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의 공공성
미니스커트를 입고 거리를 활보한 죄로 체포되었던 클루드(Khulood)라는 여성이 석방되었다. 엄격한 보수주의 이슬람 국가인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매우 예외적인 결정이다. 그것도 체포 당일 바로 석방했다. 5초짜리 동영상이 외국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되면서 국제적인 관심을 받자 처벌에 부담을 느꼈던 것으로 보인다. 이슬람 국가 중에서도 가장 보수적인 사우디아라비아가 이번 사건으로 여성 정책을 어떻게 바꿀지 주목된다.
2012년 와즈다(Wadjda)란 영화를 개봉하였다. 와즈다는 자전거를 타고 싶어 하는 10살짜리 사우디아라비아 소녀다. 여성들은 외출 시, 몸과 얼굴 노출이 금지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운전, 여행 등 기본적인 권리조차 금지되고 있다. 영화를 만든 감독은 사우디아라비아 최초의 여성 감독인 하이파 알 만수르(Haifaa Al Mansour, 1974~)다. 그녀는 살해위협을 받으면서 영화를 제작하였다. 밖에 나올 수 없어서 제작 차량 안에서 워키토키로 지시하며 촬영하였다. 이 영화는 2012년 베니스 국제영화제 3관왕 등 세계 유수 영화제 20개 부문을 석권하였다. 사우디아라비아 여성은 체포 위험을 무릅쓰고, 혹은 목숨의 위협을 감수하며 여성 인권을 확보하기 위하여 몸부림을 치고 있다.
놀랍게도 여성 차별은 사우디아라비아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자유 민주주의 산실이라고 자부하는 미국 의회에서도 여성의 옷차림을 둘러싼 파문이 있었다. 2017년 7월 6일 민소매 차림이라는 이유로 CBS 뉴스 여기자가 폴 라이언 하원의장실 출입을 거부당하였다. 해당 기자는 임시방편으로 공책을 찢어 어깨를 가렸음에도 출입은 허용되지 않았다. 의회에 출입하는 사람은 비즈니스에 적합한 차림새를 갖출 것을 의회 복장 규정에 명시하였다. 그러나 민소매를 금지하는 조항이 별도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이는 명백히 여성차별이다. 7월 12일 마르타 E. 맥샐리 공화당 의원은 민소매 차림으로 연단에 서서 “나는 지금 민소매 옷을 입고 오픈토(발가락이 드러나는 신발)를 신었다. 이것은 전문적인 복장임을 강조하고 싶다.”라고 꼬집었다. 7월 14일 미국 여성 하원의원 20명이 항의 차원에서 미국 의사당 앞에서 민소매 차림으로 단체 사진을 촬영하였다.
2017년 7월 16일 미국 여자프로골프투어(LPGA)는 보수적으로 개정한 복장 규정을 선수들에게 전하였다. 새 규정은 신체 노출을 줄이고 격식 있는 복장을 갖추도록 하였다. 가슴이 깊이 파인 상의 착용은 금지하고, 레깅스는 치마바지 또는 반바지에 받쳐 입을 경우만 허용하였다. 만일 이 규정을 위반할 경우 벌금 1,000달러를 부과한다. 이는 여성 선수의 자율권을 침해하는 시대착오적 결정이다.
보수적인 이슬람 국가뿐만 아니라 민주국가인 미국에서도 여성차별은 여전하다. 기독교도 예외는 아니다. 초대교회 교부 중 여성은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사실을 부인한 사람이 한 둘이 아니었다. 암브로지애스터(Ambrogiester)는 “여자가 하나님의 형상이라니?”라고 했으며 다소의 디오도레(Diodore)는 “여자가 하나님의 형상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라고 했다. 교부 터툴리안(Tertullian)은 여자를 향해서 “너희는 마귀의 출입문이요 금단의 열매를 딴 자들이다. 하나님의 법을 먼저 떠난 자들이다. 마귀가 싸울 수 없는 자를 속여 설득한 자이다. 하나님의 형상 즉 남자를 너무나 쉽게 부수어 버렸다. 너의 타락으로 죽음이 오고 하나님의 아들도 죽어야 했다”라고 하였다.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4~1274)는 여성을 ‘서출로 태어난 남성’쯤으로 간주했다. 종교개혁자들은 교회에서 여성의 지위를 변화시키려는 아무런 시도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칼빈(John Calvin, 1509~1564)은 창세기 1:26 주석에서 “여자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다”라고 하지만 바로 이어 ‘열등한’ 이란 사족을 달았다. 칼 바르트(Karl Barth, 1886~1968)조차 자연과 은혜의 언약 안에서 여성은 남성보다 열등한 존재로 간주했다고 주장하였다.
그럼 하나님은 어떻게 생각하셨을까? 인간의 관습이나 전통에 사로잡힌 편협한 생각 말고 하나님의 생각은 어떠하였을까? 순수한 하나님의 생각은 창세기 1, 2장에 잘 나타나 있다. 창세기 1, 2장은 하나님께서 처음 설계하신 도면과 같다. 비록 그 계획이 타락으로 왜곡되고 변질되었지만, 하나님은 원래 계획을 반드시 이루실 분이시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창1:26-28)
창세기 본문은 명백히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셨다고 기록하였다. 다른 피조물과 달리 사람만이 남자와 여자를 동일하게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었다. 후일 암브로지애스터나 디오도레 같은 사람이 남자만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주장할까 봐 여자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음을 콕 집어 기록하였다. 물론 여자보다 남자를 먼저 쓰긴 했지만, 이는 남성과 여성이란 양성으로 창조하였음을 뜻하는 것이지 어떤 성적 구별이나 존재론적 차별은 없다.
하나님은 남자에게만 복과 사명을 주신 것이 아니라 남녀 모두에게 같은 권한과 책임을 부여하셨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남녀 모두에게) 복을 주셨고, 그들에게(남녀 모두에게) 사명을 주시기를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명령하셨다. 이 명령은 남성에게만 주신 명령이 아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창2:18)
여기 돕는 배필이란 단어는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단어 중 하나다. 영어 성경은 이 용어를 돕는 자(a helper)로 번역하였다. 일반적으로 helper란 종속된 자, 내조자로 이해하였다. 제삼 세계에서는 집안일을 도와주는 여성을 helper라고 흔히 부른다.
그러면 히브리 원문은 어떤 뜻이 있는가? 본문의 원문은 ‘에제르 케네게도’(וֹדגנכ רזע, 'ezer kenegnedo)인데 이는 ‘그에게 일치하는 조력자’(a helper corresponding to him)로 번역할 수 있다. 여기서 히브리어 전치사 ‘네게드’(דגנ)는 주로 “앞에 있다.”(in front of) 혹은 “마주 보다.”(in sight of opposite to)라는 개념으로 사용한다. 구약 어디에서도 “아래에 있다.”는 개념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돕는 배필이란 단어는 ‘그에게 일치하는 조력자’, ‘그에게 상응하는 조력자’란 뜻이다.
히브리어의 돕는 자(‘ezer)는 조수나 섬기는 사람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돕는 자(‘ezer)는 구원하는 자, 강하게 하는 자로 해석해야 한다. 이 단어는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관계를 언급할 때 주로 사용한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군사적인 도움을 줄때 사용하였다. (대하26:7, 25:8) 전쟁이 일어나면 이스라엘 왕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하였다. (대상12:18) 시편에서도 하나님의 도우심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시30:10, 46:5, 54:4, 79:9, 89:19, 118:7) 그러므로 여자가 남자의 돕는 자란 의미는 낮은 자나 열등한 자로서 섬기고 봉사하는 의미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도우심과 같이 없어서는 안 될 도움으로 해석해야 한다. 그러므로 여자와 남자는 서로 다르지만 동등하며, 부족하거나 열등한 것이 아니라, 남자는 여자와 더불어 상호 보충적 관계에서 서로 도우며 살아가도록 창조되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창2:21-23)
성경 해석가 대부분은 여자가 남자에게서 나왔기(הקל, 취하다) 때문에 여자는 남자에게 종속되는 것이 옳다고 한다. 그런 논리라면 사람이 흙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사람이 흙보다 열등하거나 종속된다고 하여야 할 것이다. 이런 해석은 바른 해석이라 할 수 없다. 카일 델리취(Keil-Delitzsch)에 의하면 여자를 흙으로 만들지 않고 남자의 갈비뼈로 만들었다는 것은 주종(主從)의 의미를 떠나 남자와 불가분의 관계성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이 관계는 결혼이라는 도덕적 관계의 기초가 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사상은 하와를 만든 후 이를 기뻐하며 불렀던 아담의 노래에서도 찾을 수 있다. 아담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한 것은 연대성과 친밀성에 대한 최상급 표현이다. 하와가 아담의 갈비뼈에서 나왔다고 하면 아담은 흙으로부터 왔다. 이는 둘 다 하나님의 주권 아래 하나님의 솜씨로 만들어진 동등한 인격임을 의미한다.
인간의 타락을 기록한 창세기 3장은 여자를 왜곡하는 구절 중 하나다. 일반적으로 여자는 남자보다 유혹도 빨리 받고, 죄도 먼저 짓고, 남자를 죄짓게 했던 존재로 이해한다. 여자가 뱀에게 유혹받을 때 남자는 그 자리에 없던 것으로 설명하지만, 본문을 자세히 검토하면 사실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뱀과 여자의 대화를 살펴보자.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뱀이나 여자는 분명하게 복수인 ‘너희’와 ‘우리’를 사용하는 것으로 보아서 여자 혼자만 있었다고 단정할 수 없다. 또한, 6절 후반에 “여자가 그 열매를 따 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를 보더라도 남자와 여자는 뱀에게 유혹을 함께 받았다. 선악과를 먹은 시간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그 자리에 함께 있었으며, 남자는 그 어떤 반대나 의문을 제기하지 않고, 여자가 건네준 대로 실과를 먹은 것으로 추론할 수 있다. 즉 그 자리에 남자가 없었다는 근거는 없다. 그러한 사실은 하나님께서 징계하실 때 남자, 여자, 뱀 모두에게 하며, 여자가 남자보다 더 큰 벌을 받은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알 수 있다.
그러나 타락 후 죄가 들어오면서 남녀 간의 동반자 관계는 깨어졌다. 남자는 자기 책임을 여자에게, 나아가 하나님에게 전가하였다. 남자는 하나님께서 주신 여자 때문에 선악과를 먹게 되었다고 핑계하였다. 창조할 때 만들었던 평등한 인간관계는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남녀 차별은 물론이고, 남자 형제끼리의 갈등구조도 드러난다. 하나님께서 원래 설계하신 인간관계는 차별과 예속의 관계가 아니다. 여성은 남성의 소유물이 아니다.
죄악으로 물든 이 사회는 권력 있는 자, 힘 있는 자 편에서 왜곡된 사회체제를 유지하였다. 그것은 보수 이슬람 사회뿐만 아니라, 현대 민주국가인 미국에서도, 심지어 기독교 안에서도 남녀 불평등 구조를 그대로 드러낸다.
왜곡된 사회체제 아래 사는 우리로서 성경을 잘못 해석하는 일은 어쩔 수 없는 일 같아 보인다. 존 스토트는 여성의 현실을 이렇게 표현하였다. “여성의 은사는 무시되고 개성은 억압되고 자유는 박탈되고 봉사는 어떤 영역에서 착취되고 또 다른 영역에서는 거절되었다.” 남성 중심의 시각을 가졌던 지난 역사 동안 기독교는 남성에 의한 여성의 종속과 피지배를 강요하였다. 구약 사회에서는 출산한 여성이나 월경 중 여성은 부정하다 말하였고, 신약 사회에서는 여성은 교회 안에서 말도 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쳤다. 교부들은 여성을 불완전하며 하나님의 형상이 아니라고 가르쳤고, 종교개혁자들까지 그런 관점을 버리지 못하였다. 이런 시각으로 해석하는 설교를 듣는 여성 신학자의 고민은 크다. 여성 신학자 류더(R.r. Ruether, 1936~)는 말하기를 “한 사람이 페미니스트가 되면 될수록 교회에 나가기가 점점 더 어려워진다.”라고 하였다. 그만큼 교회 안의 성서 해석이 남성 위주로 되고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그는 주장하기를 “성경을 여성 신학적 관점에서 읽어보면, 성경적 신앙 안에서 하나의 규범을 찾을 수 있다.” 라고 하였다. 그녀가 주장하는 규범은 선지자적 해방의 전통으로써 지배와 복종의 패턴에 오염되지 않은 완전히 평등적이고 비 계층적인 사회를 이루는 것이다. 이는 에덴에서 보여준 하나님의 비전으로서 하나님 나라 완성이다.
이러한 노력은 좌편향적이 아니라 균형감각을 갖춘 여성 사역자가 감당하여야 한다. 따라서 이 땅에 훌륭한 여성 신학자, 성경 주해자, 교사, 설교자가 나와야 한다. 드보라 같은 여 사사, 홀다 같은 여 선지자, 에스더 같은 여성 지도자가 대한민국에도 나오기를 기대한다.
1. 김정우, 구약해석학 논문집 1, (서울 : 총신대학교출판부, 1995)
2. 스탠리 그렌즈, 성 윤리학, 남정우 옮김 (서울 : 살림출판사, 2003)
3. 스탠리 그렌즈, 로저 올슨, 20세기 신학, 신재구 옮김 (서울 : IVP, 1997)
4. 김의환, "교회 내 여성 사역의 제한성과 중요성" ⌜신학지남⌟ 64권 봄호 (1997)
5. 이정효, "성서의 여성관과 참인간화 교육" ⌜기독교교육논총⌟ 1집 (19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