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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gos Brunch Apr 03. 2017

마틴 부쳐의 결혼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 시리즈 26

중세 교황은 이탈리아의 보르자(Borgia) 가문과 메디치(Medici) 가문에서 좌지우지하였다. 이탈리아 마피아의 선구자로 알려진 보르자 가문의 첫 번째 교황은 알렉산데르 6세(Alexander PP. VI, 재위 기간 1492~1503)다. 어느 역사가는 “알렉산데르 6세 치하의 로마는 법도, 신성함도 없고, 오직 황금과 폭력 그리고 섹스뿐이었다.”고 하였다. 그는 추기경으로 재임하면서 창녀와 관계해서 아들 셋과 딸 하나를 두었다. 그는 보르자 집안의 위세를 믿고 온갖 악행을 일삼았다. 자신의 정부들 사이에 태어난 사생아들을 바티칸으로 불러들여 가문의 권력을 확장하였다. 그는 할머니, 어머니, 큰이모, 딸 루크레치아까지 4명과 근친상간을 했다고 전해지는 인물이다.


보르자 가문에 알렉산데르 6세가 있다면 메디치 가문에는 레오 10세(Leo PP. X, 재위 기간 1513~1521)가 있다. 그는 “신께서 하사하신 교황권을 만끽하라”는 말과 함께 교황의 임무를 시작했다. 그는 '위대한 로렌초' (Lorenzo der Prächtige)의 아들로서 불과 13살에 추기경이 되었다. 그는 영혼 구원과 관련해서는 눈곱만큼의 책임의식도 가지지 않았다. 돈을 물 쓰듯 쓰던 그는 마침내 교황청 금고를 바닥내고 말았다. 예술과 건축을 좋아했던 그는 바티칸 성당 건축을 핑계로 면죄부를 팔기 시작하였다. 면죄부 판매는 바티칸 성당을 짓는 것 뿐만 아니라 자기의 쾌락과 탐욕을 채우기 위한 수단이었다.

교황이 이 모양이니 그 밑의 사제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성직자들은 공공연히 축첩하였다. 면죄부만 사면 첩을 몇 명 두든지 상관없었다. 나중에는 사제가 낳은 자녀들 양육비를 책정하여 받기까지 하였다. 사제들의 결혼은 이제 공공연하게 행해졌다.


이런 상황에서 종교개혁자 중 최초로 결혼한 사람은 마틴 부쳐였다. 그는 가톨릭 사제처럼 첩을 들인 것이 아니라 정식으로 결혼하였다. 1522년 8살 많은 루터보다 먼저 전직 수녀 엘리자베스(Elisabeth Silbereisen)와 결혼하였다. 그는 종교개혁 사상을 실천하는 뜻으로 독신 서약을 깨트렸다. 이에 쉬파이어(Speier)감독은 그를 출교하였다.


가톨릭 사제는 축첩을 하든지, 사생아를 낳든지 아무 문제 삼지 않던 감독이 부쳐의 결혼에 대해서는 출교라는 강수를 두었다. 이에 스트라스부르그의 개혁자들은 집단으로 반발하였다. 그들은 부쳐의 뒤를 이어 줄줄이 결혼하였다. 첫 번째는 성 토마스(St. Thomas) 대성당의 사제인 안토니 피른(Anthony Firn)이었다. 1523년 11월 9일 감독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는 결혼하였다. 뒤를 이어 1523년 12월 3일 마태 젤(Matthew Zell)이 카타리나 슈츠(Katharian Schütz)와 결혼하였다. 카타리나는 종교개혁의 가장 강력한 여성 중 한 명으로 찬송가 작사도 하였다. 그녀는 넓은 마음의 소유자로서 남자들의 편협함을 경멸하였다. 그녀는 다양한 손님들을 접견했는데 “모든 사람에게 사랑과 섬김, 그리고 자비를 보이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고, 또한 우리의 스승이신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가르치셨습니다.” 하였다. 그녀는 급진주의자에 대해서도 열린 마음을 가졌다. 후일 스트라스부르그가 황제 칼 5세에 굴복하였을 때 완고한 루터파 성직자들이 급진주의자 카스파르 슈뱅크밸트(Kaspar Schwenckfeld, 1489~1561)를 따르던 두 자매의 장례식을 거부하였다. 그들의 옹졸함에 화가 난 카타리나는 스스로 설교를 준비하고 두 여인의 장례를 집행하였다.


마태 젤의 뒤를 이어 쉬파찡어(Spatzinger)는 1524년 1월 5일에, 로니쩌(Lonitzer)는 1월 6일에, 하크푸르트(Hackfurt)는 1월 20일에, 그리고 니블링(John Niebling)은 1월 26일에 결혼했다. 부처의 결혼을 징계한 가톨릭 감독의 조치에 반발하여 스트라스부르그 종교개혁자들은 줄줄이 결혼하였다. 마침내 시 당국은 종교개혁자들의 손을 들어 주었고, 가톨릭 감독은 결혼한 사제들을 처벌할 수 없었다. 그 후 여름 동안 알트비서(Alterbiesser), 헤디오(Hedio)와 카피토(Capito) 이외에도 더 많은 사람이 아내를 취하였다. 그 결과 출교당하였던 부처는 스트라스부르그의 성직자로서 활동하는 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다.


부처의 결혼생활은 행복하였다. "결혼은 천국에서 제정된 하나님의 사역과 축복이다.”라고 그는 설교하였다. 부처의 가정은 1541년 스트라스부르그에 유행한 흑사병으로 인해 비극적 결말을 맞게 되었다. 1541년 11월 그의 부인 엘리자베스가 흑사병으로 인해 사망하였다. 그는 1542년 4월 16일 비브란디스(Wibrandis Rosenblatt, 1504-1564)와 재혼하였다.

비브란디스는 ‘종교개혁의 신부’로 알려진 여인이었다. 그녀는 일생 네 명의 남자와 결혼하였는데 공교롭게도 네 명 모두 종교개혁자였다.


첫 번째 남편은 루트비히 켈러(Ludwig Keller,?~1526)다. 그녀는 홀어머니와 함께 바젤에서 20살 나이로 종교개혁자 켈러를 만나 결혼하게 되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결혼한 지 겨우 2년 뒤 켈러는 세상을 떠나고 비브란디스는 22살에 미망인이 되었다.


얼마 후 그녀는 스위스 종교개혁의 지도자 요한네스 오이콜람파디우스(Johannes Oecolampadius, 1482-1531)와 결혼하였다. 츠빙글리의 절친한 동료이며, 바젤에서 종교개혁을 이끌고 있던 오이콜람파디우스는 45세의 나이에 22살 미망인을 부인으로 맞이 하였다. 그는 또 다른 친구 기욤 파렐(Guillaume Farel, 1489~1565)에게 “우리 부부가 오래도록 행복하게 해로할 수 있도록 주님께 기도해주게나” 편지하였다. 그의 소망과는 반대로 불과 4년 후 츠빙글리가 카펠 전투에서 살해당하고 종교개혁을 확장하려는 노력이 정치적 분열 때문에 좌절되자 충격을 받고 죽었다. 비브란디스는 다시 미망인이 되었다.


거의 같은 시기에 스트라스부르에서 종교개혁을 진행하던 볼프강 카피토(Wolfgang Capito, 1478-1541)도 아내를 잃었다. 루터와 츠빙글리의 화해를 위하여 애쓰던 종교개혁자 카피토가 불행한 일을 당한 것을 안 마틴 부처는 비브란디스와 중매를 하였다. 둘은 1532년 결혼하였다. 두 사람은 자녀 둘을 낳으며 행복하게 살았지만, 그 행복은 오래 가지 못했다. 스트라스부르그에 흑사병이 퍼졌다. 이 역병으로 비브란디스는 자녀와 남편을 모두 잃어버렸다.


공교롭게도 중매를 섰던 마틴 부처 역시도 역병으로 부인을 잃었다. 1542년 38살 된 비브란디스는 네 번째로 51세인 마틴 부처와 결혼하였다. 중세 평균 수명이 대략 30세였다. 출산하다 죽은 아이나, 젖먹이의 사망률을 계산하지 않아도 그러하다. 그러므로 결혼 적령기까지 살아남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결혼 생활하다 배우자가 죽는 경우도 허다하였다. 흑사병이 한번 돌면, 많게는 절반 적으면 1/3이 죽었다. 도시 인구는 대도시가 2만 명, 소도시는 5천 명에 불과하였다. 교통이 발달하여 유동인구가 많은 지금의 관점으로 보면, 종교 개혁기의 결혼이 이해되지 않는 면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지금으로부터 500년 전 상황에서는 사별한 여인과 결혼하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당시 결혼은 오늘날처럼 로맨스보다는 삶의 가장 원초적인 수단이었다. 여자는 남자에게서 경제적인 지원과 사회적인 보호를 받아야 했고, 남자는 가사 노동을 담당해 주는 여자가 필요하였다. 마틴 부쳐나 비브란디스는 그렇게 어려운 시절을 살아간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다. 


두 사람은 결혼 후 점차 위협을 받는 유럽 대륙을 떠나 영국으로 건너가서 종교개혁 사상을 전파하였다. 당시 영국은 에드워드 6세 치하에 한참 종교개혁을 진행하고 있었다. 그러나 영국 기후와 풍토에 잘 적응하지 못하던 부처는 결국 2년도 못되어 죽었다.


47살 된 기구한 운명의 여인 비브란디스는 다시 고향 땅 바젤로 돌아왔다. 홀어머니를 섬기고 4명의 종교개혁가 남편을 모시면서 그녀도 자연스럽게 종교개혁 사상에 심취하게 되었다. 그녀는 독일어와 라틴어에 능통하였으며 신학에도 상당한 조예가 있었다. 가난하고 힘든 삶을 살면서 자신보다 먼저 남편과 자식들을 보내었던 비련한 여인의 희생과 인내 덕분에 종교개혁자들이 힘있게 활동할 수 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목회자의 가정 대부분은 희생의 눈물을 흘리면서 사역을 감내하고 있다.


참고도서

1. 디아메이드 맥클로흐, 종교개혁의 역사, 이은재, 조상원 옮김, (서울 : CLC, 2011)

2. 최윤배, 잊혀진 종교개혁자 마르틴 부처,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15)

3. 황대우 편저, 삶, 나 아닌 남을 위하여 마르틴 부써의 기독교 윤리, (서울, SFC, 2016)

4. 호르스트 푸어만, 교황의 역사, 차용구 옮김 (서울 : 도서출판 길,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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