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 500주년 기념 시리즈 14
1517년 루터가 95개 조 반박문을 발표했을 때 교황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이름도 생소한 작은 마을에서 벌어진 사건의 파장이 크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몇 장의 팸플릿으로 제작된 95개 조 반박문은 한 달 안에 전 유럽으로 퍼져나갔다. 교황의 부패와 타락에 염증을 느끼던 군중은 신문 호외처럼 뿌려지는 팸플릿에 열광적인 반응을 보였다.
언제나 시대의 흐름을 앞서가는 예술가들은 세상이 변하고 있음을 감지하였다. 르네상스 최고의 화가 중 한 명인 뒤러(Albrecht Dürer, 1471~1528)는 작센의 선제후 비서인 슈팔라틴(G. Spalatin, 1484~1545)에게 편지를 보냈다. 루터의 초상화를 동판에 그리고 싶다. 루터를 동판에 그리고 싶다는 그의 소망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프리드리히 선제후는 여기서 힌트를 얻었다. 그는 자신의 궁정 화가인 루카스 크라나흐(Lucas Cranach der Ältere, 1472~1553)에게 루터를 그리도록 하였다. 루터와 크라나흐의 첫 만남은 이렇게 이루어졌다.
크라나흐는 화가의 아들로 태어나서 빈에서 작품활동을 하다 1504년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초청으로 비텐베르크에 온다. 그는 이후 선제후 3대에 걸쳐 궁정화가로 일한다. 그는 비텐베르크 대학의 지식인 모임과도 밀접한 교제를 가지며, 서점, 출판사, 상점, 약국 등을 경영하는 능력을 보여 부를 축적한다. 크라나흐는 재력과 사회적 지위를 근거로 비텐베르크의 시의원과 시장직을 수차례 역임하였다. 루터보다 11살이나 많았지만, 루터의 개혁 사상에 적극적으로 동의하고 그를 지지하였다.
크라나흐는 37살의 루터를 강인한 의지와 신념에 가득 찬 수도사의 모습으로 그렸다. 루터는 수도사로 고행을 추구하였기에 수척하였고, 모자를 쓰지 않았으며, 머리 중앙을 삭발한 수도사의 모습이었다. 당시 사람들은 루터의 얼굴을 보려는 욕구가 컸으므로 동판화 그림은 매우 유용했다. 루터는 이제 보름스 회의에서 재판을 받아야 할 처지에 있었기 때문에, 작센의 선제후는 루터 초상화와 팸플릿 인쇄물을 통하여 선전전을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루터의 모습이 너무 날카롭다고 판단한 선제후는 조금 부드럽게 그리도록 지시하였다. 크라나흐가 두 번째로 그린 동판화의 루터는 한결 평화롭고, 부드러우며 경건한 인물로 바뀌었다.
루터의 글은 팸플릿으로 제작되어 퍼져나갔다. 팸플릿에는 크라나흐가 그린 그림이 들어갔는데 그 영향력은 대단하였다. 아직 글을 읽지 못하는 대중에게 그림은 종교개혁 정신을 일깨웠다. 예수님께서 제자의 발을 씻어주는 장면과 교황의 발에 입 맞추는 장면을 대조하여 그린 목판화는 글을 몰라도 그 의미를 분명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크라나흐의 그림은 종교개혁 정신을 그대로 담고 교황교회에 맞서 싸우는 강력한 무기였다.
하지만 루터는 미술의 가치에 대하여 약간 회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교회가 막대한 재정을 미술품 제작에 쏟아붓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곧 우상숭배로 연결될 뿐만 아니라 미술품 제작에 드는 예산은 결국, 백성의 부담이었기 때문이다. 루터는 성상을 비롯한 예술 작품은 사소하고 하찮은 것으로서 할 수 있다면, 제거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상황은 보름스 종교회의 이후 급변하였다. 루터가 바르트부르크 성에 숨어 성경을 번역하는 동안, 비텐베르크는 칼슈타트와 필립 멜랑톤에 의해 종교개혁이 진행되고 있었다. 칼슈타트는 루터의 개혁 사상에 동조하여 성상의 무용성을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차라리 그 돈으로 가난한 자들을 도와주는 것이 훨씬 좋겠다는 말에 시민들은 흥분하였다. 그들은 교회 안의 성상을 끌어다, 파괴하였다. 폭동 수준이었다.
이에 바르트부르크 성에 숨어 지내던 루터는 급히 비텐베르크로 내려와 8번의 설교를 한다. 잘못 숭배되고 있는 성상은 폭력으로 없앨 것이 아니라 질서와 권위를 따라 없애야 한다. 그리고 우상숭배와 관련되지 않은 그림이나 조각은 허용될 수 있다. 그림은 사람의 자연스러운 심리적 현상이며, 따라서 종교 미술은 인간 성향의 연장으로 이해해야 한다. 성경 이야기는 성경의 글과 함께 구원의 도리를 설명하는 데 유용하다.
그는 바르트부르크 성에서 번역한 독일어 성경을 처음 출간할 때 크라나흐에게 그림을 부탁하였다. 1522년 9월 처음 출간하는 루터의 독일어 성경에 크라나흐가 그린 21개의 목판화가 삽입되었다. 이 삽화는 루터의 지시에 따라 만들어졌으며 어디에 어떤 그림이 들어가야 할지 루터가 정하였다. 크라나흐의 그림은 루터 사역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두 사람은 단지 사역에만 마음을 같이 한 것이 아니다. 1520년 크라나흐의 막내딸 안나가 태어났을 때 루터는 안나의 세례 대부가 되었다. 수녀원에서 9명의 수녀가 루터를 찾아왔을 때 그녀들이 시집갈 때까지 보호해 준 사람이 바로 크라나흐였다. 1525년 루터의 결혼식 때 크라나흐 부부는 증인이 되었다. 그 이듬해 루터의 첫아들 한스가 태어났을 때 크라나흐는 한스의 대부가 되었다. 1520년 크라나흐 화실에서 일하는 도제들이 학생 폭동에 휘말렸을 때 루터는 노골적으로 크라나흐 편을 들었다. 1521년 루터가 바르트부르크 성에 숨어 있을 때 비밀리에 편지를 크라나흐에게 보내 자신의 정황을 알려주었다. 한 명은 신학자이고, 다른 한 명은 화가였지만 둘의 우정은 평생 이어갔다.
미술에 대한 독립된 글을 쓴 적은 없지만, 루터는 다양한 글에서 예술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발전시켜나갔다. 칼빈을 비롯한 다른 종교 개혁자들은 성상을 부정적으로 생각하여 미술에 대해서도 부정적 태도를 취하였다. 그러나 루터는 그림이 구원에 필수적이지는 않지만, 신앙에는 매우 유익하다고 확신하였다. 크라나흐는 루터의 이러한 견해를 기쁘게 생각하였다. 크라나흐 뿐만 아니라 루터 곁에는 루터의 사상을 지지하는 많은 예술가가 모여들었다. 에르하르트 쇤(Erhard Schön, 1491~1542), 한스 발둥 그린(Hans Baldung Grien, 1484~1545), 게오르크 렘베르크(Georg Lemberger, 1490c~1545c), 크라나흐의 아들 루카스 크라나흐(Lucas Cranach, d.J., 1515~1586) 등이다. 루터는 미술의 교육적 특성을 좀 더 강조하였다. 예술에 대한 열린 태도를 가진 루터 때문에 다른 교파와 달리 루터교는 프로테스탄트 미술을 정립하는 데 큰 역할을 감당하였다.
크라나흐는 도나우 화파로서 사실적으로 그림을 그렸다. 에르하르트 쇤이나 한스 발둥 그린은 루터의 초상에 성령을 상징하는 비둘기나 후광을 그려서 루터를 성인으로 묘사하였다. 크라나흐는 루터를 그릴 때, 일부러 과장하지 않았다. 그는 루터를 오래동안 지켜보면서 그의 변모하는 모습을 담아내려 하였다. 초기에는 평판 좋은 수도사로서의 루터를 그렸고, 그다음에는 사변적이지만 단호한 투쟁자의 모습, 마지막으로는 성숙하고 신중하며 부드러운 사람으로 그렸다.
크라나흐는 세 번째로 루터의 초상을 동판으로 제작하였다. 루터의 옆 얼굴은 에너지로 가득 차 있으며 종교개혁자로서 많은 사람에게 존경받는 모습으로 그렸다.
1521년 칼슈타트로 말미암아 발생한 폭동 때문에 루터는 비텐베르크로 내려와 멜랑톤의 집에 숨었다. 이때 비밀리에 크라나흐에게 한 사람이 초상화를 그려달라고 하니 오라는 전갈을 보낸다. 아무것도 모르고 찾아간 크라나흐는 루터를 만났고, 귀족처럼 변신한 루터의 모습을 그렸다.
크라나흐는 루터 부부의 모습도 그렸다. 머리를 그물망으로 모으고, 몸에 붙는 드레스를 입고, 두 손을 포갠 카타리나의 모습은 절제되고 단순하다. 언제나 루터를 돌봐주는 카타리나의 모습 속에 성실함이 묻어 있다.
루터가 수도사가 될 때부터 불화하였던 아버지는 두 아들을 흑사병으로 잃고 집안의 혈통이 끊길지 모른다는 염려를 하였다. 마침 루터가 결혼한다는 소식에 부자는 화해하고 비텐베르크를 찾아왔다. 크라나흐는 루터의 부모를 그렸다. 부친 한스의 표정은 준엄하며 모친 마가레타는 근심의 눈빛으로 여윈 얼굴이다.
1532년부터 제작된 루터는 젊고 투쟁적이고 외로운 수도사는 아니었다. 이제는 어느 정도 안정되었고, 나이 들면서 살이 찌기 시작한 모습이다. 베레모를 쓴 루터의 모습은 교회의 스승이고, 교수로서의 풍모를 갖추었다.
루터 생애 말기에는 전신상을 그렸다. 50대 후반의 루터는 성공한 종교개혁가의 모습으로 단단함과 신뢰를 표현하였다. 루터는 크라나흐 덕분에 그 어떤 사람보다 많은 초상화를 남겼다.
크라나흐 부자는 모두 예수님의 마지막 만찬을 그렸다. 그들은 만찬석에 예수님의 제자들 대신, 종교개혁가들을 그려 넣었다. 예수님을 배반한 유다는 면죄부를 판매하던 테첼로서 동전 주머니를 가지고 있으며 그의 발은 배신을 뜻하기 위하여 밖으로 내밀어져 있다. 루터는 포도주잔을 받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아들 루카스 크라나흐가 그린 마지막 만찬은 보다 신학적인 의미를 풍성히 담고 있다. 예수님 오른편에는 양손을 모으고 있는 멜랑톤을, 왼편에는 비텐베르크의 목회자 부겐하겐을, 그 옆에는 손으로 주님을 가리키는 루터를 그렸다. 가장 왼편에 아버지 크라나흐, 그 옆에 게오르그 폰 안할트(Georg von Anhalt)공작, 루터의 95개 조 반박문을 번역한 유스투스 요나스(justus Jonas), 게오르그 마조르(Georg Major), 루터의 제자 카스파 크루치거(Caspar Cruciger), 요한네스 포스터(Johannes Forster), 요하네스 페핑거(Johannes Pfeffinger), 맨 앞에 무릎 꿇고두 손 모으고 있는 요아킴 폰 안할트(Joachim von Anhalt)공 이다.
루터와 화가 크라나흐는 아름다운 우정을 쌓으며 기독교 미술의 체계적 정립을 위하여도 힘을 다했다.
1. 읽기와 지식의 감추어진 역사 / 한스 요아힘 그립 지음 / 노선정 옮김 / 이른아침 / 2006년
2. 프로테스탄티즘 혁명의 태동 / S. 오즈맹 지음 / 박은구 옮김 / 혜안 / 2004년
3. 기독교의 역사 / 알리스터 맥그라스 지음 / 박규태 옮김 / 포이에마 / 2016년
4. 크라나흐가 사용한 종교개혁 소통의 근본적 도구인 이미지로부터의 선교학적 교훈 / 권진호 씀 / 선교와 신학 40 / 2016년
5. 루터의 종교개혁과 대 루카스 크라나흐 / 이한순 씀 / 미술사논단 제 3호 / 1996년
6. 루카스 크라나흐의 최후의 만찬 / 전광식 씀 / 목회와 신학 2005년 4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