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의 공공성
“모든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자유롭고, 존엄과 권리에 있어 평등하다.” - 세계인권선언 1조
인권을 대놓고 부정하는 사람은 없다. 사악한 독재자들도 언제나 인권을 옹호한다고 말한다. 그들이 말하는 인권은 누구의 인권을 말하는 것일까? 독일의 히틀러는 1차 세계대전으로 폐허가 된 독일을 재건할 막중한 책임을 지고 총통이 되었다. 그는 순수 혈통인 아리안 족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하여 많은 조처를 하였다. 1933년 4월 ‘직업공무원제도 재건법’을 만들었다. 법률 이름만 봐서는 망가진 직업공무원 제도를 재건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공무원 사회에서 유대인을 축출하기 위한 법이었다. 1935년 9월에는 뉘른베르크 법을 발표했다. 이 법에 따르면 유대인과 독일인의 결혼은 물론 성관계를 맺는 것조차 불법이 됐다. 유대인과 성관계를 맺으면 ‘인종모독죄’로 처벌받았다. 질병 유전방지법도 제정하였다. 이 법은 본인의 동의 없이 유전 건강재판소의 판결에 따라 유전적으로 열등한 자를 강제로 불임시술하였다. 나치 집권 기간 중 유전적으로 열등한 20-35만 명이 단종되었다. 순수 아리안 족의 인권을 지키기 위하여 그가 저지른 악행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장애인들, 정신이상자들, 유대인들, 민주주의자들, 공산주의자들 모두 처형대상이었다. 사상이 다르고 생각이 다르면 용서가 없었다.
옥스퍼드 대학 법학 교수 하트(H.L.A. Hart, 1907~1992)는 유명한 '미터 자 비유'를 말했다. 어느 여름날 프랑스 국경지방인 스트라스부르(Strassburg) 철물점에서 미터 자를 하나 샀다. 그런데 왠지 그 미터 자가 정확하지 않은 것 같았다. 미심쩍은 그는 표준 미터 자와 비교하려고 파리 표준 계측국을 찾아갔다. 옳고 그름을 따지기 좋아한 그는 500km를 멀다 하지 않고 파리로 달려갔다. 마침내 파리 계측국에서 자신이 산 자와 비교할 수 있었다. 바로 그 순간 머리에 한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이 표준 미터 자가 옳은 길이를 가졌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지? 그는 관리에게 물었다.
“이 표준 미터 자의 길이가 옳습니까?”
관리는 살짝 당황하였다.
“그런 질문은 불가능합니다. 미터 자는 추상적인 수단입니다. 다른 미터 자와 표준 미터 자를 비교할 수는 있지만, 표준 미터 자가 옳은 것인지는 물을 수 없습니다.”
하트 교수는 바로 이것이 오늘날 법체계가 작용하는 방식이라고 하였다.
나라마다 고유한 법 체계가 있다. 정치 체제는 다를 수 있다. 시대마다 다르고, 나라마다 다르다. 왕정도 있고, 군주정도 있고, 민주정도 있고, 공산 정치도 있고, 사회정치 체제를 유지하는 곳도 있다. 각기 상황이 다르므로 법도 모두 다르다. 그렇지만 정당한 절차를 갖추어서 법을 만들고 집행한다면, 성문법으로 문제는 없다. 누구도 당신의 법체계가 옳았느니 틀렸느니 말할 수 없다. 만일 한 나라가 다른 나라를 향해서 당신 법은 틀렸소 말한다면, 반대로도 똑같은 말을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전문적인 용어로 이것을 법 실증주의, 법 현실주의라고 한다.
문제는 사악한 독재자가 등장하여 법을 악용할 때다. 20세기 두 번의 세계 대전을 통해서 인류는 엄청난 피를 흘렸다. 사망자는 고대와 중세 기간 모든 전쟁에 참여한 군인 수를 다 합친 것보다 많았다. 사망자는 군인만이 아니었다. 아무런 잘못도 없는 민간인이 잔인하게 학살당하였다. 불과 반세기 만에 벌어진 잔혹 행위는 끔찍했다. 세계는 경악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1946년 9월 30일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이 열렸다. 판검사는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에서 임명하였으며, 피고는 살아남은 최고위 나치 인사 23명이었다. 나치 인사들은 강하게 항변하였다. 우리는 독일의 법질서를 충실하게 따랐을 뿐이다. 우리를 심판하려면 독일 법으로 심판해야지 우리와 아무 상관 없는 연합국의 법으로 판단하는 것은 부당하다. 미국 측 책임검사 로버트 잭슨(Robert H. Jackson, 1892~1954)은 고민하였다. 나치 전범자들을 처벌할 법이 마땅치 않았기 때문이다. 나치 인사들은 누구보다도 충실하게 독일 법을 지켰다. 교통법규 한 번 위반한 적도 없었다. 게다가 모범적인 가장이었다. 그들은 누구보다도 훌륭한 독일 시민이었다. 잭슨은 해결책을 찾아야만 했다.
그리스의 아리스토텔레스는 문명 이전 자연 상태의 인간을 가정하고, 자연인이 가지고 있는 인간 본성에 기반을 둔 자연법이 있다고 생각했다. 인간 내면에는 인간의 가치와 윤리, 인권에 대한 이해가 있어서 이것에 근거를 두고 보편적이고 항구적인 법을 만들 수 있다고 하였다. 이것은 민족이나 사회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실정법과는 분명히 구분되는 본질적인 법이다. 자연법사상은 기독교 사상과 연합하여 중세 법질서를 세우는데 기둥이 되었다. 만일 자연법사상이 계속 유지됐다면, 로버트 잭슨은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나치 전범자들이 독일의 실정법은 잘 지켰지만, 모든 인류가 똑같이 가지고 있어야 하는 자연법을 어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연법사상은 공리주의자들이 등장하면서 무너졌다. 공리주의자들의 주장은 이러하다. 인간의 본성이라고 하는 양심은 문화적이다. 어려서부터 나쁜 행동을 할 때마다 야단을 치면 그의 양심은 윤리적으로 될 수 있다. 반대로 어려서부터 나쁜 행동을 할 때마다 칭찬하면 어떻게 될까? 이를테면 좀도둑이 어린이를 데려다 길거리에서 도둑질을 시켰다. 어린이가 남의 주머니를 털어오면 기뻐하고 칭찬하지만, 아무것도 훔쳐오지 못하면 크게 야단을 친다. 그러면 그의 양심은 점점 마비된다. 인간의 양심은 문화와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고대 6세기 유스티니아누스 법전에 자연법을 언급하였다.
“Honeste vivere, alterum non laedere, suum cuique tribuere.”
“정직하게 살기 위해 누구도 해치지 마라. 그리고 모두가 각자에게 합당한 몫을 얻게 하라.”
누구라도 이의를 달지 못할 만큼 바른 선언 같아 보인다. 그러나 역사를 살펴보면, 유스티니아누스(Justinianus 1, 483~565)는 자연법을 어떻게 지켰을까? 그는 동로마 황제로서 제국을 최대한 확장하고 싶어 했다. 533년 그는 벨리사리우스 장군을 보내 북아프리카 반달 왕국을 정복하였다. 535년에는 이탈리아를 지배하던 동고트 왕국의 내분을 틈타 나폴리와 로마를 점령했다. 그는 스페인 남부지역을 포함하여 지중해 연안의 주요 나라들을 정복하였다. 그의 정복욕은 멈출 줄 몰랐다. 그가 만든 법전에서 “정직하게 살기 위해 누구도 해치지 마라.”라는 말은 다른 민족과 국가에는 해당하지 않는 말이다. 오직 자기의 인권만을 강조한 말이다. 현대 히틀러와 다를 것이 없는 생각이다. 독재자들이 인권을 이야기한다면, 그것은 약자들이나, 이방인이나, 나그네의 인권을 말하고자 함이 아니다. 자기의 인권, 자기 부하의 인권, 자기 민족의 인권만 말할 뿐이다. 따라서 법 실증주의자들은 자연법을 인정하지 않고 각 나라가 만든 실정법만 인정하였다. 법 실증주의자인 뉘른베르크 책임검사 로버트 잭슨은 돌파구를 찾아야 했다. 끔찍한 인류 범죄 앞에서 법 실증주의에 한계가 있음을 그는 알아차렸다.
일찍이 루소(Jean-Jacques Rousseau, 1712~1778)는 인간이 법을 갖기 위해서는 신이 존재해야 한다고 하였다. 모든 상황, 어디에서나 적용할 수 있는 법을 만들기 위해, 인간의 조건과 과거, 현재, 미래를 관통하는 안목이 필요하다. 또한, 인간적인 조건으로부터 독립하여야 하고 특정한 관점에 사로잡혀서도 안 된다. 법을 수립하는 데 왜곡이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이 법을 가지려면, 신이 존재해야 한다.
20세기 위대한 철학자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 1889~1951)은 초월적인 윤리를 주장하였다. 인간적인 상황에서 제기된 윤리는 어떤 것이든 인간의 상황에 제한받기 마련이다. 윤리는 문화적으로 상황에 따라 구성된다. 따라서 절대적이지 않다. 진정한 단 하나의 윤리는 인간적인 조건에서 나올 수 없다. 그것은 외부로부터 뚫고 들어와야 한다. 즉 초월적이고 선험적인 윤리여야 한다.
그의 말은 아르키메데스의 지렛대와 받침점 이야기를 연상케 한다.
“내게 충분한 길이의 지렛대를 주고 이 지구 밖에 받침점을 둔다면 지구를 움직일 수 있다.”
지구가 아무리 크고 무겁더라도 충분한 길이의 지렛대와 받침점만 있으면 새끼손가락 하나로도 지구를 움직일 수 있다. 문제는 받침점이 지구 밖에 있어야 한다. 받침점이 지구 안에 있으면 결코 지구를 움직일 수 없다.
루소와 달리 비트겐슈타인은 신을 언급하지 않았지만, 그도 초월적이고 선험적인 윤리를 주장하였다. 여기서 종교가 윤리에 대해, 인권에 대해 말할 여지가 생겼다. 그럼 과연 종교는 윤리와 인권에 대해 말할 자격이 있을까?
2017년 7월 18일 사우디아라비아 경찰은 클루드(Khulood)라는 여성을 체포하였다. 이 여성은 미니스커트와 배꼽티를 입고 거리를 걷는 5초짜리 영상을 인터넷에 올려 물의를 일으켰기 때문이다. 보수적인 이슬람을 믿는 사우디아라비아는 이를 용납할 수 없었다. 그들의 종교적인 관습에서 여성은 집 밖으로 나갈 때 몸을 가리는 아바야를 입어야 한다. 얼굴도 니캅이란 베일로 눈 외에 모두 가려야 한다. 옷은 검은색이고 몸에 붙지 않는 펑퍼짐한 옷을 입어야 한다. 우리는 보수 이슬람 사회의 반인권적인 모습을 비판한다.
그렇다면 보수적인 기독교는 어떠한가? 우리는 누구보다도 가정 윤리를 중요시하고, 인권을 귀하게 여긴다고 말할지 모른다. 정말일까? 혹시 유스티니아누스처럼 기독교의 윤리를 잘 따르는 사람의 인권만 보호할 가치가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의 인권은 지켜주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닐까? 솔직히 지난 2,000년 동안 기독교는 자유와 인권보다 계명과 의무를 더 강조하였고, 침묵과 복종만을 가르쳤다. 겉으로는 자유, 평등, 박애를 말하지만, 사실은 편협한 증오심을 마구 드러내었다. 십자군 전쟁, 종교재판, 마녀사냥, 인종청소. 독재 권력 뒤에 보수 기독교가 활동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수많은 피를 흘렸다. 기독교 역사와 선교 역사를 살펴보면, 기독교가 성경의 가르침인 사랑과 평화와 얼마나 멀리 떠나 있었는지 알 수 있다.
권력 이데올로기의 시녀 역할을 계속하는 한 종교는 이 세상에 아무런 할 말이 없다. 기독교가 이 사회에서 공공성을 확보하고 제대로 된 리더십을 발휘하려면 이제 이 상황을 떠나서 순전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바라보아야 한다. 루소나 비트겐슈타인의 충고가 아니라도 이는 그리스도인이 마땅히 해야 할 바다.
창세기 첫 장에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으며, 그 누구에게도 양도할 수 없는 존엄한 인권을 가지고 있다고 선언한다. 당시 이집트의 파라오만 하나님의 형상이라 하고, 인권은 오직 왕 자신만 가지고 있음을 주장하던 시대였다. 그때 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의 노예들이었다. 아무것도 없는 그들, 사회에서 멸시와 천대를 받고 외면받던 그들에게 너희가 하나님의 형상이다. 너희는 인간으로서 존엄한 권리를 가지고 있다. 말로만 인권이 아니라 존엄한 삶을 살 수 있는 실질적인 권리를 주려고 그들에게 땅을 골고루 분배하여 주었다. 먹을 것이 없어 굶주려 죽어가는 사람이 없도록 아주 세세하게 법조문을 만들고 인권의 사각지대에서 피해 보는 사람이 없도록 하였다. 조금이라도 열린 눈으로 성경을 보면, 성경의 가르침은 오늘 이 시대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말씀으로 가득 차 있다.
기독교가 이 사회에서 인정받고 할 말을 제대로 하려면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 기득권의 눈으로 보지 말고, 권력 이데올로기의 눈으로 보지 말고, 순수한 눈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야 한다. 성경은 기독교의 공공성을 확립하는 귀중한 말씀으로 가득하다.
참 로버트 잭슨은 어떤 답을 찾았을까? 그는 나치 전범을 심판하기 위하여 국제법에서 끌어오기도 하지만 동시에 인류 문명에서 법의 기본 원칙을 찾았다.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가 재판하려고 하는 만행은 너무나 노회하고, 사악하고 또 파괴적인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인류 문명이 도저히 그대로 방치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승리를 이룩하고, 그동안 자행된 불의에 분노를 금치 못한 승전국들은 복수하려는 것이 아니라, 붙잡힌 적들을 법의 심판에 맡기려는 것입니다.”
인류가 지금까지 발전시켜온 문명으로 심판하자는 말은 논리적 근거가 매우 빈약하다. 법 실증주의자의 한계는 어쩔 수 없다.
위의 글은 존 워윅 몽고메리가 쓴 "왜 인권은 종교 없이는 불가능한가?"라는 글에 힘입은 바 크다. (세상이 묻고 진리가 답하다. 달라스 윌라드 편집, IVP, 2011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