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 500주년 기념 시리즈 22
드디어 루터와 츠빙글리는 마르부르크에서 만났다. 두 사람 모두 평민 출신이었다. 루터의 아버지는 아들이 법률가가 되어서 성공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루터는 아버지의 뜻을 저버리고 수도원에 들어갔다. 그는 이성적이기보다 감정적이며 신비주의적이었다. 반면에 츠빙글리는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인문주의자가 되었다. 그는 당대 최고의 학문을 공부하였고, 논리적이며 이성적이었다. 격정적인 루터와 달리 츠빙글리는 온화하였으며 대화와 만남을 통한 소통에 탁월하였다.
루터는 종교개혁을 일으킬 마음이 없었다. 그는 어쩔 수 없는 상황 때문에 종교개혁의 길을 걷게 되었지만, 할 수 있는 한 가톨릭 안에서 개혁하고 싶어 했다. 반면에 츠빙글리는 학문적 판단하에 개혁을 단행하였고, 흑사병을 계기로 확실한 종교개혁자의 길을 걸었다. 그의 개혁은 루터처럼 머뭇거리지 않고 단호하였다. 츠빙글리는 루터와 달리 가톨릭과 타협하려는 마음이 없었다. 오히려 개혁자들과 연대하여 종교개혁의 불길을 더욱 공고히 하기를 원하였다. 견고한 가톨릭 세력인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가로부터 위협을 받는 스위스 도시였기에 더욱 동맹이 필요하였다. 츠빙글리는 스위스만의 연합으로는 힘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독일의 종교개혁 세력과 연대하려 하였다.
루터는 생각이 달랐다. 강력한 제후인 작센의 프리드리히가 지지하고 있으므로 연대의 필요성을 별로 느끼지 못하였다. 어떻게 해서든 가톨릭과 화해하고 싶어 했지, 개혁 세력과는 연대할 마음이 없었다. 비텐베르크에서도 그의 동지였던 칼슈타트가 개혁 드라이브 정책을 사용하자 그를 이단으로 지목하여 쫓아내었다. 자신의 사상과 조금이라도 다른 이야기를 하면 이단으로 낙인찍고 험한 말을 쏟아놓았다. 스위스에서 종교개혁을 일으키는 츠빙글리에 대한 소식을 들었지만, 츠빙글리의 성찬론이 자신과 다르다는 사실을 알고, 날카롭게 비판하였다. 츠빙글리는 마귀의 사주를 받은 자라고 단정하였다. 그는 츠빙글리의 사상이 어떠한지 자세히 살펴보지도 않고 비난부터 하였다. 이단과 타협하는 것은 종교개혁자로서 할 일이 아니라고 하였다. 더욱이 종교개혁 세력들과 연대하면 가톨릭 황제인 카를 5세에게 미움을 받게되고, 결과적으로 독일 종교개혁이 위태로워질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정치적 상황은 변하였다. 프랑스와의 전쟁을 성공적으로 끝내고 교황 클레멘트 7세와 화해한 카를 5세는 독일 내정에 간섭하기 시작하였다. 1529년 카를 5세는 슈파이에르 제국 의회를 소집하고 독일 개신교 지역에서 가톨릭 교회 회복을 위한 조치를 취하였다. 헤센의 영주였던 필립은 개혁 세력들이 연대함으로 교황과 황제의 공격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고, 독일의 정치적 독립을 꾀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필립은 루터 진영 영주들, 남부 독일, 스위스의 강력한 도시 국가들의 통합 계획을 세웠다. 스트라스부르그의 개혁자 마틴 부처 역시 루터 진영과 츠빙글리 진영 사이의 차이점을 제거함으로 개혁 사상의 통일성을 가져올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독일과 스위스의 연합은 시대적 요구였다.
1529년 10월 28일 츠빙글리는 마르부르크에 도착했다. 루터 일행은 조금 늦게 도착하였다. 헤센 성의 큰 거실에 양측의 신학자들과 목회자들, 몇몇 귀족들과 주의회 의원들 약 5~60명이 모였다.
취리히 - 츠빙글리(Huldrych Zwingli, 1484~1531), 콜린(Rudolph Collin, 1499~1578), 풍크(Ulrich Funk, 1480~1531), 프로샤우어(Christoph Froschauer, 1490~1564)
바젤 - 오이콜람파디우스(Johannes Oecolampadius, 1482~1531), 프라이(Rudolph Frey)
비텐베르크 - 루터(Martin Luther, 1483~1546), 멜란히톤(Philip Melanchthon, 1497~1560), 요나스(Justus Jonas, 1493~1555), 크루시거(Caspar Cruciger, 1504~1548), 뢰러(George Rörer, 1492~1557)
뉘른베르크 - 오지안더(Andreas Osiander, 1498~1552)
슈바벤 지방의 할 - 브렌츠(Johann Benz, 1499~1570)
아우크스부르크 - 아그리콜라(Stephan Agricola, 1491~1547)
슈트라스부르크 - 부처(Martin Bucer, 1491~1551), 헤디오(Caspar Hedio, 1494~1553), 슈트룸(Jacob Sturm, 1489~1553)
마르부르크 - 랑베르(Francis Lambert, 1486~1530)
회담이 시작되었지만, 루터는 여전히 찜찜한 마음으로 매사 소극적이고 부정적이었다. 그는 먼저 츠빙글리 일행에게 이단이 아님을 증명하라고 하였다. 모욕적이었지만 츠빙글리는 참았다. 루터는 삼위일체와 원죄, 세례에 관하여 차례로 심문하듯 물었다. 그 결과 루터는 자신이 상당 부분 잘못 알고 있음을 깨달았다. 스위스 츠빙글리의 개혁 사상에 아무 문제가 없었기 때문이다.
츠빙글리 일행은 가능한 한 회담이 공개되기를 원하였지만, 루터는 반대하였다. 츠빙글리는 자신이 구사하는 독일어가 스위스 방언이어서 참석자들이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으니 라틴어를 사용하자고 하였으나, 루터는 이 역시 반대하였다. 츠빙글리는 회의록 서기를 두어 공식적으로 기록하자고 하였지만, 루터는 또 반대하였다. 결국, 회담 내용은 각자가 알아서 기록하도록 하여 보고서가 7종이나 생겼다. 모두 사적으로 기록한 것이기에 어느 것이 정확한지 알기 어렵게 되었다. 어떻게 해서든 연대를 이루고 싶어 했던 츠빙글리는 가능한 한 루터의 요구사항을 다 들어주었다.
회담을 시작하면서 츠빙글리는 감동적인 기도를 하였다.
“저희 모든 이들의 주님이시요 아버지시여!
저희가 간구하오니 저희를 당신의 온유한 심령으로 충만케 하시고,
양 진영에서 모든 오해와 시기의 구름이 걷히게 하옵소서.
맹목적인 불화와 투쟁이 끝나게 하옵소서.
의의 태양이신 그리스도시여, 일어나시어 저희에게 비추시옵소서.
슬프게도 저희는 서로 다툴 때
주님께서 저희 모두에게 요구하시는 바 거룩함을 얻기 위한 노력을 너무나 자주 잊어버리나이다.
저희에게 권력이 있다고 함부로 휘두르지 못하도록 지켜 주시고,
거룩함을 증진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여 그 권력을 사용할 수 있게 해주옵소서.”
14개 조항은 아무 문제 없이 일치를 보았다. 그러나 마지막 15번째 성찬론에서 의견이 갈라졌다. 루터교 신학자인 브릴리오(Yngve Brilioth, 1891~1959)는 루터가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 생활과 전통적인 라틴 전례 예식에 깊은 영향을 받아서, 종교개혁 이후에도 성찬 안의 신비적인 요소를 유지하였고, 가톨릭의 전통적인 전례 행태와 완전히 단절하지 못하였다고 지적하였다. 츠빙글리는 성찬을 구원의 선포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기념하는 예식으로 보았다. 루터는 성찬을 통하여 신자들이 문자적으로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하는 것으로 해석하였다. 즉 떡과 포도주가 문자 그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라고 주장하였다. 츠빙글리는 루터의 성찬론이 가톨릭의 화체설과 별반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하였다. 양 진영은 꼬박 이틀 동안 지루한 논쟁을 이어갔다. 루터 진영에서는 루터 홀로 싸웠지만, 츠빙글리 진영에서는 츠빙글리와 오이콜람파디우스가 번갈아가며 토론에 참여하였다. 나중에 루터가 지쳐서 멜란히톤에게 토론에 참여해달라고 부탁하였지만, 그는 참여하지 않았다. 루터는 외로웠다. 양 진영은 조금도 양보하지 않았다.
어렵게 성사된 만남은 마지막 성찬 문제에 일치를 보지 못하였다. 헤센의 영주는 주일 밤 회담 대표를 자신의 숙소에 부른 뒤, 어떻게 해서든 합의를 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월요일 아침 영주는 마지막으로 루터와 츠빙글리 일행을 불렀다. 그들은 이 땅에서 마지막으로 만났다. 츠빙글리는 눈물을 흘리며 루터에게 다가가 형제로서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루터는 악수를 거절하였다.
“여러분의 정신은 우리의 정신과 다릅니다.”
츠빙글리는 14개 본질적인 교리에서 일치를 보았으니 비록 비본질적 교리인 성찬론이 서로 다르더라도 성도의 사귐을 가질 수 있지 않느냐고 하였다.
“우리가 서로 동의하는 모든 내용에 대해서 서로 간의 일치를 고백합시다. 나머지 점들은 우리가 형제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으로 대신합시다. 만약 우리가 부차적인 점들의 차이를 감내하지 못한다면 교회 안에 결코 평화가 없을 것입니다.”
루터는 당황하여 말하였다.
“당신이 나를 형제로 여기다니 뜻밖입니다. 그것은 당신이 자신의 교리를 그다지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분명한 증거입니다. 여러분은 기독교 교회의 사귐에 들어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여러분을 형제로 인정할 수 없습니다.”
둘은 그렇게 헤어졌다. 양 진영을 지켜본 사람 중에 중도적 견해를 밝혔던 부처는 회담 결렬 후 루터 측이 가톨릭 황제 카를 5세의 눈치를 너무 보았다고 평가하였다. 회담을 지켜본 루터교 개혁가 아비뇽의 랑베르(Francis Lambert, 1486~1530)는 츠빙글리에게 큰 감명을 받았다.
“하나님께서 츠빙글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하나하나 제시한 교리들을 내 마음에 새겨주셨다네.”
회담에 참석한 평신도들은 츠빙글리에게 마르부르크를 개혁하는 목회자가 되어 달라고 요청하였다. 마르부르크 개혁자 히페리우스(Andreas Hyperius, 1511~1564) 역시 회담 전에는 루터 쪽에 자문을 받으며 개혁하였지만, 회담 이후에는 츠빙글리 쪽에 자문을 받았다.
어찌 되었든 회담은 결렬되었다. 개혁 진영의 분열은 기독교 역사에 가장 안타까운 사건이었다. 독일과 연대를 이루지 못한 츠빙글리는 2년 후 1531년 가톨릭의 기습 공격에 목숨을 잃었다. 스위스 종교개혁의 큰 손실이었다. 루터 역시 카를 5세의 공격 으로 종교개혁의 본거지인 색스니(Saxony) 지역을 빼앗겼다. 더욱 불행한 것은 지금도 비본질적인 문제로 분쟁이 계속되고 있다. 불행은 한 번으로 족하다.
1. 필립 샤프, 교회사 전집 7, 독일 종교개혁, 박종숙 옮김, (서울 : 크리스챤다이제스트, 2015)
2. 필립 샤프, 교회사 전집 8, 스위스 종교개혁, 박경수 옮김, (서울 : 크리스챤다이제스트, 2013)
3. 유스토 L. 곤잘레스, 종교개혁사, 서영일 옮김, (서울 : 은성, 1989)
4. 후스토 L. 곤잘레스, 기독교 사상사 3, 이형기, 차종순 옮김 (서울 : 2008)
5. 루이스 W. 스피츠, 종교개혁사, 서영일 옮김, (서울 : 기독교문서선교회, 1988)
6. 박건택, 개신교 역사와 신학, (서울 : 개혁주의 신행협회, 1998)
7. 황대우, "말부르크의 종교개혁자 히페리우스(1511~1564) :그의 학문적 경건을 중심으로" ⌜제5회 종교개혁신학 학술대회⌟ (2014)
6. 김미형, "16세기 개신교 교회일치를 위한 노력 - 마르부르크 회담을 중심으로" ⌜장신대 신학석사 논문⌟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