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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gos Brunch May 26. 2016

불량배들 사이에 선 여인

사무엘하 20장

압살롬이 반역하였을 때 유다 지파를 제외한 모든 지파가 압살롬의 편에 섰다. 

어떤 조건으로 보더라도 압살롬이 이길 것 같았는데 상황은 그렇지 않았다. 

하나님의 기적적인 도우심으로 승리를 거둔 다윗이 요단을 건너 돌아오는데 북쪽 이스라엘 지도자들이 다윗을 마중 나왔다. 

그들은 반역에 가담한 자들이기에 죄인으로서 겸손해야 함에도 오히려 목숨 걸고 다윗을 지킨 유다 지파를 책망하였다. 

“당신들이 우리와 상의했더라면 우리가 기꺼이 다윗을 왕으로 모셨을 터인데 왜 상의하지 않았느냐?

우리가 수적으로도 크고 중한데 우리와 상의하지 않은 것은 큰 잘못이다."


반역자들이 오히려 큰소리 치는 상황에서 베냐민 지파의 세바라는 사람이 그들의 불평에 불을 붙였다. 

“다윗을 따라가 보았자 우리가 얻을 것은 없다.

언제 다윗이 우리 편이 된 적이 있느냐?"

북이스라엘 지도자들은 바로 세바를 따르기 시작했다. 

그들이 다윗을 왕으로 모실 의향이 있었다는 말은 다 거짓이었다. 


우리말 성경은 세바를 ‘불량배’라 규정하였다. 

NIV에서는 그를 troublemaker라고 하였고 KJV에서는 그를 벨리알(마귀)의 아들이라 규정하였다. 

성경에서 불량배란 깡패나 건달을 의미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제멋대로 행동했던 엘리 제사장의 두 아들 흡니와 비느하스를 불량배라 하였다. (삼상2:12) 

하나님이 사울에게 기름 부어 왕으로 삼을 때 뒤에서 구시렁거리던 사람들을 불량배라 하였다.(삼상10:27) 

다윗의 정당한 요구를 깨끗이 무시했던 어리석은 나발 역시 불량배라 하였다.(삼상23:17,25) 

아말렉을 소탕하고 돌아오는 길에 짐을 지키던 동료에게 노획물을 나누어주지 말자고 했던 무리 역시 불량배라 하였다. (삼상30:22)

그러니까 성경의 불량배는 하나님의 법도를 따르지 않고 제 감정대로 제멋대로 행동하는 사람을 통칭하는 말이다. 

이런 사람은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이고 백해무익한 사람이다. 

그런데 삼하20장에 보면, 진짜 깡패 같은 불량배 한 사람이 있는데 이 사람은 칼 밖에 해결책을 모르는 사람이다. 

바로 다윗의 군대장관 요압이다. 

사울의 군대장관 아브넬이 평화로운 방법으로 남북통일을 이루고자 사신으로 다윗을 찾아왔다. 

아브넬은 북쪽 이스라엘 모든 지도자를 설득하여 다윗에게 투항하려고 찾아온 것이다. 

다윗은 그러한 아브넬을 귀히 여겨 군대 장관으로 삼았다. 

그 소식을 들은 요압은 강력한 경쟁자가 된 아브넬을 단칼에 찔러 죽였다. 

그는 국가의 안녕과 장래를 전혀 생각하지 않고 오직 자기 이익만을 위하여 그러한 짓을 감행하였다. 


그는 자기 부하이고 충신이었던 우리아 역시 죽였다. 

물론 다윗의 지시로 죽이긴 했지만, 진정 그가 부하를 아끼는 사람이었다면 다윗의 부당한 명령에 항거해야 했다. 

“우리아는 충신이고 용감한 장군인데 왜 그를 죽이려 하십니까?” 

반문해야 했던 요압은 우리아를 죽이는데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다윗은 압살롬이 반역하였을 때 그를 죽이지 말고 생포하도록 부탁하였다. 

다윗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요압은 압살롬의 심장에 창을 꽂아 죽였다. 

따지고 보면 압살롬과 요압은 육촌 형제지간인데 그의 칼에는 인정이 없었다. 


다윗은 압살롬과 싸워 이긴 후 압살롬의 군대 장관이었던 아마사를 자신의 군대 장관으로 등용하려고 하였다. 

남북으로 갈라져 싸운 후이기에 어떻게 해서든 하나로 봉합하려는 다윗의 고육지책이었다. 

그러나 요압은 다윗의 큰 뜻을 헤아리지 않고 오직 자기 자리에 대한 욕심 때문에 아마사를 찔러 죽였다. 

아마사와 요압은 이종사촌지간이었다. 

요압은 진정 깡패요 잔인무도한 칼잡이였다. 


그런 그가 세바가 숨어있는 아벨 성을 포위하였다. 

그는 토성을 쌓고 성벽을 쳐서 아벨 성의 사람들을 잔인하게 다 죽일 작정이었다.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아벨 성에는 불량배란 불량배는 다 모여들었다. 

troublemaker인 세바와 불평만 일삼으며 그를 따르는 북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 아벨성을 장악하고 있다. 

성 밖에는 잔인한 칼잡이로 이름을 떨치는 요압이 포위하고 있다. 


위기의 순간에 한 지혜로운 여인이 등장한다. 

그녀는 담대하게 요압을 불러 일대일 담판을 지었다. 

아벨 성의 장로들과 남자들은 다 어디로 가고, 이름없는 한 여인이 등장했다는 것은 놀랄만한 일이다. 

그녀가 내세우는 논리의 근거는 신명기 20:10-14에 규정한 전쟁에 관한 율법이었다. 

신명기의 율법에 따르면 어떤 성읍을 치려 할 때 반드시 먼저 평화회담을 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평화를 위한 노력이 허사로 돌아갔을 때야 성을 공격하도록 하였다. 

이것은 이방 민족의 성을 공격할 때 규칙이다. 


"그런데 아벨 성은 엄연히 유대인의 성인데 네가 아무리 잔인무도한 사람이라 하지만, 어찌 하나님의 법도를 외면하고 이 성을 진멸하려고 하느냐!"

당당하게 따지는 여인 앞에 요압은 어찌할 줄 몰라 한다. 

왕의 명령에도 안하무인격으로 행동하던 요압, 사촌지간에도 사정없이 칼을 사용하던 잔인한 요압이 하나님의 말씀을 논리 정연하게 풀어내는 이름없는 여인 앞에 당황하기 시작하였다. 

"요압이 대답하여 이르되 결단코 그렇지 아니하다 결단코 그렇지 아니하다 삼키거나 멸하거나 하려 함이 아니니”(삼하20:20)

정말 통쾌한 장면이 아닐 수 없다. 


그녀는 성안에 들어가 모든 사람을 설득하여 세바 한 사람만 요압에게 넘겨주고 성을 구해내었다. 

한 이름없는 여인의 지혜는 불량배들 틈바구니에서 온 성을 구해낸다. 

그녀의 무기는 칼도 아니고 외모도 아니고 분명한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오늘날 이런 크리스천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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