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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gos Brunch Mar 13. 2017

츠빙글리의 후계자, 불링거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 시리즈 23


1531년 평화협정을 어기고 가톨릭 측은 8,000명 대군으로 취리히를 공격하였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취리히는 속수무책이었다. 도시를 방어하기 위하여 2,000명의 시민군을 급히 모았지만, 상황을 돌리기에 역부족이었다. 한창나이인 츠빙글리는 전장에서 숨을 거두었다. 47세였다. 그의 동서, 의붓아들, 사위 그리고 절친한 친구들 모두 죽음을 맞이하였다. 츠빙글리의 죽음은 스위스 개혁 교회에 심각한 타격이었다. 


바젤 교회의 목사인 오스발트 미코니우스(Oswald Myconius, 1488~1552)는 그날의 상황을 이렇게 표현했다. 

“우리에게 비참과 슬픔뿐이다. 날마다 우리의 위기는 증가하고 있다. 츠빙글리를 잃은 것보다도, 그렇게 많은 목회자가 죽은 것보다도 더욱 무겁게, 복음의 자유로운 말씀이 사라질 수도 있다는 근심이 우리를 짓누르고 있다.”


반면에 루터는 츠빙글리의 죽음을 모욕하였다. 검을 든 자는 검으로 망하는 법이라면서 츠빙글리의 죽음은 순교가 아니라 심판받은 것이라고 비아냥거렸다. 루터는 의도적으로 츠빙글리Zwingli)의 이름을 “강제자”(Zwingel - 성경을 억지로 해석하는 자라는 뜻으로)라고 불렀다. 츠빙글리는 하나님 없는 이교도로 많은 대죄와 신성모독 가운데 죽었다고 말하였다. 루터는 “일백 번 몸이 찢기고 불에 태워질지라도 슈벵크펠트, 츠빙글리, 칼슈타트, 오이콜람파디우스와 제휴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였다. 


루터의 비난이 아니어도 스위스 종교개혁의 중심도시인 취리히는 공포감에 휩싸여 휘청거렸다. 가톨릭 세력은 날이 갈수록 강성하여졌다. 취리히는 바람 앞의 촛불과 같았다. 미코니우스가 염려한 대로 취리히의 종교개혁은 멈출 것 같았다. 누가 츠빙글리의 뒤를 이어 취리히 시를 개혁할 것인가? 초미의 관심사였다. 츠빙글리가 죽은 지 거의 두 달이 지난 후 1531년 12월 9일 취리히 시 의회는 불링거를 초청하였다. 당시 불링거의 나이 27살밖에 되지 않았다. 취리히 시는 젊은 불링거를 왜 불렀을까?

하인리히 불링거(Heinrich Bullinger, 1504~1575)는 1504년 7월 18일 취리히에서 그리 멀지 않은 작은 도시 브렘가르텐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교회 사제이면서 결혼한 사람이었다. 그때 사제들도 면죄부를 사기만 하면 얼마든지 결혼할 수 있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지혜롭고 총명하여 18살이 되지 않았을 때 쾰른 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당시 학교는 루터의 영향을 받아 학생들은 언제나 개혁 사상에 대하여 토론하였다. 불링거는 자신의 일기장에 쾰른 대학에서 공부할 때 개혁 사상에 심취한 복음적 기독교인이 되었다고 썼다. 불링거는 루터의 성찬론을 제외하고 루터의 개혁 사상에 크게 공감하였다. 


마침 개혁신앙에 우호적이던 카펠의 시토 수도원장 요너(Wolfgang Joner)가 교수직을 제안하였다. 가톨릭 미사에 참석하지 않아도 된다는 조건으로 그는 수도원 학교의 교사가 되었다. 그는 학생을 가르치면서 교부들을 연구하였고, 멜란히톤의 ‘신학총론’을 탐독하였다. 카펠에서 활동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츠빙글리를 만나 교제하였다. 불링거는 츠빙글리의 성경 강해를 듣는 순간 첫눈에 반하였다. 


두 사람은 모든 면에서 의기투합하였다. 둘의 나이 차이는 20년 정도였지만, 츠빙글리와 불링거의 우정은 돈독하였다. 1527년 6월 중순부터 11월 중순까지 불링거는 휴가를 내어 취리히를 방문하였고 츠빙글리의 성경공부 모임인 ‘예언(prophezei)’에 참여하였다. 츠빙글리는 젊은 불링거를 사랑하였으며 그를 키워주기 위하여 베른 회담(Bern Disputation, 1528)에 데리고 갔다. 베른 회담은 스위스와 남부 독일의 개혁자들이 모여서 베른의 종교개혁 가담 여부를 결정짓는 중요한 회담이었다. 츠빙글리는 이 회담에서 할러, 콜브, 외콜람파디우스, 카피토, 부처, 블라러, 메간더, 파렐 등을 만나 불링거를 소개하여주고 교제하도록 하여 그의 안목을 넓혀 주었다. 취리히 휴가 기간 불링거는 평생의 동반자가 될 안나(Anna Adlischweiler, 1504~1564)를 만나 결혼하였다. 안나 때문인지 모르지만 불링거는 취리히에서 보낸 6개월의 휴가 기간이 인생 일대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라고 하였다. 


츠빙글리가 갑작스럽게 사망한 후 불링거는 그의 뒤를 이어받을 만하였다. 그러나 문제가 있었다.  취리히 시 의회는 카펠 전투에서 패배한 후 가톨릭 측 영향으로 그로스뮌스터 교회 목사의 권한을 제한하려고 하였다. 그들은 이미 가톨릭 측과 합의한 마일렌 협정서를 불링거에게 읽어주었다. 목사는 더 이상 취리히 도시 국가 개혁에 참여하지 못한다. 교회는 기본적으로 세속 정부에 의해 다스려져야 한다. 취리히는 기독교 정부였기 때문에 취리히 시의원들은 오늘날로 말하면 마치 당회 장로들과 같다. 그들은 자신이 행정과 치리를 담당하고 목사는 오직 말씀 증거만 하라고 하는 것과 같았다. 말씀을 듣고 안 듣고는 자신들이 판단할 일이지 목사가 간섭할 수 없다는 것이다. 


가톨릭 측 사람들이 활동영역을 넓혀가는 상황에서 불링거는 고민하였다. 그는 4일간의 심사숙고 후 자기 생각을 제시하였다. 그는 취리히 개혁에 더 이상 참여하지 말라는 요구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목사는 세속적인 통치를 감시하고, 사람에 대한 직접적인 비난은 하지 않되 하나님의 말씀을 성경대로 설교하는 것이 목회자의 책무임을 선언하였다. 이것은 일종의 타협이었다. 일부 개혁자들은 불링거의 타협안에 대하여 강력히 비판하였다. 그러나 상황이 많이 바뀐 취리히 시의 상황에서 개혁을 계속하여 이끌어가려면 필요한 조치였다. 


불편한 타협과 불안정한 결합으로 시작하였다. 불링거는 말씀을 선포하며 끊임없이 취리히 시 지도자들을 설득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츠빙글리처럼 취리히 시 개혁을 위한 시정 업무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는 안티스테스(Antistes)로서 취리히 교회 집단의 대표가 되었고 취리히 지도자들을 비판하고 개혁을 이끌어 가는 진정한 영적 지도자가 되었다. 


취리히 시 지도자들이 불링거에게 안티스테스 자리와 권한을 부여한 것은 그를 그만큼 신뢰하였기에 때문이다. 불링거는 무려 44년 동안 취리히 담임 목사로서 사역을 감당했다. 그가 사역하는 동안 매일같이 교회와 정치권력 사이의 깨어질 것 같은 관계를 조율해야 했다. 그때마다 불링거는 특유의 부드러움과 인화력으로 문제를 수습하였다. 


그는 본성적으로 수줍을 많이 타고 학문을 좋아했지만, 여행은 즐기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국제적 영향력은 지대하였다. 그는 스위스뿐만 아니라 전 유럽 개신교의 지도자로서 역할을 감당하였다. 그를 반대하는 루터파 사람들이 칼 황제의 핍박을 피해서 왔을 때 기꺼이 그들을 환영하고 받아주었다. 불링거의 취리히는 칼빈이 이끄는 제네바 시와 더불어 개혁자들의 피난처가 되었다. 이탈리아, 프랑스, 독일, 영국, 헝가리, 폴란드에서 신앙의 피난민들이 취리히로 몰려왔다. 그는 츠빙글리의 사상을 유지 발전시키며 개신교의 국제적 연합을 위하여 힘을 다하였다. 불링거는 유럽 전역의 지도자들과 편지를 나누었는데 대략 12,000통이나 되었다. 제네바의 개혁자 베자는 그를 가리켜 “모든 기독교 교회를 돌보는 만인의 목자”라고 말하였다. 펠리컨은 “하나님의 영광과 영혼 구제를 위해 하늘로부터 은사를 풍성하게 받은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하였다. 


1575년 9월 17일 71세의 불링거는 동료들로부터 격식을 갖춘 이별 인사를 받은 후 신장염으로 사망하였다. 츠빙글리와 불링거의 뒤를 이어 취리히 시는 개혁 사상을 이어갔다. 불링거의 후계자는 그의 보살핌 아래 훈련받은 4명의 사역자가 차례로 취리히 시를 지도하였다. 츠빙글리의 사위이자 불링거의 양자였던 루돌프 그발터(Rudolph Gwalter, 1575~1586), 라바터(Lavater, 1585~1586), 스텀프(Stumph, 1582~1592), 리만(leemann, 1592~1613)이다. 불링거가 죽던 해 태어난 브라이팅거(Johann Jakob Breitinger, 1575~1645)는 그 다음 취리히 담임목사가 되어 불링거 사상을 이어갔다. 그는 도르트 회의(1618~1619)에 스위스 사절단 가운데 한 사람으로 참석하였다. 취리히는 츠빙글리로부터 브라이팅거에 이르기까지 120년이 넘도록 개혁 신앙의 본산으로서 그 역할을 감당하였다. 


참고도서

1. 필립 샤프, 교회사 전집 8, 스위스 종교개혁, 박경수 옮김, (서울 : 크리스챤다이제스트, 2013)

2. 에미디오 캄피, 스위스 종교개혁, 김병훈, 방상봉, 안상혁, 이남규, 이승구 공역, (수원: 합신대학원출판부, 2016)

3. 카터 린드버그, 종교개혁과 신학자들, 조영천 옮김, (서울 : CLC, 2012)

4. 케니스 래토레트, 기독교사 중, 윤두혁 옮김 (서울 : 생명의 말씀사, 1993)

5. 이은선, 종교개혁자들 이야기, (시흥 : 도서출판 지민, 2013) 

6. 임도건, "후기 종교개혁 사상 연구 - P. 멜란히톤, M. 부처, H. 불링거, T. 베자를 중심으로" ⌜숭실대 박사학위 논문⌟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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