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모스
하나님께서 세우신 이스라엘 나라는 매우 독특한 법을 가지고 있다. 그 법은 모든 사람이 누려야 할 행복권을 전제한다. 이스라엘이 불가피하게 전쟁을 할 때가 있다. 이스라엘이 전쟁한다면, 그것은 영토를 넓히기 위한 제국주의 사상 때문이 아니라 백성의 행복권을 유지하거나 얻기 위해서다. 그런데 전쟁터에 나가서 백성이 죽으면, 그 행복권은 무너지고, 전쟁의 목적도 무색해진다. 1)
따라서 신명기는 전쟁에 참여할 군인을 징집할 때 몇 가지 규칙을 세웠다. (신20:1-9)
집을 짓고 준공식을 하지 못한 사람은 집으로 돌려보내라. 사람이 심혈을 기울여 집을 지었는데 살아보지도 못하고 전쟁터에서 죽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포도원을 만들어 놓고 그 열매를 맛보지 못한 사람도 돌려보내라. 포도밭을 만들고 첫 수확의 기쁨도 누리지 못한 농부는 행복권이 침해되기 때문이다.
약혼은 했지만 결혼식을 아직 하지 못한 사람도 집으로 돌려보내라. 신방을 차리고 알콩달콩 행복을 누릴 권한이 있기 때문이다.
전쟁에 대해 주체할 수 없는 두려움이 있는 사람도 돌려보내라.
지금 상식으로 생각해도 맞지 않는 것 같지만, 이것이 바로 성경의 법이다. 전쟁에 관한 법, 농사에 관한 법, 경제에 관한 법 모든 법의 기본은 백성의 행복권을 보장하는 데 있다.
그러나 아무리 훌륭한 법이 있으면 무엇하랴! 법을 집행하는 권력자가 하나님의 법을 외면하면, 죽은 법이 된다. 고대나 중세 시대 백성은 권력자의 횡포 앞에 체념하거나 순응하는 길 외에는 없다. 조금이라도 반항하면 죽음을 각오해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은 가난하고 힘없는 백성을 위하여 선지자를 세웠다. 선지자는 생명을 걸고 백성의 변호자가 되어 하나님의 법을 제대로 지키라고 소리쳤다. 때로 무자비한 폭군에게 죽을 수 있지만, 선지자는 하나님이 주신 사명 때문에 외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다. 하나님께서 그 심령 속에 불을 붙여 주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외침은 간단하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법을 지켜야 한다.”
선지자는 왕이나 제사장과 달리 세습직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때에 따라 부르셔서 세우는 사람이 선지자다. 아모스는 자신을 이렇게 소개하였다. “나는 선지자가 아니며 선지자의 아들도 아니라. 나는 목자요 뽕나무를 재배하는 자다.”(암7:14) 그는 특별한 사람이 아니었다. 아무것도 내세울 것이 없는 평범한 사람이었다. 약 2300년 후 독일의 마틴 루터는 ‘만인 제사장’을 주장하였다. 구약의 아모스는 종교개혁자라 불러도 하등 이상할 것이 없는 사람이다.
아모스는 여로보암 2세가 다스리던 시대에 활동하였다. 그때는 이스라엘의 황금기였다. 오랫동안 북이스라엘을 괴롭히던 앗수르, 시리아, 이집트는 각각 국내 문제로 골머리를 앓느라 세력이 약해졌다. 여로보암 2세는 주변 국가들이 약해진 틈을 타서 국경을 확장하고 상업을 발전시키며 부를 쌓았다. 부자들은 비싼 상아로 장식한 여름 별장과 겨울 별장을 갖고 있었다. 비단 베개가 있는 화려한 침대 위에서 음탕한 향연을 벌였다. 그들은 아름다운 포도원을 가꾸었고 값진 향유를 몸에 발랐다. 반면 나라 안에 정의는 사라졌다. 가난한 자들은 시달림을 당하고 착취를 당하고 그러다 종으로 팔려갔다. 재판관은 뇌물을 받고 판결을 엉터리로 하였다.2)
돌무화과나무를 가꾸던 농부 아모스는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았다. 가슴이 뜨거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나 여호와가 선고한다.
이스라엘이 지은 죄, 그 쌓이고 쌓인 죄 때문에 나는 이스라엘을 벌하고야 말리라.
죄 없는 사람을 빚돈에 종으로 팔아넘기고, 미투리 한 켤레 값에 가난한 사람을 팔아넘긴 죄 때문이다.
너희는 힘없는 자의 머리를 땅에다 짓이기고 가뜩이나 기를 못 펴는 사람을 길에서 밀쳐낸다.
저당물로 잡은 겉옷을 제단들 옆에 펴놓고 그 위에 뒹굴며, 벌금으로 받은 술을 저희의 신당에서 마신다."(암2:6-8 공동번역)
“가난한 자를 삼키며 땅의 힘없는 자를 망하게 하려는 자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가 이르기를 월삭이 언제 지나서 우리가 곡식을 팔며 안식일이 언제 지나서 우리가 밀을 내게 할꼬?
에바를 작게 하고 세겔을 크게 하여 거짓 저울로 속이며 은으로 힘없는 자를 사며 신 한 켤레로 가난한 자를 사며 찌꺼기 밀을 팔자 하는도다.
여호와께서 야곱의 영광을 두고 맹세하시되 내가 그들의 모든 행위를 절대로 잊지 아니하리라."(암8:4-7)
그런데 심각한 문제는 이런 폭력을 휘두르고, 가난한 자를 압제하며, 힘없는 사람의 눈에서 피눈물을 흘리게 하는 사람들이 신앙생활은 정말 열심히 하더라는 것이다. 아모스가 열을 받는 이유다. 불신자들이 권력자와 부자의 편에 서 있다면,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신앙인들이 그들 편에 서서 그들의 대변자가 되고, 그들의 기득권을 보호하기 위하여 성경 말씀을 오용하였다.
아모스는 그러한 신앙인들의 가증스러운 모습을 사정없이 공격하였다.
“내가 너희 절기들을 미워하여 멸시하며 너희 성회들을 기뻐하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내게 번제나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받지 아니할 것이요
너희의 살진 희생의 화목제도 내가 돌아보지 아니하리라.
네 노랫소리를 내 앞에서 그칠지어다 네 비파 소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암5:21-23)
권세자들과 부자들은 예배당으로 몰려가 헌금을 바치고선 하나님께서 계속하여 복주실 것이라 믿었다. 그들은 모세의 율법을 정확하게 지키려고 노력하였다. 율법이 명한 대로 매일 아침 희생 제물을 가져왔다. 삼 년마다 십일조를 드렸으며 누룩 넣은 것으로 낙헌제를 드렸다. (암4:4-5) 그들은 율법이 정한 세세한 규정을 다 지켜 예배를 드렸으므로 당연히 복 받을 것으로 생각하였다. 헌금 받는 제사장은 기꺼이 그들에게 복을 빌어주었다. 그들 모두는 성전에서 기뻐 찬양을 불렀다. 아마도 돈이 많았으니 성가대 규모도 엄청났을 것이다.
하나님은 아모스를 통하여 이렇게 선언하셨다.
“절기가 애통으로 변할 날이 올 것이요
모든 노래가 애곡으로 변하고 그 슬픔이 독자의 죽음보다 더하고
그 결국은 심히 곤고한 날들이 될 것이다.”(암8:9,10)
아모스는 심판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이는 그들이 여호와의 율법을 멸시하며 그 율례를 지키지 않은 죄 때문이다."(암2:4)
하나님은 심판만 선고하시는 것이 아니라 해법도 제시하신다.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암5:24)
하나님께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분명하다. 이스라엘을 세울 때 주신 신명기 정신을 따라 모든 백성이 행복하게 살도록 하라. 특별히 가난하고 힘없는 백성의 행복권을 보장하라. 이스라엘은 재판제도로 공의(mishpat)를 세우고, 도덕적인 규례로서 모든 백성을 공평하게 잘 살 수 있도록 경제 정의, 분배 정의(tzedakah)를 이루어야 한다. 하나님의 일차적인 관심은 예배나 제사 같은 종교적인 행위보다, 정의와 공의를 바로 세우는 세속적 행위에 있다. 제사법이 윤리법보다 앞서지 못한다. ‘윤리적 삶’이 ‘종교적 의식’보다 우선이다. 이는 예배를 윤리적 삶으로 대신하라는 말씀은 아니다. 아모스가 문제 삼는 것은 ‘예배’가 아니라 ‘예배자’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예배자의 삶이다.”3)
본회퍼는 종교와 윤리의 관계를 우열의 관계로 보지 않고 대등한 관계로 보았다. 그리스도인의 삶이 그저 신앙의 차원, 종교의 영역에만 머문다면, 그리스도의 죽음을 헛되게 만드는 것이다. 종교와 윤리의 관계는 윤리가 종교를 향함이 아니라, 종교가 윤리의 세계로 나갈 때 비로소 그 의미와 목표를 이룰 수 있다. 4) 윤리의식을 잃어버린 그리스도인은 마치 맛 잃은 소금과 같다. 세상이 썩어 돌아가는데 맛 잃은 소금은 길가에 밟힐 뿐이다. 아모스 시대 기득권층은 아모스에게 입을 다물라고 명령하였다. (암2:12) 최후의 레지스탕스이며 유엔 인권위원회 프랑스 대표를 지낸 스테판 에셀(Stephane Hessel, 1917~2013)은 이런 말을 했다.
“최악의 태도는 무관심이다. ‘내가 뭘 어떻게 할 수 있겠어? 내 앞가림이나 잘할 수밖에…….’ 이런 식으로 말하는 태도다.”
하나님의 가장 큰 관심은 신앙인이 정의와 공의를 바로 세우는 것이다. 아모스는 자기 백성에 대해 무한한 연민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만드시고자 했던 하나님 나라가 이스라엘에서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소망하였다. 그가 신앙인들에게 강력하게 권면한 이유는 그들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정말 하나님을 찾기를 원한다면, 제발 이 땅에서 선을 찾으라. 공의와 정의를 바로 세우라. 이스라엘에 약한 자들이 억울한 눈물 흘리는 일이 없게 만들라고 아모스는 외쳤다.
“나 여호와가 이스라엘 가문에게 선고한다.
살고 싶으냐?
나를 찾아라 …
살고 싶으냐?
악을 버리고 선을 찾아라…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여라.
성문 앞에서 정의를 세워라." (암5:4,14,15)
독일 히틀러 치하에서 강력한 저항 운동을 했던 마틴 니묄러(Martin Niemöller, 1892~1984)는 <그들이 왔다>라는 시를 썼다.
처음에 그들은 공산주의자를 잡으러 왔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으니까.
그들은 유대인을 잡으러 왔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유대인이 아니었으니까.
그들은 노동조합원을 잡으러 왔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으니까.
그들은 가톨릭 신자를 잡으러 왔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개신교 신자였으니까.
그들은 나를 잡으러 왔다.
그런데 이제 말해줄 사람은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1. 엑스포지멘터리 신명기 / 송병현 지음 / EM / 2014년 / 439쪽 이하
2. 예언자들 상 / 아브라함 요수아 헤셀 지음 / 이현주 옮김 / 종로서적 / 1987년 / 39쪽
3. 오직 정의를 물같이 : “공동체 의식(미쉬파트)의 영성” / 차준희 씀 / 목회와 신학 2013년 3월호 / 두란노 / 197쪽
4. 기독교 윤리 / 디이트리히 본회퍼 지음 / 손규태 옮김 / 대한기독교서회 / 1990년 / 279-28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