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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gos Brunch Jul 31. 2017

일하시는 하나님, 일하는 인간

기독교의 공공성

1. 일하고 싶어요.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2000년 이후 청년 실업률이 또 최고치를 경신하여 10.5%가 되었다. 매년 대학 졸업생이 47만 명인데, 이미 취업을 준비하는 취업 재수생이 50만 명이 있다. 입사원서를 낸 100명 중 합격은 겨우 4명이라고 한다. 청년은 일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현실은 너무나 냉혹하다. 한 취업사이트에서 조사한 바에 따르면, 대학생이 아르바이트하는 이유 1위가 생계비이고 2위가 학자금 마련이다. 

2. 쉬고 싶어요!

취업을 하면 행복할까? 요즘 탈북자들이 다시 북한으로 돌아간다는 소식을 심심찮게 듣는다. 북한을 탈출할 때는 한국에 가면 행복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한국의 노동 강도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강하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는다. 밤낮 쉬지 않고 일하지만, 삶이 나아질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이럴 바에는 차라리 다시 북한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하는 탈북자가 있다고 한다. 천국인 줄 알고 왔는데 지내면서 보니 천국이 아니라 노동 지옥이더라는 말이다. 

입시 경쟁, 취업 경쟁, 승진 경쟁, 연봉 경쟁, 밀려나지 않고 살아남기 위하여 끝없는 경쟁이 이어진다. 과거에는 승패의 차이가 그리 크지 않았다. 그러나 이젠 승자 독식 사회가 되었다. 2등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 1등만이 모든 영광과 부를 다 가져가는 이 사회는 마치 도박판과 같다. 딱 한 걸음 차이인데, 자신과 크게 다르지 않은 사람인데 1등에게 모든 것을 몰아주는 이 사회에서 2등, 3등은 살아가기 너무 힘들다. 시험점수 몇 점 차이로 대기업에 들어간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차이는 심각하다. 소수 고소득층의 소득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가는 데 반해 빈곤층은 그 수가 날마다 늘어간다. 


유토피아를 쓴 토머스 모어(Thomas More, 1478~1535)는 말하였다. 

“경제의 중요 목적은 사람들에게 마음을 풍성하게 할 수 있도록, 고역으로부터 자유로운 시간을 주는 것이며, 사람들은 이것이야말로 행복한 삶의 비결로 간주한다.”

토마스 모어가 생각한 유토피아는 고통스러운 노동에서 해방되어 자유로운 시간을 가지는 곳이다. 그는 노동을 고역이라고 생각했다. 편안한 쉼이 있는 곳이 유토피아다. 누구는 노동하고 싶어 하는 데, 누구는 마음 편히 쉬고 싶어 한다. 


3. 성경에서 말하는 노동

성경은 이런 갈등 속에 있는 사람에게 무어라 답할까?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 하시니라.” (창2:2) 

하나님은 일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창조하실 때뿐 아니라 지금도 밤낮으로 쉬지 않고 일하신다. 그분은 언제든지 우리를 살피시며, 이 땅을 다스리고 계신다. 


일하시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할 때 어떤 생각을 가지셨을까? 하나님이 계획한 인간의 모습을 창세기1:26에서 이렇게 묘사한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창1:26) 

하나님은 자신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역할을 사람과 함께 공유하기를 원하셨다. 함께 창조 사역에 동참할 자를 만드셨다. 단순히 다스림만이 아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창2:5-6)

하나님은 사람이 땅을 갈고 노동할 것을 기대하셨다. 에덴은 먹을 것이 풍성한 곳이다. 굳이 힘들게 노동하지 않아도 편히 살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이 에덴에서도 땅을 갈고 노동하기를 기대하셨다. 


유대교는 지금도 토요일 만찬 때 노동의 가치를 찬양한다. 그들은 시편 말씀을 펴서 둘러앉은 모든 사람에게 낭송하여 준다. 

“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니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시128:2) 

유대인이 생각하는 복, 유대인이 생각하는 천국은 노동하는 곳이다. 자기 손으로 농사짓고 수고한 것을 먹는 곳이 천국이고 그 사람이 복되고 형통한 사람이다. 노동은 그만큼 신성하다. 


4. 인간의 타락과 노동의 왜곡

문제는 인간이 타락함으로 노동의 왜곡이 생겨났다.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창3:17-19)

많은 사람은 이 말씀을 읽으면서 사람이 저주를 받아 노동하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면 노동은 저주의 결과가 아니다. 타락하기 전 하나님은 아담에게 땅을 경작할 것을 기대하였다. 땅을 경작하면 얼굴에 땀이 흐르기 마련이다. 창세기 본문을 잘 살펴보면, 저주는 노동이 아니라 땅이 받는다. 사람이 일할 터전(땅, 사회, 경제체제 등)이 저주를 받았다. 이제 사람이 일할 곳은 결코 에덴과 같이 녹녹한 곳이 아니다. 거기는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나올 것이다. 성경은 노동을 멸시하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5. 그리스와 로마에서의 노동 개념 

그리스어로 노동은 Ponos(Πόνος = toil/labour)인데 거기에 담고 있는 뜻은 슬픔이다. 플라톤과 같은 그리스 철학자들은 말하길 노동은 노예들이 하는 것이며 자유인(시민)은 예술이나 스포츠를 즐기고 국가 수호를 위한 전쟁에 나갈 의무가 있다. 지도자는 철학과 통치를 담당한다. 그리스뿐만 아니라 로마도 노동은 노예들이 하였다. 


6. 기독교 안에 잘못된 노동 개념

어거스틴을 비롯하여 중세 신학자들 역시 노동을 저주로 인식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은 거룩하다고 생각하여 성직이라고 하였다. 반면에 생계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은 이류 그리스도인이고 하찮은 존재로 여겼다. 중세 수도원에서 노동은 기도라고 가르치긴 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수도원 안에서의 노동에만 국한하였다. 속세에 나가 먹고살기 위하여 노동하는 것은 속되고 더럽다고 생각하였다. 


2017년 법정 공휴일은 주일을 포함하여 68일이다. 중세 법정 공휴일은 얼마였을까? 나라마다 달랐지만 제일 적은 나라가 150일이었고, 어떤 나라는 270일인 나라도 있었다. 법정 공휴일이 270일이면 얼마나 좋았을까?

모든 사람이 다 쉬었을까? 아니다. 노예들과 소작농들은 단 하루도 쉬지 못했다. 그들이 피땀 흘려 노동하여 생산하므로 귀족들은 놀고먹을 수 있었다. 마치 조선 시대 양반과 비슷하였다. 양반은 집에 불이 나도 팔자걸음으로 천천히 걸었다. 양반 체통이 있는데 경망스럽게 뛸 수 없었다. 노동은 멸시와 천대를 받았으며 사회 하층이 담당하였다. 연구에 의하면 조선 시대 양반이 10%였고, 90%는 평민이었다. 90%가 일하여서 10%를 먹여 살렸는데 부의 불균형은 참혹할 정도였다. 


7. 노동의 가치를 일깨운 종교개혁자들

노동의 가치를 일깨운 사람이 종교개혁자들이었다. 마틴 루터는 직업 소명론을 주장하면서, 하나님께서 교회나 수도원에서 일하는 성직자만 부르신 것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사람을 각기 맡겨진 일에 부르셨다. 그러므로 세속의 일처럼 보이는 것들이 사실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며, 그분을 너무나 기쁘시게 하는 순종이라고 말하였다. 영국의 종교개혁자 휴 라티머(Hugh Latimer, 1485~1555)는 이런 말을 하였다. 

“우리를 구원하신 그리스도는 목수이셨으며, 나아가 고된 노동으로 생계를 꾸려가신 분이었다. 따라서 그 누구도 평범한 소명과 직업을 갖고 그분을 따르는 것을 하찮게 여겨서는 안 된다. 스스로 인간의 모습을 취하심으로써 우리의 인간됨에 복을 베푸셨던 것처럼, 당신의 노동을 통해 모든 직업과 기술들에 복을 베푸셨기 때문이다.”


8. 자본주의와 노동

종교 개혁자들이 노동의 가치를 일깨우고 가르쳤지만, 세상은 그 사상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르네상스가 시작되면서 사회는 빠르게 변하였다. 돈이 힘을 발휘하는 시대가 열렸다. 이탈리아의 메디치가, 독일의 푸거가 등은 막강한 재력을 바탕으로 교황 선출에 영향을 미쳤다. 카를 5세가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될 때 독일의 푸거는 뒷돈을 대주었다. 권력과 자본가의 야합은 가진 자들만이 잘 먹고 잘사는 사회를 만들었다. 가난하고 천대받는 하층민들을 향한 배려는 눈곱만큼도 없었다. 자본주의는 그렇게 출발부터 부패하였다.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이란 책을 쓴 막스 베버(Max Weber, 1864~1920)는 이를 두고 협잡 자본주의라고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그는 자본주의도 이제 윤리를 갖추어야 한다. 개인만 노동 윤리, 직업윤리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기업도 자본도 윤리를 갖추어야 한다. 


지난 7월 27일 문재인 대통령은 주요 기업인을 청와대로 초청하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특이한 점은 재벌 순위 50위권 밖에 있는 오뚜기 기업을 초청하였다. 오뚜기 기업은 스토리가 있다. 2016년 9월 작고한 함태호 명예회장은 1,800명의 마트 시식사원을 차례대로 정규직으로 채용하라고 지시했다. 회사는 ‘사람을 비정규직으로 쓰지 말라’라는 방침을 충실히 이행하였다. 오뚜기는 지난 3월 말 기준 전체 직원 3,099명 가운데 기간제 근로자는 36명으로 비정규직 비중이 1.16%다. 오뚜기는 경영 승계과정도 바르게 실천하여 1,500억 원의 상속세를 정직하게 냈다. 그리고 라면값을 9년째 올리지 않아서 인터넷에서는 갓뚜기부르기도 한다. 


상속세 정직하게 내고, 직원을 모두 정규직으로 쓰고, 제품값을 올리지 않아도 기업하는 데 어려움이 별로 없다. 흔히 기업 하는 사람들이 말하길 비정규직 써야 하고, 세금 감면 혜택을 다 받아도 기업을 경영하기 어렵다고 엄살을 떠는데 이는 거짓이다. 


파리경제대학 교수인 토마 피케티(Thomas Piketty, 1971~)는 ‘불평등 경제’, ‘21세기 자본’이란 책을 썼다. 그는 지난 300년간의 경제 통계를 분석해 보았다. 제1, 2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특수한 시기를 제외하고 언제나 자본수익률(돈이 돈을 버는 속도)이 경제성장률(사람이 일해서 돈을 버는 속도)을 앞섰다. 그러므로 자본에 대한 일정한 통제 없이 경제 정의와 공평은 실현될 수 없다. 그는 두 가지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하는데, 누진적 소득세율의 인상과 글로벌 자본세의 도입이다. 그는 최고 세율로 80%를 주장하였다. 기업이 80%의 세금을 내도 기업을 경영하는 데 아무런 무리가 없다는 주장이다. 아무런 힘없는 개인에게는 월급에서 원천 징수하면서, 기업에는 온갖 세금 감면 혜택을 주고, 기업 환경을 좋게 만들기 위하여 별의별 혜택을 준다. 


코스피 상장사들의 2016년 당기 순이익이 사상 최초로 100조 원을 넘어설 전망이다. 순이익 100조 원 달성의 일등공신은 대장주 삼성전자로서 22조 7261억 원이고, 이어 한국전력(7조1483억 원), 현대차(5조7197억 원), 현대모비스(3조473억 원), SK하이닉스(2조9605억 원), 신한지주(2조8249억 원), SK(2조8044억 원), 기아차(2조7546억 원), KB금융(2조1902억 원) 순으로 당기순이익을 많이 벌어들였다. 토마 피케티는 개인에게 세금을 걷는 것보다 초대기업에 세금을 확실히 걷는다면, 경제 불평등 문제는 해소될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사실 이러한 정책은 실현 불가능하다. 재벌들의 조세 저항을 이겨낼 수 없기 때문이다. 토마 피케티는 막스 베버가 말한 바대로 기업이 윤리를 가지고 자발적으로 이 사회를 위하여, 분배 사각지대에 있는 사람을 위하여 사용하기를 기대한다. 기대한 대로 될지는 미지수지만, 깨끗한 정치와 바른 시민 사회의 압력이 있으면 어느 정도는 가능할 수도 있다. 


9. 기독교와 노동

그렇다면 기독교는 노동의 문제에 어떻게 접근해야 할까? 무엇보다 노동의 가치를 인정해야 한다. 노동은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 동참하는 것이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다. 노동은 개인적으로 볼 때는 자기 가치를 인정받는 일이며 자아실현의 수단이다. 노동은 인간이 사회 속에 결속되는 방식으로 노동을 통해 서로 의존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일하고 싶어도 일자리가 없어서 고통받는 사람이 우리 주변에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교회는 그 사람들을 외면하거나 조롱하지 말고 오히려 그 사람들을 보살펴주어야 한다. 제삼세계에 나가 선교하거나, 모슬렘 권에서 선교할 때 선교사는 영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경제적인 문제까지도 신경쓴다. 한국 교회도 지금까지 영적인 문제만 집중했다면, 이제 선교적 마음가짐으로 교인들의 경제적 문제까지 배려해야 한다. 교회는 예배드리는 공간으로 일주일에 한 번만 쓸 것이 아니라, 기독교 센터가 되어 창업 컨설팅 제공, 협동조합, 각종 봉사활동, 직업 훈련 강좌 등 다양한 교육을 제공해 줄 수 있다. 성경이 말하는 바대로 교회는 노동의 가치를 깨닫고 가르칠 뿐만 아니라 방향까지도 제시하여야 한다. 이는 현대 교회의 큰 숙제 거리다. 


기독교의 공공성

1. 하나님의 고통

2. 내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3. 감정이입

4. 아름다움과 추함

5. 인권과 기독교

6. 치마입은 게 죄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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