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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gos Brunch Feb 14. 2017

사회변혁가, 츠빙글리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 시리즈 21

스위스는 독일과 달리 일찍부터 민주제도의 기틀을 다져왔다. 험준한 지형 때문에 통일 국가를 이루지 못한 스위스는 지역들(canton)이 연합하여 계약공동체조직(Bündnissystem)을 만들었다. 각 지역이 자발적으로 참여하였기에 지역 자치권은 철저히 보장하였다. 각 지역은 대표자 2명씩 파견해서 일 년에 한두 차례 모여서 만장일치로 의결하였다.


취리히 역시 대의회(Der grosse Rat)와 소의회(Der kleine Rat)로 구성된 시민 대표가 시를 다스렸다. 입법권을 가진 대의회는 각 직종의 대표자 162명으로 구성되었다. 그들은 주로 시의 경제 문제를 다루었다. 행정권을 가진 소의회는 동업조합 대표 25명으로 구성되었는데 사회의 질서를 바로 세워가는 일을 하였다. 소의회 의장이 시장이 되었다.

츠빙글리의 생가

독일은 전형적인 중세국가로서 영주 한 명이 자기 영토를 다스렸다. 루터는 영주의 절대적 지지가 필요하였다. 다행히 루터가 사는 작센주의 영주는 종교개혁적 성향을 가지고 있었기에 마음 놓고 종교개혁을 진행할 수 있었다. 그는 언제나 영주 편에 서서 종교개혁 사상을 펼쳐나가야 하는 한계가 있었다.


반면에 츠빙글리의 상황은 루터와 전혀 달랐다. 그는 위원회 곧 시민 전체를 설득해야 종교개혁을 진행할 수 있었다. 그가 시민 토론을 통해서 정책을 결정하는 방법을 선택한 것은 그 때문이다. 츠빙글리는 온 시민을 설득하며 종교개혁을 진행하였다. 루터처럼 강압적일 수도 없었고 속도를 낼 수도 없었다.


독일과 스위스 모두 중세의 틀에서 이제 막 벗어나려는 단계에 있었다. 종교의 부패, 사회 구조적인 문제에 대한 불만은 이곳저곳에서 터져 나왔다. 특별히 중세 체제 중에 제일 하층인 농민의 불만이 심했다. 중세 유럽은 농업이 주요 산업이었다. 13세기에 이르러 농업 기술이 개선되기 시작하였다. 곡물 경작에 가장 중요한 도구인 쟁기가 보급되면서 농업 생산성이 향상되었다. 단위면적당 생산되는 식량이 늘어나면서 자연스레 인구도 늘어났다. 농업생산량과 인구가 늘면서 세금도 늘어났다.


15세기 중세 유럽은 농업사회에서 상업사회로 서서히 변화하고 있었다. 상업이 발달하면서 현금의 중요성이 점점 높아지고, 곡물로 바치던 세금을 현금으로 내도록 강제하기 시작하였다. 문제는 14세기부터 돌기 시작한 흑사병과 끊이지 않고 일어나는 전쟁(십자군 전쟁, 장미전쟁, 백년전쟁 등)으로 인구가 급속히 줄어들었다. 세금은 늘어났는데 농업경제를 이끌어야 할 농민은 없었다. 농토가 부족하여 용병으로 나가 돈을 벌어오던 스위스와 달리 독일 농촌은 크게 흔들렸다. 인문주의, 종교개혁 등으로 변혁의 바람이 농민들에게도 불어왔다. 농민이 들고일어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는지 모른다.


그들은 종교개혁자들의 가르침을 자기 입장에 맞게 재해석하였다. 독일 농민은 1525년 ‘슈바벤 농민의 12개 조항’을 발표하였다.

1) 목사의 선택권은 전체 교구민 의견에 따라야 한다.

2) 공물의 1/10세는 바쳐야 하나 현금을 거두어 목사의 봉급을 지급하고 남은 돈은 구제해야 한다.

3) 농노를 해방할 것 - 그리스도의 복음은 인간의 자유를 전제로 한다.

4) 하나님에 의한 생물 지배권을 보장할 것

5) 개인에게 소유되지 않은 삼림의 공동 소유권을 보장할 것

6) 과도한 노동을 금지할 것

7) 과중한 부역을 금지할 것

8) 공정한 토지 관리인을 선정하고 공정한 지대를 정할 것

9) 성문법에 의한 공정한 재판을 할 것

10) 목초, 임야를 공정하게 사용할 것

11) 사망세를 폐지할 것

12) 만일 이 조항 중 하나님 말씀과 다르게 기초한 것이 있다면 버릴 것이다.


루터는 농민의 요구조건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종교개혁은 내면적이고 개인적인 신앙 차원이지 사회 개혁은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종교개혁을 강력히 지지하는 영주의 마음이 돌아선다면, 지금까지 진행해온 개혁이 무산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는 난동을 부리는 농민을 진압하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한번 생각을 정하면 곧장 앞으로 직진하였던 루터는 확실하게 영주 편에 서서 설교하였다. 농민을 찾아다니며 무기를 내려놓으라고 충고하였지만, 영주 편에 선 루터를 따르는 농민은 없었다. 그는 “도적질하고 살인하는 농민 강도 떼들에 대항하여”(1525)를 발표하였다.

“할 수 있다면 찔러라. 몽둥이질하라. 그리고 목을 졸라라. 이로써 너희에게 죽음만이 기다릴 뿐이다. 너는 성스러운 죽음을 결코 맞이하지 못하리라. 지금 시대는 얼마나 놀라운가! 다른 사람들은 기도로서 천국을 맞이할 때, 너희는 제후의 당연한 폭력에 의해서 피 흘리며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같은 해(1525년) 취리히 농민도 츠빙글리에게 요구조건을 내밀었다. 취리히 농민은 독일 농민보다 진일보한 요구를 하였다.

1) 마을의 목회자 선출 권리와 자치권을 달라.

2) 공물의 1/10세를 완전 면제해달라. 우리는 바칠 수 없다.

3) 농민들에게 어업권 사냥권의 자유를 달라.

4) 용병제와 연금제를 폐지하라.


사실 츠빙글리는 취리히 목회자로 임명받은 후 끊임없이 사회 구조를 개선하려고 노력하였다. 우선적으로 생각한 것은 용병제와 연금제 폐지였다. 그의 노력 덕분에 취리히는 이미 용병제와 연금제를 거부하였다. 중세 수도원은 병원이나 사회복지 기관으로 바뀌었고 교회 갱신과 더불어 사회개혁이 병행되었다. 마리아를 숭배하는 모든 호화로운 예식과 장식물을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가난한 자를 돌보아야 한다고 츠빙글리는 설교하였다.

“하나님의 어머니 마리아에 대하여 더 이상 탐욕의 벌레가 오랫동안 우글거리는 금, 은, 보석으로 치장하려 들지 말고 그런 돈이 있으면 마리아의 가련한 아들 예수가 행한 것과 같이 가난한 사람에게 주어야 한다.”

사회 개혁을 시도하면서 중세의 검은 그림자를 털어내려는 츠빙글리에게 좀 더 속도있게 개혁하라는 요구가 일부 사람에게서 터져 나왔다. 모든 시민을 설득하고 동의를 구하며 점진적으로 개혁을 시도하는 츠빙글리가 마음에 들지 않아하던 급진주의자들의 요구였다. 콘라드 그레벨(Conrad Grebel) 같은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만 복종하면 되지, 시의회나 시민을 설득할 필요가 어디 있냐고 주장하였다. 그들은 세상 나라와 관련 없이 순수한 하나님 나라를 세우자고 요구하였다. 츠빙글리는 그들이 주장하는 혁명적인 개혁보다는 모든 사람이 함께 나아가는 점진적 개혁을 생각하였다.


그는 농민들이 요구하는 십일조세를 다루지 않으면 안되었다. 무조건 폐지를 외치며 지주에게든 교회에든 십일조세를 바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과격한 농민을 설득하기 시작하였다. 이 세금을 만든 본래 의도는 가난한 사람을 돕고 또 성직자의 생활비를 지원하는 것이었으니 세금에 담긴 의도대로 바로 사용하며, 고쳐야 할 것이 있으면 점진적으로 개혁하자고 설득하였다. 독일처럼 소요가 일어나긴 하였지만, 이미 사회구조를 바꾸려고 노력하는 츠빙글리였기에 폭력을 휘두르지는 않았다. 그는 가난한 농민들을 설득하는 설교를 하고 글을 썼다. 1523년 세례 요한을 기념하는 날인 6월 24일 취리히 그로스뮌스터에서 “하나님의 정의와 인간의 정의(göttliche Gerechtigkeit und menschliche Gerechtigkeit)를 설교하였다. 이 설교에 츠빙글리의 사회경제 정의 사상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하나님의 정의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계시되었으며 온전하고 완전한 것이다. 하나님의 정의는 거듭난 속사람을 향하여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처럼 행위의 동기(사랑)에 초점을 맞추었다. 불행하게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하여 하나님의 정의를 온전히 이루지 못한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무력함과 부패함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사람에게 아주 낮은 차원의 정의를 주셨는데 그것이 인간의 정의다. 모세가 유대 백성의 “마음의 완악함 때문에”(마19:8) 어쩔 수 없이 이혼을 허락한 것처럼 시대 상황마다 인간이 지킬만한 정의를 주셨다. 하나님의 정의와 달리 인간의 정의는 분명한 행위규범이다. “도적질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거짓 증언하지 말라.’ 등이다. 국가는 인간의 정의를 세우기 위한 법을 만들고 그것을 지키므로 사회를 건강하게 이끌어갈 의무가 있다. 물론 인간의 정의는 온전한 것이 아니므로 얼마든지 바꿀 수 있고, 또 변혁되어야 한다. 그러나 인간의 정의는 언제나 하나님의 법을 지향하여야 한다. 만일 하나님의 정의를 외면한 체 인간의 정의만 내세우면 그것은 곧 바리새적인 위선이다.


만일 국가(정부)가 하나님의 정의를 지향하지 않고 하나님을 섬기는 종의 역할을 다하지 않는다면, 구체적으로 공권력이 악행을 저지른 사람을 벌주지 않고 오히려 그들 편에 선다면, 백성의 양심은 상처를 받는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부를 향한 원성의 고삐가 풀리며 국가권력에 저항하게 된다. 국가권력은 절대화될 수 없다. 국가 권력의 목표는 인간의 정의를 뛰어넘어 하나님의 정의를 이루려고 힘써야 한다.


그는 아주 구체적으로 소유, 이자, 소출세에 관하여 언급하였다. 하나님의 정의에 비추어 볼 때 개인 소유는 허용되지 않는다. 땅에서 생산되는 모든 것과 토지는 본래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소유를 일정 기간 한시적으로 사용하는 청지기일 뿐이다. 그런데 인간의 부패함과 탐심으로 바람직한 청지기 노릇이 쉽지 않으므로, 법이 정하는 한도 내에서 개인소유를 허용한다. 개인 소유를 허용하지만, 동시에 경제적인 약자도 보호하여야 한다. 이자를 받고 돈을 빌려주는 것도 허용하긴 하지만, 이자율은 5%를 넘지 않도록 한다. 토지에서 생산한 십일조세는 그 취지가 가난한 자를 돕기 위한 것이므로 폐지하지는 않되, 해마다 소출의 수확량에 따라 형편에 맞게 조정하여야 한다. 조선 시대 소작농의 세가 50%였던 것에 비하면 1/10세는 사실 그리 크지 않은 세금이다.


츠빙글리는 혁명가가 아니었다. 그는 더디더라도 모든 사람을 설득하고 조정하면서 사회를 변화시키려고 힘을 썼던 진정한 개혁자였다. 그는 사람의 권리와 경제적 효율성을 동시에 만족하게 하기 위하여 힘을 다했다. 그는 스위스와 백성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종교개혁자요 사회 변혁가였다. 오늘 우리 사회에 요구되는 크리스천 리더는 바로 츠빙글리 같은 사람이 아닐까?


참고도서

1. 칼-하인츠 츠어 뮐렌, 종교개혁과 반종교개혁, 정병식, 홍지훈 옮김, (서울 : 대한기독교서회, 2005)

2. 필립 샤프, 교회사 전집 8, 스위스 종교개혁, 박경수 옮김, (서울 : 크리스챤다이제스트, 2013)

3. 이연규, "중세 농민경제의 성격과 발전" ⌜경성대학교 논문집⌟ 제16집 1권 (1995)

4. 정미현, "하나님의 정의와 인간의 정의 : 츠빙글리 윤리의 현대적 적용" ⌜기독교사회윤리⌟ 제31집 (2015)

5.            "이미지와 성상 부정에 대한 츠빙글리 사상 다시보기" ⌜한국조직신학논총⌟ 제43집 (2015)

6. 조용석, "츠빙글리와 교회 : 사회적 영역으로의 통합"  ⌜신학사상⌟ 156집 봄호 (2012)

7. 임희국, "16세기 종교개혁자 츠빙글리의 사회윤리에 조명해 본 오늘의 시장경제" ⌜장신논단⌟ Vol 18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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