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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gos Brunch Apr 21. 2017

이름없는 개혁자, 토마스 플래터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 시리즈 28

지난 날은 아름다운 법입니다. 그때는 정말 견디기 힘들고 어려웠는데 그래도 어찌어찌 지나고 나니 이젠 웃으며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힘들고 괴로웠던 시절이 아름다웠다면, 세상 이치를 모르던 어린 시절은 더욱 아름다웠겠지요. 초등학교 수업을 마치고 나면 책가방 집어 던지고 들판에 나가서 메뚜기를 잡곤 했지요. 조금 피곤하면, 홀라당 벗고 냇가에 뛰어들어 물장구치고 놀았지요. 언덕 위에 누워서 구름이 쏜살같이 달려가는 걸 보며 신기해하곤 했지요. 저 멀리서 검은 구름과 함께 소나기가 올 때쯤이면, 얼른 옷을 입고 집으로 힘껏 달렸지요. 그때 그 시절이 뼈에 사무치게 그립고 아름답습니다. 


시계를 더 뒤로 돌려 우리가 경험해 보지 못한 과거로 가 봅시다. 우리와 큰 상관이 없기에 무한한 상상력을 동원하지 않으면, 과거를 마음속에 그리기가 쉽지 않지요. 중세 하면 학창 시절 공부하던 역사책에서나 보았을 뿐이지요. 더욱이 암흑기라고 하니까 굳이 자세히 들여다보고 싶은 생각도 없지요. 그러나 그때도 사람이 살았습니다. 그때 사람도 눈물이 있었고 웃음도 보람도 있었습니다. 


‘중세 유럽 산책’이란 책에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옛날의 가족은 다산으로, 적어도 아주 어린 시기의 아이는 기를 만한 가치가 없는 존재였다. 그들은 중요하지 않고, 사람들의 주의를 끌지도 않았기 때문에 어린이의 수를 셀 필요도 없었다. 어린이의 수는 아이의 장래에 대한 부모의 무관심의 결과였다. 하나 또는 둘 정도의 남자아이만이 아버지의 재산을 상속받기 위해 아버지 곁에 남겨졌다.’

농업기술이 발달하지 않던 그 시절, 작은 농토에서 먹고 살 수 있는 사람은 제한 되었지요. 그럼 셋째와 넷째는 어떻게 했을까요? 루터처럼 수도원에 들어가는 것이 최고의 선택이었지요. 수도원에 들어가기만 하면 먹는 문제는 해결되고 게다가 공부까지 할 수 있으니까요. 그렇지 못한 아이들은 무작정 도시로 나가거나, 용병이 되었습니다. 


유럽에는 피리 부는 사나이 이야기가 여러 개 전해 옵니다. 울긋불긋한 옷을 입고 빨간 모자를 쓴 남자가 피리를 불면 아이들이 따라나서지요. 그리고 어디론가 사라지는 이야기입니다. 그건 단순한 옛날이야기가 아닙니다. 1284년 6월 26일 독일 하멜론 시에서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130명의 어린이가 피리 부는 사나이를 따라 도시를 떠난 사건입니다. 


중세 어린이는 여덟 살만 되면 어른처럼 경제적으로 자립해야 했습니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슬슬 집안 눈치를 보기 시작합니다. 동네 유랑 극단이 들어오면, 아이들은 눈치껏 그들을 따라 고향을 떠나곤 했습니다. 1212년 프랑스 독일 등지의 소년 소녀로 구성된 소년 십자군도 이러한 배경과 전혀 무관하다 할 수 없지요. 


부모의 사랑을 듬뿍 받아도 늘 모자란 나이인데 집을 떠나야 하는 어린이의 마음은 어떨까?  잠시 생각해 봅니다. 갑자기 마음이 무너지며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중세시대 유아 사망률이 높아서 출생연도가 정확한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중세 기념일(anniversary)은 언제나 사후에 가졌습니다. 생일을 축하해주는 것은 전혀 없었지요. 생년월일이 불확실하지만, 그가 유명인이 되어 자서전을 쓸 때 내 나이 몇 살에 하면 그것을 역으로 계산하여 추측했습니다. 그리고 세례명을 받는데 일반적으로 태어난 날의 성인을 따서 짓기 때문에 그것으로 생일을 추정할 수 있습니다. 

1499년에 태어났을 것으로 추정되는 토마스 플래터(Thomas Platter, 1499?~1582)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어머니의 젖을 한 번도 먹지 못했습니다. 먹을 것이 없던 그 시절 어머니가 젖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어릴 적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어머니는 재혼하였습니다. 막내였던 토마스는 형제자매와 헤어져 큰어머니의 손에서 자라납니다. 그는 경제적으로 자립하기 위해 6살 때부터 양치기 일을 했습니다. 그러다 마침내 방랑 학생들을 따라 독일과 영국 등 여러 나라를 떠돌아다녔습니다. 


구걸도 하고, 도둑질도 하고, 노래를 불러 먹을 것을 구하며 스무 살이 되었습니다. 그때까지 그는 살기 위해서 먹는 것밖에 아무 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어느 때인가 이렇게 살아선 밥버러지 밖에 되지 못하겠다는 생각으로 공부를 시작합니다. 무엇보다 경제적 안정이 중요하기에 그는 밧줄 만드는 장인이 됩니다. 낮에는 밧줄을 만들고 밤에는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공부했습니다. 아마도 머리가 똑똑했나 봅니다. 그의 인문학적 소양과 실력이 널리 퍼져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토마스에 대한 소문을 들은 에라스뮈스가 그를 직접 찾아와서 일을 그만두고 학문에만 전념하라고 권했을 정도였으니까요? 그러나 고아 아닌 고아로 살아왔던 토마스는 자기 일을 그만두지 않았습니다. 그가 스승으로 모시는 츠빙글리가 노동이 얼마나 고귀한지 역설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는 츠빙글리의 조수가 되어 종교개혁을 도왔습니다. 


불행하게도 가톨릭 측이 평화조약을 깨고 기습 공격하는 바람에 츠빙글리는 죽게 됩니다. 스승의 죽음을 목격한 토마스는 크게 낙심하였습니다. 그때 그를 붙잡아 준 사람은 오스발트 미코니우스(Oswald Myconius,1488~1552)였습니다. 미코니우스는 바젤의 종교개혁자로서 츠빙글리와 절친한 친구였습니다. 

그는 개혁파 교회의 신실한 수호자였습니다. 미코니우스는 토마스의 실력을 인정하여 그를 바젤 고등학교 교장으로 초청합니다. 바젤 시의회는 토마스에게 석사 학위를 따라고 여러 번 강요했습니다. 그러나 토마스는 그것을 완강히 거부했습니다. 자신의 학문에는 대학에 의한 어떤 권위도 필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지요. 그는 일평생 평신도로서 학생을 가르친 이름 없는 종교개혁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고향을 떠나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며 온갖 고생을 다 했던 토마스 플래터를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는 당대 최고의 인문학자들이 모두 인정할 정도로 실력을 갖추었지만, 언제나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고 섬기는 사람이었습니다. 세상에서의 명성과 인정보다 하나님께 인정받기를 원했던 토마스 플래터의 삶을 잠시 묵상해봅니다. 


참고도서 

1. 아베 긴야, 중세 유럽 산책, 양억관 옮김, (파주 : 한길사, 2005)

2. 아베 긴야, 하멜론의 피리 부는 사나이, 양억관 옮김, (파주 : 한길사, 2008)

3. 필립 샤프, 교회사 전집 8 - 스위스 종교개혁, 박경수 옮김, (서울 : 크리스챤다이제스트,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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