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ogos Brunch Mar 29. 2017

종교개혁의 중재자, 마틴 부쳐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 시리즈 25

16세기 신성로마 제국은 황제가 중앙에서 집권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달랐다. 제국에는 자체 통치권을 가진 자유 제국 도시들이 있었다. 세속 제후들이 다스리는 제국 도시는 황제에게 세금을 내고 전시에 병력을 지원해야 하지만, 제후 주교가 다스리는 자유 제국 도시는 세금 납부 의무도 없었고, 십자군 전쟁 외에는 병력을 지원할 필요도 없었다. 이러한 자유 제국 도시는 황제로부터 독립하기 시작하였는데 바젤(1,000년), 슈파이어(1,111년), 보름스(1,184년), 마인츠(1,244년), 레겐스부르크(1,245년), 슈트라스부르크(1,272년), 쾰른(1,288년) 등이 있다. 


그중에 슈트라스부르크는 라인강을 끼고 있으며, 좌우로 독일과 프랑스, 남으로는 스위스로 통하는 교통의 요충지로서 무역과 상업의 중심지였다. 인구 2만 명의 이 도시는 부유했으며 세상의 모든 소식과 사상이 모여들었다. 새로운 사상에 배타적이기보다는 수용적인 분위기여서 슈트라스부르크는 양심의 자유를 찾아 피난 오는 사람들이 늘어갔다. 프랑스에서 온 사람들은 이 도시를 ‘새 예루살렘’이라 불렀고 스위스 사람들은 ‘종교개혁의 안디옥’이라 불렀다. 


프랑스와 독일의 문화 접경지역으로 알자스의 주도인 슈트라스부르크는 구텐베르크가 인쇄술을 발명하여 더욱 유명해졌다. 다양한 종교개혁 서적을 출판하면서 슈트라스부르크는 인문주의의 요람이고 프로테스탄트의 중심지로 부상하였다. 시의회를 이끄는 구성원은 대체로 상인 중심의 지배층과 장인 중심의 중산층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들은 도시 행정을 담당하였고, 자본주의를 당대 환경에 맞게 조율하였다. 시장인 야곱 슈트름(Jacob Sturm, 1489~1553)의 지도로 어느 도시보다 개혁의 바람이 일찍 불어왔다. 


 ‘슈트라스부르크의 나팔’이라고 불리는 존 가일러(John Geiler von Kaiserberg, 1445~1510)는 가톨릭의 부패함을 신랄하게 지적하며 도덕적 개혁을 높이 외쳤다. 복음을 설교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도박을 금지하고 술집을 폐쇄하고 병원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30년 넘게 설교하면서 그는 사제들의 게으름과 타락을 책망하고 교인들의 방탕함과 문란한 생활을 책망하였다. 그는 임종 2개월 전까지 강단을 지켰으며, 죽은 후에는 자신이 설교하던 슈트라스부르크 노트르담 대성당에 묻혔다. 


가일러의 뒤를 이은 마태 젤(Matthew Zell, 1477~1548)은 도덕적 개혁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복음을 설교하였다. 노골적이지는 않았지만, 루터의 영향을 받은 그는 로마서를 강해 하면서 복음을 전하였다. 그의 주변에는 종교 개혁적 성향을 가진 지도자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들은 볼프강 카피토(Wolfgang Capito, 1478~1531), 헤디오(Casper Hedio, 1494~1552), 게르벨(Nikolaus Gerbel, 1485~1560), 부른펠스(Otto Brunfels, 1488~1534), 부쳐(Martin Bucer, 1491~1551) 등이다. 

그중에 부쳐는 슈트라스부르크의 실질적인 지도자로 등장하였다. 그는 알자스의 슐레트슈타트(Schlettstadt)의 가난한 통제조업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루터나 츠빙글리보다는 8살 어렸고 칼빈보다는 18살 많았다. 가난했던 그의 부모는 부쳐의 공부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6살 때 슐레트슈타트 라틴어 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부쳐는 더 공부하고 싶었다. 결국, 그는 가난과 절대 순종을 서약하고 도미니칸 수도회 수사가 되었다. 그는 수도원 학교에서 공부했는데 스콜라 신학의 거장 토마스 아퀴나스를 공부하였다. 


1517년 공부에 대한 가능성과 신학박사 학위를 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하고 하이델베르크의 도미니칸 수도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는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당대 최고 인문주의자 에라스무스의 작품을 연구하고 강의할 기회를 가졌다. 


1518년 마틴 루터가 자신의 견해를 변호하기 위해 하이델베르크 어거스틴 수도원 종단 토론회에 참석하였다. 기적처럼 부쳐는 그곳에서 루터를 처음 만났다. 루터가 주장하는 십자가의 신학(thologia crucis)은 젊은 부쳐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부쳐는 회심하고, 루터의 제자가 되고, 종교개혁자의 길을 걷겠노라 결심하였다. 부쳐는 친구 레나우스(Beatus Rhenanus)에게 편지하였다. “루터는 모든 점에서 에라스무스와 일치합니다. 그러나 차이점도 있는데, 에라스무스는 넌지시 말하였다면, 루터는 공공연하고 자유롭게 가르쳤습니다. 저는 이 점에서 그의 편을 듭니다.” 그는 다른 편지에서는 루터를 가리켜 “신학자들 가운데 가장 진지하고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가장 강력한 존경하는 아버지”라고 불렀다. 이때부터 부쳐는 루터의 추종자가 되어 그의 작품을 집중적으로 탐독하였다. 


그는 에라스무스와 루터 두 사람 모두를 교회개혁의 선구자요 희망이라 생각했다. 1520년 11월 29번째 생일에 즈음하여 수도원을 떠났다. 1년 정도 팔츠의 선제후 프리드리히의 궁정 설교자로 사역하다 1523년 3월 친구 카피토가 사역하는 슈트라스부르크로 왔다. 그는 급진적인 성향을 보이는 채소 상인 길드의 도움을 받아 성 아우렐리아(St. Aurelia) 교회에서 목회하였다. 


부쳐는 호소력을 지닌 설교자였다. 그의 강력한 설교로 인해 슈트라스부르크는 진정한 종교개혁의 중심도시로 서게 되었다. 부쳐는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지지는 않았지만, 개신교의 연합을 이루기 위해 헌신하였다. 그는 다른 사람의 장점과 선함을 발견하는 탁월한 능력이 있었다. 1518년 루터를 만난 이후 그는 루터의 개혁 사상에 심취하였다. 1520년대 중반 스위스의 츠빙글리를 만나고선 그의 성만찬 이론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그는 열린 마음을 가지고 다른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였으며 그들 모두를 좋게 보았다. 


심지어 교황에 충실한 사람들까지 수용하려고 하였다. 그의 적대자들마저 부쳐의 포용력은 인정하였다. 이곳저곳에서 늘 쫓겨 다니던 재세례파를 환영하고 받아준 사람도 부쳐였다. 재세례파 사람들은 슈트라스부르크를 “희망의 도시”, “의의 피난처”로 불렀다. 재세례파 사람들은 점점 불어나 2,000명에 달하였고 도시에서 문제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그 당시 재세례파는 급진적이고 과격하였다. 결국, 1538년 시의회는 모든 재세례파 사람들은 도시를 떠나야 한다는 칙령을 공포할 수밖에 없었다. 


자기주장을 내세우기보다 다른 사람의 의견을 수용하려는 성향을 보였던 부쳐의 중재 노력은 개성이 뚜렷한 종교개혁자들 사이에서 큰 역할을 하지 못하였다. 25년 동안 목회하면서 종교개혁자들을 중재하여 1530년 네 도시 신앙고백(the  Confessio Tetrapolitana)을 작성하고, 1536년 비텐베르크 협정으로 스위스 취리히와 독일의 잠정적 협정을 이끌어 내기도 하였다. 


종교개혁자들의 중재와 연합이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는 사이, 가톨릭은 교회를 쇄신하고, 예수회를 창설하고, 황제와 교황이 협조하여 트렌트 공의회(Council of Trient, 1545~1563)를 열었다. 내부 단속을 마친 칼 황제는 슈말칼덴 전쟁(1546~1547)을 일으켜 개혁파를 공격하였다. 뮬베르그(Mülberg) 전투에서 승리한 가톨릭 측은 아우크스부르크 임시안(Augsburger Interim, 1549)을 강요하였다. 아우크스부르크 안은 사제의 결혼과 성찬 이외 모든 것은 가톨릭을 따르라고 요구하였다. 마틴 부쳐는 그것을 거부하고 영국으로 망명하여, 2년 동안 영국 종교개혁을 위해 힘쓰다 1551년 2월 28일 타계하였다. 


개혁파 연합을 위해 힘을 쓴 불링거, 부쳐 같은 사람의 노력이 성공하였더라면, 지금 서유럽의 판도는 많이 달라졌을 텐데 못내 아쉽기만 하다. 


참고도서

1. 디아메이드 맥클로흐, 종교개혁의 역사, 이은재, 조상원 옮김, (서울 : CLC, 2011)

2. 최윤배, 잊혀진 종교개혁자 마르틴 부처,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15) 

3. 황대우 편저, 삶, 나 아닌 남을 위하여 마르틴 부써의 기독교 윤리, (서울, SFC, 2016)

4. 필립 샤프, 교회사 전집 7, 독일  종교개혁, 박경수 옮김, (서울 : 크리스챤다이제스트, 2015)

5. 임도건, "후기 종교개혁 사상 연구 - P. 멜란히톤, M. 부처, H. 불링거, T. 베자를 중심으로" ⌜숭실대 박사학위 논문⌟  (2012)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