없다.”
칼빈의 제자였던 존 낙스는 칼빈의 사상을 좀 더 발전시켜 저항권을 적극적으로 선포하였다. 존 낙스는 실질적으로 장로교를 창시한 사람으로서 진정한 프로테스탄트 개혁가로 평가받고 있다. 존 낙스는 국가의 통치자인 왕의 권위를 절대적으로 보지 않았다. 낙스는 “하나님의 뜻을 거부하는 군주제라면 그것은 무익하며 오히려 다른 정부의 형태가 더 낫다.”고 하였다. 낙스는 통치자와 백성 간의 언약이 상호적임을 말하면서 “통치자와 정치권력을 갖는 것 못지 않게 법을 지키고, 백성들에게 한 약속을 지켜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그런데도 “통치자가 약속을 지키지 못할 경우, 그의 폐위는 정당할 수도 있다.”고 하였다. 존 낙스의 사상은 청교도로 이어지고 그들은 마침내 민주주의 초석을 놓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종교개혁을 시작한 지 올해가 정확히 500년이 되는 해다. 종교개혁자들과 그의 후예들이 사상을 발전시키고 피와 땀을 흘려 민주주의를 정착하는 데 큰 기여를 하였다. 종교개혁에서 루터의 역할을 무시하려는 마음은 추호도 없다. 종교개혁은 루터로부터 시작하였고, 그 사상은 500년을 지나며 발전을 거듭하였다. 이제 인권에 대한 개념도 바뀌고, 세상은 민주사회로 바뀌었다. 그런데 오늘 대한민국에 역사의 시곗바늘을 거꾸로 돌려 루터의 길을 가려는 사람들이 있다. 인권을 탄압하고 국정을 농단하는 권력자의 앞잡이가 되어 그들의 기득권을 지켜주기 위하여 몸부림치는 기독교인들이 있다. 장로교의 창시자였던 존 낙스가 봐도 울고 갈 일이 21세기 대한민국에서 벌어지고 있다. 정말 가슴이 아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