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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gos Brunch Jul 13. 2017

아름다움과 추함

기독교의 공공성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창1:31) 


대학입학 선물로 아버지는 나에게 카메라를 사주셨다. 카메라를 받은 나는 좋아서 어쩔 줄 몰랐다. 카메라에 필름을 넣고 리와인더를 감을 때 따라오는 필름 소리에 나는 흥분하였다. 카메라를 목에 걸고 어깨를 으쓱거리며 친구들 사진 찍어 주겠다고 설쳐댔다. 필름 값 아까운 줄 모르고 셔터를 눌러댔다. 한번은 사촌 누이가 결혼하는데 사진 찍어줄 수 있겠냐고 하였다. 실력도 없는 주제에 난 생각없이 승낙하였다. 나중에 현상해보니 사진이 단 한 장도 나오지 않았다. 동네 사진관에서는 필름에 빛이 들어가서 인화할 수 없었다고 하는데 누구의 잘못인지 분명치 않다. 사촌 누이는 내가 잘 찍어줄 줄 알고 다른 사진사를 부르지 않았는데 어쩌냐고 발을 동동 굴렀다. 30년이 지나가지만, 아직도 사촌누이를 볼 때마다 미안한 마음뿐이다. 그래도 세월을 계급삼아 개인전을 몇 차례 했다. 사진을 하는 동료들이 와서 내 사진에 대해 이런저런 말을 할 때면, 절로 고개 숙여진다. 자랑할만한 사진이 없기 때문이다. 누가 내 작품에 대하여 비평하거나 허물을 지적하면 겸손하게 듣는 척 하지만, 속상한 것은 숨길 수 없다. 

하나님의 작품은 얼마나 아름다울까? 완전하신 하나님께서 만드셨으니 얼마나 완벽하실까? 하나님 스스로 보시기에도 만족하셔서 심히 좋았다를 반복하셨다. 다윗은 하나님의 창조를 아름답게 노래하였다. 

“하늘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창공은 그의 솜씨를 알려 준다. 

낮은 낮에게 말씀을 전해 주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알려 준다. 

그 이야기 그 말소리, 

비록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아도 

그 소리 온 누리에 울려 퍼지고, 

그 말씀 세상 끝까지 번져 간다." (시19:1-4, 새번역)


미국에서 심리학을 전공한 김주원 박사가 내게 해 준 말이다. 도박과 알콜과 마약에 중독된 사람을 치료하는 프로그램에 사진을 사용한다. 접사 렌즈를 통하여 하나님이 지으신 자연 만물을 자세히 들여다보게 한다. 그냥 볼 때는 특별한 것이 없지만, 접사 렌즈를 통해서 자세히 보면 아름답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다. 도박과 알콜과 마약에 빠져 살던 사람들이 처음 접사 렌즈를 통해서 자연의 아름다움을 보고 깜짝 놀란다. 세상에 이런 아름다운 세계가 있다니! 하나님이 지으신 아름다운 솜씨에 빠지기 시작하면, 세상의 악한 습관에서 쉽게 벗어날 수 있다고 한다. 


접사 렌즈가 아니어도 마음을 열고 세상을 바라보면 아름답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다. 자연을 깊이 사랑했던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703~1758, 미국의 신학자)는 말을 타고 산책하거나 옥외에서 일할 때면 하나님의 지혜와 아름다움을 묵상하곤 했다. 그가 스무 살 때 ‘거미 보고서’란 짧은 글을 출판했는데 그 책에 이런 내용이 있다. 

"바람 한 점 없이 화창한 날, 단지 눈부신 햇살을 피하려고 나는 집에서 조금 떨어진, 빛이 들어오지 않는 곳에 서서 집 옆쪽을 쭉 훑어보았다. 거기서 그다지 빛나지 않는 거미집과 반짝거리는 거미줄이 무수히 걸려 있는 것을 보았다. 거미줄은 햇빛을 선명하게 반사하였는데, 어떤 것은 매우 길게 높이 걸려 있어서 하늘에 고정된 것처럼 보였고 태양에 타버리면 어떡하나 염려될 정도였다. 매우 놀랍고 보기 좋은 광경이었다. … 그러나 가장 놀라운 광경은 거미줄 끝에 흔히 보이는 거미가 기쁨에 가득차 공중에서 거미줄을 타는 모습이다.

에드워즈는 자연에 나타난 하나님의 감미로운 영광을 보았다. 거미가 줄 타는 모습을 기쁨에 가득차 춤추는 것으로 보았다. 그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보면서 하나님을 자연의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은 심각한 신성모독이라고 하였다. 


시편 저자도 에드워즈와 같은 마음으로 자연 만물을 보고 찬송하였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나이다.”(시8:1) 


하나님께서는 자연 만물을 심히 아름답게 창조하시고 인간에게 경영해보라고 건네주었다. 하나님의 작품인 피조물을 하나하나 아담에게 데려가 이름을 지어보라고 하셨다. 하나님의 작품명은 사람이 만들었다. 놀라울 따름이다. 그리고 그것을 다스리라고 하셨다. 모든 자연 만물을 인간에게 맡기셨다. 


불행하게도 아담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보다 자기 욕심을 채우기에 급급하였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다스리기보다 소유욕을 채우기 위하여 금지된 선악과를 따먹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보다 자기 스스로 선악을 판단하는 지식을 더 원하였다. 창조주 하나님을 무시한 아담은 에덴에서 쫓겨나고 자연 만물은 통치자를 잘못 둔 바람에 함께 저주 가운데 빠졌다. 


그 이후 인간은 자연을 관리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정복하고 파괴하는 일에 골몰하였다. 인간의 소유욕은 끝을 몰랐다. 하나님이 지으신 다른 생명체와 자연 만물에 대해선 조금도 마음을 두지 않았다. 무분별하게 남용하고 파괴하였다. 그동안 인간이 멸종시킨 동, 식물이 한둘이 아니다. 자원을 마구잡이로 개발하고 남용하였다. 한정된 지구자원을 돈 좀 있다 하는 사람은 자기 편하자고 마구 사들였다. 쌀, 밀, 보리 등의 주식 작물과 사탕수수, 천연고무, 커피 등 원료 작물, 에너지, 석탄, 천연가스와 같은 지하자원까지 무분별하게 사용하였다. 전문가들은 2050년 세계 인구가 91억 명을 넘어서면 자원은 바닥날 것이라고 한다. 


세계의 허파라고 불리는 아마존 열대우림은 매년 크게 파괴되고 있다. 2015년 8월 ~ 2016년 7월에 아마존 열대우림 7,989㎢가 파괴된 것으로 확인됐다. 이는 서울의 13배에 달하는 면적으로, 1시간에 128개 축구장 넓이에 해당하는 열대우림이 사라졌다. 열대우림의 파괴는 지구 온난화 현상을 일으키는 탄소를 이중으로 배출시키며 그 피해는 기후 변화로 우리에게 다가왔다. 


인구 증가와 더불어 물질 소비가 늘어나면서 인류가 버리는 쓰레기양도 어마어마하다. 캐나다 온타리오 대학 과학자들은 오는 2100년이면 매일 1천 100만t의 쓰레기를 배출할 것으로 예상하였다. 이들은 지난 1900년에 전 세계 도시에서 배출된 쓰레기가 하루 33만t이었지만 2000년에는 10배인 330만t에 달했다고 밝혔다. 하나님이 아름답게 지으신 자연 만물은 지금 몸살을 앓고 있다. 쓰레기로 넘쳐나고 있다. 원래 하나님이 자연을 지으실 때 생태계에 자정 능력을 주셨다. 그런데 이제 그 자정 능력은 한계를 넘어섰다. 


얼마 전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파리기후변화협정을 탈퇴하겠다고 공식 발표하였다. 트럼프의 이번 결정은 내일의 자연환경은 신경 쓰지 않고 현재 미국민을 잘살게 하겠다는 지극히 단세포적인 판단이다. 탄소 배출을 제한하지 않을 테니 미국의 공장들은 마음껏 탄소를 배출하며 생산하라고 독려하는 셈이다. 미국이 이렇게 자국 이기주의에 빠지면, 결국 세계 모든 나라도 따라할 것이다. 자기 욕심을 위하여 자연을 파괴하는 일은 속도를 낼 것이다. 


트럼프를 지지하는 극우 보수적 기독교는 잘못된 신학 사상을 전파하고 있다. 어차피 이 세상은 죄악 된 세상이고 불로 심판하여 망할 세상이기에 환경 오염이나 환경 파괴에 신경 쓸 필요 없다고 한다. 세대주의적 종말론을 믿는 사람들은 불로 타버리는 세상을 뒤로 하고 믿는 자는 휴거할테니 걱정 없다고 가르친다. 자연으로서는 억울하기 짝이 없다. 자연을 잘 다스려야 할 막중한 책임은 외면하고, 마구잡이로 개발하고 파괴하고 남용하고 쓰레기를 잔뜩 버리더니, 이런 더럽고 추한 세상은 불태워 버려야 한다고 말한다. 자연은 억울하다. 심판받고 멸망 받아야 할 대상은 자연이 아니라 인간이다. 자기 욕심만 생각하고 제멋대로 행동한 인간이다. 


불행하게도 찬송가에는 이런 잘못된 사상을 드러낸 찬송이 많다. 그것은 죄악 된 세상을 떠나 저 하늘나라에 하루빨리 들어가기를 간절히 사모하는 노래다. 

괴롬 없고 죽음 없는 하늘나라 올라가 그 생명의 강가에서 편히 쉬게 되리라. 

천국에는 해와 달과 별과 등불 없어도 하늘나라 밝은 빛이 찬란하게 비치네.”(찬송가 234) 

이 땅이 아닌 하늘나라에 가서 편히 쉰다고 하는데 어떻게 쉬는 게 편히 쉬는 걸까? 이들은 죽은 후 영화롭게 되어 우주 어느 신비한 하늘에서 영원히 살 것을 노래한다. 그곳엔 해와 달과 별과 같은 피조물이 없는 세상이다. 찬송가에 이런 사상을 담고 있는 노래를 쉽게 찾을 수 있다. 과연 성경적인 근거가 있는 노래일까?


성경은 우리가 살 하나님 나라를 묘사할 때 새 하늘과 새 땅이란 표현을 사용한다. 그런데 많은 기독교인이 새 땅에 대한 생각은 하지 않고 오직 새 하늘에 대한 생각만 하는듯 하다. 성경은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땅의 소중함을 여러 차례 강조하였다. 우리가 장차 살 곳은 새 땅이다. 그러면 새 땅은 어떤 곳일까? 새 땅이란 현재의 땅과 전혀 다른 땅인가 아니면 현재의 땅이 새롭게 되는 것을 의미하는가? 개혁주의 신학자 안토니 후크마(Anthony A Hoekema, 1913-1988)는 그의 책 ‘개혁주의 종말론’에서 이 문제를 다루었다. 


새 땅은 현재의 땅과 전혀 상관이 없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그들은 마태복음 24:29(그 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과 벧후3:12(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에 의지한다. 분명 마지막 날에 이 땅은 불에 타서 없어지고 하나님께서 새로 만드신 새 하늘과 새 땅에 거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안토니 후크마는 4가지 이유로 우주가 완전히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 우주가 새롭게 된다고 주장한다. 

첫째, 베드로후서3:13과 요한계시록 21:1에 사용된 헬라어 단어가 neos가 아니라 kainos임을 주목한다. 

neos는 시간과 기원에 있어서 전혀 새것을 뜻한다면, kainos는 본성이나 질에 있어서 새롭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ouranon kainon kai gen kainen(새 하늘과 새 땅)은 현재의 하늘과 땅과 전혀 다른 것이 아니라 현재의 우주와 같되 영화롭게 변화된 것을 말한다. 


두 번째 이유는 로마서 8장에 근거를 둔다. 지금 창조세계는 썩어짐의 종노릇하고 있다. 창조세계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영광의 자유에 이르게 될 것을 간절히 소망한다. 그날 자연 만물도 하나님의 아들처럼 영광에 이를 것이기 때문이다.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롬8:19-22) 


세 번째 이유는 새 땅과 신자들의 부활한 육체를 비교하면 명백해진다. 부활은 현재의 육체와 연속적인 면과 불연속적인 면을 모두 가지고 있다.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한 사람은 우리와 전혀 상관 없는 새로운 인종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이다. 신비하고도 놀랍게 변화된 우리 자신이다. 하나님의 구원은 우리만이 아니라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자연 만물도 그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새 땅과 새 하늘은 영화롭고 거룩하게 변화된 현재 땅과 현재의 하늘이다. 


네 번째 이유는 하나님께서 자연 만물을 완전히 소멸하신다면, 그것은 결과적으로 사단이 승리한 꼴이다. 사단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작품을 파괴하고자 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아름다운 작품에 흠집 내기 원했고, 궁극적으로는 자신과 함께 파멸되기를 원하였다. 


에드워드 투르네이슨(Edward Thurneysen)은 말하였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하실 때 우리가 들어갈 세상은 다른 세상이 아니다. 그 세상은 바로 이 세상, 이 하늘, 이 땅이다. 그러나 새롭게 된 세상이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조금 각도를 달리하여 이 문제를 설명한다. 하나님은 창조부터 자기 자신을 최종 목적으로 삼으셨다. 

“나는 처음이요 또 마지막이라.”(사48:12) 

“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계1:8)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롬11:36) 

하나님은 공들여 만드신 이 아름다운 세상을 포기하지 않으신다. 그리고 이 세상을 향한 목적은 반드시 이루신다. 그 목적은 자연 만물을 통하여 하나님 자신을 온전히 드러내심이다. 따라서 자연 만물이 여호와의 영광을 찬양하는 것은 당연하다.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사43:7) 

하나님께서는 자기 이름을 위하여, 자신의 완전하심을 알리기 위하여 세상을 창조하셨고, 또한 그것들을 통하여 자신을 찬양하도록 하셨다. 창조를 높이 찬양한 시편 기자들의 한결같은 고백이다. 

“다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할지어다. 그 이름이 홀로 높으시며 그 영광이 천지(하늘과 땅)에 뛰어나심이로다.”(시148:13) 

자기만 귀하다고 생각하고 자기만 구원받을 거로 생각했던 유대인처럼 오늘날 그리스도인도 인간만 구원받을 것이란 생각을 하고 있다. 하나님은 인간만이 아니라 온 우주 만물을 향한 구원 계획을 가지고 계시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그리스도인에게 몇 가지를 권면한다.

1. 하나님의 창조 의도를 인정하고 자연 만물을 바라보며 여호와를 찬양하라. 인간은 심히 부패하고 타락하였지만, 자연은 아직도 하나님의 선하심과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 

2. 하나님의 작품인 자연을 소중히 돌보아라. 하나님은 자신의 작품을 쓰레기 취급하고 불태워버려야 한다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가슴이 찢어진다. 자연을 돌보고 잘 경영해야 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 죄가 있다면 자연이 아니라 우리에게 있다. 

3. 우리는 마땅히 이 세상을 더 좋게 만들기 위해 힘써야 한다. 그리스도의 왕국을 충만하게 하려고 힘쓰는 우리의 노력은 소중하다. 기독교 문화를 발전시키고 증진하는 모든 노력은 이 세상에서뿐 아니라 장차 올 새 나라에서도 값진 것으로 여겨질 것이다. 기독교는 이 사회에 감당해야 할 책임이 막중하다. 이 점을 깨달으면 기독교는 뒤에 쳐져 숨는 것이 아니라 이 사회에 당당히 앞장서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한다. 


참고도서 

1. 안토니 A. 후크마, 개혁주의 종말론, 류호준 옮김 (서울 : 기독교문서선교회, 1986) 

2. 조나단 에드워즈, 천지 창조의 목적, 정일오 옮김 (서울 : 솔로몬, 2003)

3. 더글라스 스위니 & 오웬 스트라첸, 조나단 에드워즈의 하나님의 아름다움, 김찬영 옮김 (서울 : 부흥과 개혁사,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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