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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gos Brunch Jul 05. 2017

내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기독교의 공공성

세상에 여러 종교가 있지만, 나는 세 가지로 나누고 싶다. 첫째 윤리가 없는 종교다.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이 없는 종교다. 원시종교나 무속종교다. 그저 복채나 두둑이 주면, 상대방이 어떤 사람인지 개의치 않고 복을 빌어준다. 개인적인 소원이나 욕심을 채워주는 저급한 종교라고 할 수 있다.


두 번째 개인윤리가 있는 종교다. 그들 역시도 복을 빌어주는 기능을 하지만 사람이 왜 사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고민하는 종교다. 인간관계에서 가져야 할 윤리나 규범을 말하며 바른 사람이 되라고 가르친다. 원시 종교를 빼고선 종교 대부분이 개인 윤리를 강조한다.


세 번째 사회윤리, 공공윤리를 가르치는 종교다. 이들은 개인 윤리를 넘어서서 이 사회를 바르게 만들어가기를 희망하는 종교다. 타자를 보게 하고 사회적 약자를 살피도록 하는 종교다. 공공윤리를 확실하게 가르치는 종교는 믿는 사람의 수에 상관없이 사회에서 리더십을 가지고 선도적 역할을 감당한다.


기독교는 이 세 부류 중 어느 쪽에 해당할까? 희망하기는 공공윤리가 확실한 종교로 모든 사람에게 존경받는 자리에 서고 싶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사실 기독교에 세 가지 측면이 모두 나타난다. 일부 교회는 무속종교처럼 헌금만 많이 하면 무조건 복을 빌어주는 기복종교의 모습을 가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성경의 가르침과는 전혀 상관없이 개인의 욕심과 소원을 채워주기 위하여 애쓰는 교회와 목회자를 찾기는 어렵지 않다. 심지어 점쟁이나 무당처럼 헌금 봉투를 잡고 예언을 한다는 이야기를 심심찮게 듣고 있다. 한국 기독교가 타락하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이 바로 기복 사상이다. 어떻게 해서든지 성공하기를 소망하고, 복 받기를 소망하는 지극히 사사로운 욕심에 편승하는 차원 낮은 종교의 모습이다. 지금도 설교 방송을 통하여 흔하게 들을 수 있는 메시지다. 그런 메시지를 들을 때마다 나는 부끄러움에 몸 둘 바를 모른다.


두 번째로 개인 윤리만을 강조하는 종교다. 신앙을 개인의 윤리 차원에만 국한 시켜서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나만 똑바로 믿고 살면 된다는 식의 가르침이다. 세상은 죄악 된 곳이고 멸망할 곳이기 때문에 그쪽에 신경 쓰지 말고, 개인의 영성과 마음의 평화를 추구하라고 가르친다. 우리가 처한 삶의 상황과 역사적 정황 등을 고려하지 않는 것은 둘째 치고,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이루시고자 하는 하나님 나라를 개인적인 차원에서만 이해한다. 한마디로 신학의 부재이다. 지금까지 한국 교회는 초월적, 영적, 개인적 차원에만 머물렀지 공적인 문제에 관해서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썩은 곳, 어두운 곳에서 빛과 소금이 되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귀기울여 듣지 않았다. 결국 예수 믿는 사람은 세상 누구보다도 이기적인 사람이 되었다. 세상이 기독교인을 욕하는 것은 단순하다.

“그래 너희들 예수 잘 믿고 이 땅에서도 잘되고 천국도 가라!”

세상이 보는 기독교인은 공공성을 상실하고 개인적인 욕심을 채우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다. 물론 전도한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교회 몸집 불리기에 지나지 않으며, 그들 또한 개인적 욕심을 채우는 또 한 명의 종교인을 만드는 것에 불과하다.


세 번째로 공공 윤리를 강조하는 종교다. 창세기 1장 1절에서 하나님은 공공성을 선포하셨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 하시니라.”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말은 천지가 모두 하나님의 것이란 뜻이다. 인간이 사사로이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나의 생명, 나의 건강, 나의 자녀, 나의 사업 모두가 내 것이라고 주장할 수 없다. 성경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소유권을 주장한다.

“땅과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중에 거하는 자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시24:1)

여호와 하나님은 만물의 주인이시다. 그분은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이시다. 우리의 삶에 그분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곳은 단 한 곳도 없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부분이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 있다.


절대 소유자이신 하나님께서는 무엇보다도 재산의 획득과 소유에 제한을 두신다.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고 그 모든 것을 사람에게 위탁하시면서도 인간의 욕망에 제한을 두셨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창2:16-17)

첫 사람 아담과 하와는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하여 선악과마저 따먹었다. 타락은 사사로운 소유욕에서부터 시작하였다.

초등학교 시절 방학 때면 외가에 가서 머물렀다. 먹을 것이 넉넉하지 않던 시절이었다. 시골에서 농사지으며 부유하게 살던 외가에 가면 언제나 먹을 것이 풍성하였다. 가끔 외삼촌은 산에 나무하러 올라가시면서 나를 데리고 가셨다. 겨울을 대비하여 땔감을 쌓아두려고 함이었다. 집집마다 산에서 해온 나무를 벽에 쌓아두었는데 어느 집이 더 많이 쌓나 경쟁처럼 보였다. 산은 벌거숭이가 되었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공공의 개념이 없을 때였다. 함께 보며 즐거워하기보다 먼저 가져가는 사람이 임자인 세상이었다.


가을날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 가로수 길은 아름답다. 꼴불견인 것은 검은 봉지를 들고 은행나무 밑에서 은행을 터는 사람들이다. 공공윤리라고는 찾아볼 수 없고 오직 자기 욕심만 채우려는 사람들이다. 전에는 이런 행동을 문제 삼지 않았지만, 공공윤리를 강조하는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은행나무, 열매는 해당 지자체의 소유로 무단 채취할 경우 관계 법령에 처벌을 받는다. 가로수가 손상될 경우 ‘산림자원의 조성 및 관리에 관한 법률 제74조(벌칙)에 의거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1,500만 원 이하의 벌금형을 받을 수 있다. 은행 열매를 채취하는 행위만으로도 ‘경범죄처벌법 제1조 20호(자연훼손)’에 의거 10만 원 이하의 벌금, 구류 또는 과태료의 형을 받을 수 있다. 경우에 따라 심각하다고 판단될 경우 절도죄가 되어 6년 이하의 징역 또는 1,000만 원 이하의 벌금을 받게 된다. 현대 사회에서 공공 윤리는 갈수록 더욱 중요해진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시면서 먼저 이 공공윤리를 말씀하셨다. 이 세상을 다스리고 경영할 책임을 맡기시면서도 사사로운 개인적 욕심을 채우는 일에 몰두하지 말라고 하셨다. 구약의 안식일, 안식년, 희년법에도 그러한 사상이 담겨 있다. 성경은 이웃의 궁핍함을 돌보지 않은 채 자기 이윤만을 추구하는 것을 엄격히 금하였다. 추수할 때에도 곡식을 다 거두지 말고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적당히 흘리라고 하였다. 과일을 따도 공중의 새와 길가는 나그네를 생각해서 제일 아래쪽과 위쪽의 과일은 따지 마라. 희년이 되면 매매했던 모든 땅을 원주인에게 돌려주어 그들의 후손이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라.


신약은 말할 것도 없고 구약만 살펴보아도 하나님의 공공성, 복음의 공공윤리를 얼마나 강조하였는지 모른다. 선지자들이 화를 내며 심판을 선언한 것은 다름 아니라 이스라엘이 공공성을 잃어버리고 사사로운 욕심을 채우는 일에 경쟁적으로 나설 때였다. 권력자들이 자기 욕심을 채우고, 종교인들이 그러한 권력에 아부하는 모습에 몸서리를 쳤던 사람이 선지자들이었다.


종교 중에 가장 나쁜 종교가 악한 권력에 기생하여 연약한 백성을 현혹하는 종교다. 카를 마르크스는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고 하였다. 세상이 부조리하게 돌아가는데, 세상이 썩어가는 데, 권력자가 제 욕심을 채우려고 백성을 마구잡이로 착취하고 괴롭히는 데 종교가 하는 역할이 억압받는 백성에게 아편만 주어서 되겠느냐 하는 질책이다. 구약의 바알 종교가 그러하였다. 권력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으며 권력이 유지되도록 도와주는 종교다. 문제는 여호와의 종교도 바알 종교 흉내를 내는 데 있다. 하나님 잘 믿으면 너희도 잘살 수 있다. 열심히 노력하면 너희도 성공할 수 있다. 비록 이 땅에서는 가난하고 억압받고 눈물로 살지만, 천국에 갈 수 있으니 참고 견뎌라. 그러면서 세상의 부조리함에 단 한마디 말도 안 하는 종교다. 카를 마르크스의 말이 아니어도, 공공성을 잃어버리고 지극히 개인적인 신앙만을 강조하고, 기복신앙만을 설파하는 종교는 정말 인민의 아편이다.


일제 강점기 한국 기독교는 불과 1%도 되지 않았다. 그러나 당시 기독교는 공공성에 있어서 누구보다도 뛰어났다. 나라를 잃어버린 민족의 아픔을 온 몸으로 끌어안았고, 병들어 죽어가는 나라를 살려보겠다고 절제 운동에 앞장섰다. 술 마시고 도박하고 아편하고 담배 피는 일을 하지 말자. 물산장려 운동, 국채보상운동, 자치 운동에 애를 썼다. 고아원, 양로원, 학교, 병원을 세우며 사회적 약자들을 돌보는 데 힘을 다했다. 당시 쓰러져가는 조선에 유일한 희망은 기독교였다. 민족 지도자라고 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자발적으로 교회를 찾아왔다. 3.1 운동 때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명의 민족 대표 중 기독교인이 16명이나 되었다는 사실은 당시 기독교가 얼마나 공공성에 힘을 다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공공성을 가진 종교는 신도 수가 얼마인지와 상관없이 세상의 소금이요 빛이다. 초대교회가 예배당 크기나 신도 수로 로마를 정복한 것이 아니다. 그들이 보여준 복음의 공공성, 정직성, 투명함, 공동체성이 역사하였다. 한국 기독교가 다시금 이 사회에서 제 역할을 감당하려면 복음의 공공성을 회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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