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 500주년 기념 시리즈 24
1531년 12월 23일 하인리히 불링거(Heinrich Bullinger, 1504~1575)는 츠빙글리의 뒤를 이어 그로스뮌스터 교회에서 처음 설교하였다. 사람들은 츠빙글리가 무덤에서 다시 살아온 듯한 느낌을 받았다. 불링거는 츠빙글리의 개혁 정신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흔히들 창업보다 수성이 더 어렵다고 말한다. 더욱이 처음 개혁자 츠빙글리가 갑작스럽게 죽고 가톨릭의 영향이 증가하는 가운데 취리히 시를 이끌어야 할 불링거는 어깨가 무겁기만 하였다. 그러나 그는 무려 44년 동안 취리히 종교개혁을 책임지면서 그 임무를 훌륭하게 감당했다.
27살 젊은 청년이었던 불링거는 온순하였으며 대화와 협력을 통한 리더십을 발휘하였다. 불링거는 취리히 그로스뮌스터(Grossmünster) 교회가 단순한 지역교회를 넘어 ‘언약 공동체’로 나아가기를 원하였다. 그는 취리히 시 의회와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신앙공동체와 행정공동체가 상호보완하도록 하였다. 취리히 시는 결속력이 점점 더 강화되었다. 행정뿐만 아니라 교육 개혁도 착실히 진행하여 양질의 목회자와 교사를 양성하고, 체계적인 커리큘럼을 확립하였다. 그는 교양, 수학, 물리학, 경제학, 정치학, 법학 등을 신학과 조화를 이루어가도록 하였다. 노약자나 병자, 가난한 자를 위한 구제 활동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불링거의 취리히는 칼빈이 주도하는 제네바 시와 함께 유럽 개혁 교회를 이끄는 두 축이 되었다.
불링거의 활동은 점차 취리히 너머까지 확장되었다. 그는 100여 곳이 넘는 도시와 시골의 교구를 감독하고 지도하였다. 그는 유럽 전역에 걸쳐 국제적인 개신교 지도자로 일했다. 츠빙글리가 그토록 이루고 싶어 했던 개혁교회 연합을 위해 불링거는 힘을 다했다. 그는 모든 개혁파 교회들과 연락을 주고받았다. 칼빈의 후계자 베자(Theodore Beza, 1519~1605)는 그를 가리켜 “모든 기독교 교회를 돌보는 만인의 목자”라고 하였다.
그는 이탈리아, 프랑스, 영국 그리고 독일에서 피난 온 프로테스탄트들을 기꺼이 맞이하였다. 취리히는 종교적인 자유를 위한 피난처가 되었다. 취리히에는 이탈리아인을 위한 이탈리아 개혁 교회가 세워졌다. 그는 위그노에게 관용을 베풀어 달라고 프랑스 국왕에게 두 차례나 간청하였다.
불링거는 헨리 8세 시대부터 엘리자베스 시대까지 영국 종교개혁에 관련을 맺었다. 특별히 메리 여왕(Bloody Mary, 1516~1558)이 가톨릭으로 돌아서면서 개혁자들을 가차 없이 숙청하고 죽일 때 수많은 망명자가 취리히로 도망왔다. 불링거는 그들을 형제처럼 대하였다. 후일 엘리자베스 치하에서 개혁파 교회가 회복될 수 있었던 것은 불링거의 호의 때문이었다고 주엘 주교는 밝혔다. 주엘은 불링거에게 편지하면서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아버지이자 가장 존경하는 스승”이라고 하였다. 영국 글로스터 주교 후퍼(John Hooper, 1495~1555)는 1547년 취리히 망명 생활을 하였다. 그는 1554년 순교하기 얼마 전 불링거에게 편지하였다. “존경하는 아버지이자 안내자”이며 최고의 친구인 불링거에게 자신의 아내와 두 자녀를 부탁한다고 하였다. 에드워드 6세 치하에서 영국 종교개혁을 진두지휘했던 토마스 크랜머(Thoman Cranmer, 1489~1556)는 통일된 복음주의 신조를 만들기 위해 멜란히톤, 칼빈, 부처와 함께 불링거를 런던 회담에 초대하기도 하였다.
불링거는 유럽 전역의 사람들과 편지를 교환하였다. 팍스 로마 시대와 달리 이 시기는 교통망이 불편하였다. 스위스 내의 도시뿐만 아니라 유럽 각국의 도시나 혹은 바다 건너 영국과 편지 교환을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정식 우편 제도를 이용하기보다 국가의 전령이나 심부름꾼, 여행자들, 학생, 상인들을 통하여 유럽 전역과 편지를 교환하였다.
현재 그가 나누었던 편지 12,000통이 남아 있다. 10,000통의 편지는 불링거가 받은 편지이고 2,000통은 불링거가 보낸 편지다. 그가 쓴 답장이 적은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그가 받은 편지는 고스란히 남아 취리히 주립 문서보관소와 중앙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지만, 그가 유럽 전역에 보낸 편지는 뿔뿔이 흩어져 모으는 데 어려움이 많다. 편지는 대부분 유실되고, 17~18세기 요한 야콥 브라이팅어(Johan Jakob Breitinger, 1576~1645), 요한 하인리히 호팅어(Johan Heinrich Hottinger, 1620~1627) 그리고 요한 야콥 심러(Johan Jakob Simler, 1716~1788)의 노력으로 어렵게 수집하였다. 그의 편지는 그가 얼마나 국제적 교류에 힘썼는지 알 수 있다. 그는 당시 루터(4,200통), 츠빙글리(1,200통) 그리고 칼빈(4,200통)의 편지를 다 합친 것보다 많은 편지를 주고받았다. 그는 스위스를 포함하여 17개 국가, 438개 도시, 1,174명의 인물과 편지를 나누었다. SNS도 없고, 신문도 없던 그 시절 불링거 만큼 국제 정세를 꿰뚫어 보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유럽 종교개혁의 복잡한 문제를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였다.
수많은 사람이 그에게 편지를 보내 종교개혁에 대한 자문을 구하거나, 신학적인 질문을 하거나, 신앙적인 위로를 구하였다. 1551년 어느 봄날 헝가리에서 한 통의 편지가 불링거에게 왔다. 서쪽으로는 강력한 가톨릭 국가인 오스트리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이슬람이 호시탐탐 공격을 하는 헝가리는 비운의 땅이었다. 이곳 개신교는 가톨릭과 이슬람의 위협 아래 하루하루 고통 속에 살아야 했다. 헝가리 총리실의 비서인 요한네스 페제르토이(Johannes Feiérthóv)는 헝가리 개신교를 대표해서 불링거에게 편지를 보냈다. 헝가리 목회자들에게 위로가 되고 용기를 줄 수 있는 글을 부탁한 것이다. 불링거는 바로 답하였다. 무려 50장이나 되는 긴 편지였다. 불링거의 편지는 거의 8년 동안 필사되어 헝가리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1559년 그의 편지는 헝가리의 신앙 교육서로서 공식적으로 출판하였다.
불링거와 베자 사이에 오간 편지는 모두 414통이었다. 베자는 일생 12명의 사람과 819통의 편지를 주고받았는데 절반 이상이 불링거의 편지였다. 불링거와 칼빈(John Calvin, 1509~1564)은 1550년 2월 16일 처음 편지하면서 칼빈이 죽을 때까지 285통을 나누었다.
1546년 4월 6일 칼빈은 생의 마지막 편지를 불링거에게 보냈다. 제네바 교회 의장으로서 칼빈은 프랑스 정치 상황을 언급하고, 오랫동안 편지하지 못한 것을 사과하였다. 그동안 아파서 숨 쉬는 것도 힘들었다고 호소하였다. 칼빈은 이제 더 이상 글을 쓸 수 없을 것 같다는 여운을 남기며 편지를 마무리하였다. 칼빈이 죽은 지 7일 후인 1564년 5월 4일 베자는 불링거에게 편지로 칼빈의 죽음을 알렸다. 불링거는 즉시 제네바 교회에 위로의 편지를 보냈다. 갑작스러운 칼빈의 죽음으로 큰 상실감을 느끼고 있을 베자를 염려하였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칼빈을 데려가셨다면, 우리는 영원한 생명 안에서 곧 서로 만날 수 있으며, 그리고 우리의 구원자 안에서 모든 성인과 함께 기뻐할 수 있다고 하였다.
칼빈이 죽은 후 제네바 종교개혁이 흔들리지 않도록 불링거는 제네바 교회에 편지를 계속 보냈다. 1575년까지 한 해 평균 28통의 편지가 둘 사이에 오갔다. 칼빈의 후계자인 베자는 불링거를 향해서 “나의 아버지”(mi pater), “아버지는 나에게 큰 관심을 보여주셨습니다.(pater mihi plurimum observandum)라고 하였다. 불링거는 베자와 함께 유럽 종교개혁을 안정적으로 이루어가도록 힘을 쏟았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팸플릿 형태로 유럽 전역에 퍼져나갔다. 그것은 개혁 사상을 일방적으로 퍼뜨리는 방식이었다. 당시에는 루터의 개혁 운동이 그럴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소통보다는 자기주장이 강했던 루터의 성격과도 맞는 개혁 방식이었다.
불링거의 종교개혁은 편지 형태로 유럽 전역과 소통하였다. 성품이 온화하며 대화와 타협을 중요시했던 불링거 스타일에 맞는 개혁 방식이다. 비전과 사상과 아픔과 위로를 나누는 편지 교환은 쌍방향 식 종교개혁이었다. 종교개혁의 연대는 그렇게 이루어졌다. 스위스, 프랑스, 독일, 영국, 화란, 이탈리아, 헝가리 그리고 폴란드 개혁교회를 연결하는 고리는 불링거였다. 비록 불링거 사후 그 영향력을 잃었지만, 그가 사역하였던 44년 동안 제네바와 취리히는 유럽 종교개혁의 본산이었다.
1. 필립 샤프, 교회사 전집 8, 스위스 종교개혁, 박경수 옮김, (서울 : 크리스챤다이제스트, 2013)
2. 에미디오 캄피, 스위스 종교개혁, 김병훈, 방상봉, 안상혁, 이남규, 이승구 공역, (수원: 합신대학원출판부, 2016)
3. 카터 린드버그, 종교개혁과 신학자들, 조영천 옮김, (서울 : CLC, 2012)
4. 박상봉, "종교개혁 시대 서신교환을 통해서 본 Heinrich Bullinger의 초상" ⌜교회와 문화⌟ 제25호 (2010)
5. 박상봉, "하인리히 불링거의 헝가리 교회와 목사들에게 쓴 서신(1551)" ⌜종교개혁 496주년 기념강좌⌟ 신반포 중앙교회 (2013)
6. 임도건, "후기 종교개혁 사상 연구 - P. 멜란히톤, M. 부처, H. 불링거, T. 베자를 중심으로" ⌜숭실대 박사학위 논문⌟ (2012)
7. 조병수, "Heinrich Bullinger" ⌜종교개혁 488주년 기념강좌⌟ 신반포 중앙교회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