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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gos Brunch Feb 27. 2017

여성의 인권과 예수님

요한복음

고대 남성들은 여성을 소유물로 여겼다. 누가 자기 여자를 건드리면, 그에게 벌을 주는 권한도 용서하는 권한도 모두 남자가 가졌다. 왜냐하면, 자기 소유물로 생각했으니까. 그러나 구약성경은 여성을 남성의 소유물이라 하지 않는다. 성경에 "간음하지 말라"는 명령이 있다. 이는 여성이 남자의 소유물이니까 간음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때 남자와 여자를 동등하게 지으셨다. 그리고 두 사람을 동등한 자격으로 한 가정을 이루게 하셨다. 가정을 이루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간음하는 것은 하나님이 이루신 가정을 깨트리는 행위이기 때문에 간음하지 말라고 하셨다.


신명기에 여성 인권을 보호하는 법이 여럿 있다. 결혼했는데 처녀가 아니라는 이유로 쫓아낼 경우를 대비하여 여성은 첫날 밤 하혈한 흔적을 가지고 있으라 권면한다. 아마도 고대 남자들은 별의별 핑계를 다 대어서 여자를 무단으로 쫓아내곤 했나 보다. 강간당하는 경우도 자세히 기록하였다. 성안에서 강간당할 때는 반드시 소리를 쳐야 한다. 소리를 치면 도움을 받을 수 있고, 설령 도움을 받지 못한다 하더라도 여자는 죄가 없고 남자에게만 죄가 있다. 성 밖에서 강간당할 때는 소리쳐도 도와줄 사람이 없고 오히려 그 남자에게 더 큰 피해를 볼 우려가 있어서 소리치지 않아도 된다. 일단 여자의 생명을 보존하는 일이 먼저다.


그런데 현실은 어떠했을까? 이스라엘은 그 법을 잘 지켰을까? 아쉽게도 이스라엘은 성경의 법보다는 주변 나라의 세속법을 따랐다. 부인을 여러 명 두는 일은 다반사였다. 창세기에 보면 아브라함은 위기에 처하자 자기 부인을 누이라 속이고 다른 남자에게 넘겨주었다. 하나님의 백성인 아브라함이 할 짓은 아니었다.


잠언에 현숙한 여인을 정의하였다. 현숙한 여인은 현명하고 정숙하고 아리따운 여자를 연상한다. 그러나 잠언은 전혀 다르게 정의한다.

“그녀는 양털과 삼을 구하여 부지런히 손으로 일하며”(잠31:13)

밤이 새기 전에 일어나서 자기 집안사람들에게 음식을 나누며”(잠31:15)

“밭을 살펴보고 사며 자기의 손으로 번 것을 가지고 포도원을 일구며”(잠31:16)

“힘있게 허리를 묶으며 자기의 팔을 강하게 하며”(잠31:17)

현숙한 여인은 새벽에 일어나 밥을 차려놓고 밭에 나가서 열심히 일하고 자기 손으로 돈을 벌어 포도원을 장만한다. 잠언의 현숙한 여인은 팔과 다리에 울퉁불퉁한 근육으로 가득 차 있어야 한다. 그러면 그녀의 남편은 어떠했을까?

“그의 남편은 그 땅의 장로들과 함께 성문에 앉으며 사람들의 인정을 받으며”(잠31:23)

성문에는 으레 커다란 나무 그늘이 있다. 거기 앉아서 마을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판결한다. 무더운 날씨 나무 그늘에 앉아서 “야 넌 부인 잘 두었구나. 이번에 포도원 또 샀다며?” 말을 듣는 사람이다. 하나님의 법과는 상관없이 남자들은 연약한 여성을 억압하고 한량 짓을 하였다. 예수님 당시에도 별반 다르지 않아서 여성은 수에 치지도 않았다.


요한복음 8장에 보면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자가 나온다. 현장에서 잡았는데 어찌 남자는 없고 여자만 잡혀 왔을까? 레위기에 보면 간음한 자는 남자와 여자 모두 돌로 쳐 죽이라고 하였다. 율법을 철저히 지킨다고 자부하는 바리새인들이 어찌하여 여자만 붙잡고 남자는 놓아주었을까? 이들은 율법을 지킨다고 하지만, 강자에게는 약하고 약자에게는 강하였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책망하시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공평하지 못하다. 정의롭지 못하다. 강자가 무슨 잘못을 범하면, 아무리 큰 잘못을 범했어도 다 용서하여 준다. 그러나 약자는 조그만 잘못을 범해도 가차 없이 법을 집행한다. 그러면서 자신들은 정의롭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정의가 과연 그럴까?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정의를 이렇게 소개한다.

“그는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실로 정의를 시행할 것이다.”(사42:3)

하나님의 정의는 약한 자를 보호하는 정의다. 상한 갈대,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않는 정의다. 하나님은 세상에서 멸시받고 천대받고 무시당하고 설움 받는 자들의 변호사가 되고 아버지가 되신다.


정의를 집행하려면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힘 있고 권세 있고 돈 있는 사람에게 법은 더욱 엄격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힘을 주고, 권세를 주고, 돈을 주었을 때는 자기들만 잘 먹고 잘살라고 준 것이 아니다. 그것은 책임이다. 하나님을 대신하여 약한 자를 돌보고 사회를 공평하게 만드는 지도자로서 책임을 감당하라는 것이다. 야고보 사도는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약3:1) 하였다. 권한이 주어지면 책임이 훨씬 커진다. 이스라엘은 권한을 가지고 남용하였지만, 책임은 전혀 감당하지 않았다. 그들은 약자를 괴롭혔다. 정의롭지도 공평하지도 않았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자를 데려온 바리새인들의 의도는 분명하다. 법을 정확히 지키려는 뜻은 전혀 없다. 그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해서든 공격하고 쓰러뜨리기 원하였다. 그들이 왜 예수님을 이렇게도 싫어하고 미워하였을까?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자신의 사명을 분명히 밝혔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눅4:18-19)

예수님은 주의 은혜의 해(희년)를 선포하려고 오셨다. 가난한 자에게 복음(good news)을, 전쟁으로 억울하게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병들고 눈먼 자에게 회복을, 이런저런 억울한 사정으로 눌린 자에게 자유를 주는 것이 바로 은혜의 해다. 예수님이 사랑을 베풀고자 한 대상은 분명하다. 약자들이다. 누구도 돌보지 않는 약자들, 눈물 흘리는 자들을 품어주시려는 것이다.


사회의 리더요 기득권층인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제사장들은 그러한 예수님을 싫어하였다. 어떻게 해서든 예수님을 궁지에 몰아넣고 공격하고 죽이려고 하였다. 그래서 절묘한 묘수를 찾았다. 간음하다 현장에 잡힌 한 여인을 예수님 앞에 끌고 왔다. 공개적으로 망신을 주기 위하여 성전에서 말씀 가르치는 중에 끌고 왔다. 그녀는 약자이면서 명백히 죄를 범한 여자였다. 모세의 법과 사랑의 법 둘 중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가? 어느 쪽도 선택할 수 없는 외통수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예수님은 주저함 없이 모세의 법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사형 집행 방법을 정하셨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예루살렘 성전은 평상시에도 늘 사람들이 모여서 로마에 대하여 불평과 원망을 쏟아놓던 곳이다. 열싱당들은 칼을 품고 다니면서 주요 인물을 암살하던 곳이다. 로마 군인들은 성전 근처에 감시탑을 세워 놓고 만약의 사태를 늘 대비하였다. 짐작건대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돌을 들고 성전으로 모여들 때부터 로마 군인들은 따라붙었을 것이다. 광장에 모인 사람들은 말이 험악해진다. 손에 촛불을 들었든, 태극기를 들었든 많은 사람이 모이면, 흥분하고 과격한 말을 거침없이 쏟아놓는다. 지금 유대인은 촛불도 아니고 태극기도 아니고 손에 돌을 들고 있다. 여차하면 정말 광장을 피바다로 만들 상황이었다. 긴박한 상황에 로마 군인은 극도로 긴장하며 사태를 지켜 보고 있었다.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속국이었기에 사형 선고는 로마 총독만이 내릴 수 있다. 비록 모세의 법에 사형을 선고해도 로마법에 따라 다시 재판을 받아야 한다. 모세의 법만 의지하여 여자를 돌로 쳐 죽이는 소동이 일어난다면, 그는 반드시 체포되어 그에 상응하는 벌을 받게 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은 돌을 든 유대 군중에게 말하였다.

“나는 이 여자의 죽음에 책임질 각오가 되어 있다. 모세의 법에 따라 죽이자. 누구 나와 함께 이 여자의 죽음에 책임질 사람이 있느냐?”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있다면 나와서 돌을 던지고 나와 함께 책임을 지자.”


모였던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도전에 정신적 압박감을 느꼈다. 그들은 뭔가 결단을 해야 했다. 중동에서 이런 상황이면, 언제나 나이 든 사람의 눈치를 본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낀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그 자리를 떠났다. 마침내 돌을 든 사람은 다 사라졌다. 예수님은 여인에게 말하였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짐작이지만 돌을 버려두고 떠난 사람들이 멀리서 예수님울 지켜보았을 것 같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여자를 정죄하지 않고 풀어주는 것을 보았다. 이제 여자를 향한 증오는 예수님에게로 옮겨졌다. 예수님은 간음한 여인을 야박하게 정죄하고 배척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가 받아야 할 멸시와 증오, 형벌을 예수님 자신이 다 짊어지셨다. 그리고 그녀에게 원하는 것은 한가지였다. "이제부터 바른 삶을 살아라."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님의 모습을 이렇게 표현하였다.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53:5)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기 위하여 오셨다. 세상에서 억압받고, 설움 받고, 가난하고, 법이 있어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여 억울하게 피눈물 흘리는 우리의 변호자가 되기 위하여 오셨다. 우리의 죄악을 예수님이 다 짊어지시고, 우리가 맞아야 할 채찍을 다 받으시고, 우리가 받아야 형벌을 다 담당하기 위하여 오셨다. 그리고 단 한 마디. “너희는 이제부터 바른 삶을 살아라!” 이것이 주님의 용서다.


반대로 힘있고 권세있고 돈 있는 기득권층은 책망하신다. 너희는 받은바 그것을 어떻게 사용했느냐? 책임을 물으신다. 그들에게는 더 엄중하고 엄격하게 심판하신다. 하나님의 구원은 언제나 이중적인 면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구원이고 다른 하나는 심판이다. 우리는 지금 하나님의 용서를 받을 자인가? 심판을 받을 자인가? 조금이라도 하나님께 은혜와 사랑을 받았다면, 조금이라도 물질적 여유와 권세를 받았다면, 책임이 막중하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주(註)

1) 위의 글은 "중동의 눈으로 본 예수, 케네스 E. 베일리 지음, 박규태 옮김, 새물결출판사, 353쪽 이하"에 크게 의존하여 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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