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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gos Brunch Sep 22. 2017

수사학과 설교학의 줄다리기(2)

히틀러, 마틴 부버, 폴 리쾨르

히틀러는 탁월한 연설가였다. 최초 7명의 나치 당원으로 시작하여 1,200만 명으로 확장하기까지 그는 수많은 연설을 하였다. 많은 사람이 그를 비판하고 멸시하지만, 그는 동시대 독일 대중의 절대적 지지를 받았다. 그는 어떻게 연설하였을까? 그의 연설을 살펴보면, 마치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수사학을 직접 배운 듯 설득의 3가지 요소를 효과적으로 사용한다.


그는 무엇보다 대중에게 자신의 도덕성과 독일 민족을 위한 헌신을 강조한다. 그가 폴란드 침공을 선언하면서 독일 국민의 참여를 설득할 때 이렇게 연설했다.

“독일제국의 안전과 그 권리들이 보장될 때까지 그 상대가 누구이건, 나는 속히 이 전쟁을 계속할 것입니다. 그 어느 때보다 이제 나의 모든 삶은 나의 국민의 것입니다. 나는 나에게 있어 가장 신성하고 소중한 군복을 다시 입었습니다. 나는 승리가 확보될 때까지 다시 벗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독일 국민에게만 희생을 요구하지 않고 자신도 군복을 입고 전장에 참여하겠다고 선언하였다. 그는 누구보다도 독일을 위하고 독일 백성을 위한다고 외쳤다. 연설을 듣는 청중은 히틀러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따를 수 있었던 요인이 바로 이것이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첫 번째로 강조한 에토스(도덕과 인격을 통한 신뢰성 확보)를 보여주었다.


그는 신뢰성을 바탕으로 독일 국민의 감정(파토스)을 자극하였다. 그들과 함께 아파하고 그들과 함께 울부짖었다. 그는 마르크스주의자가 자본주의에 대항하여 싸웠던 노동절(5월 1일)을 독일 민족 공동체의 연합을 위한 새로운 국가 공휴일로 정하고 이렇게 연설하였다.

“오월이 왔습니다. 독일가곡에도 나오는 말입니다. 옛날부터 오월의 첫날은 그저 봄이 왔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이날은 기쁨의 날이자 축제의 분위기에 젖은 날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 발전하는 생활과 희망에 찬 즐거움의 이 날을 불화와 내적 투쟁의 날로 완전히 바꾸어 버렸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이 노동 투쟁의 날로 바꾸어 버렸다는 뜻) (…)

하지만 우리 민족이 고통을 심하게 당하고 난 뒤에, 결국 자각의 시간도 찾아왔습니다. 우리 민족이 깊이 생각할 수 있고 서로 결합할 수 있는 그런 시간 말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오월이 왔습니다’라는 옛 민요를 오늘 다시 부를 수 있습니다. 계층 간의 끝없는 싸움과 반목의 상징이 이제 다시 민족의 대대적인 일치와 국가융성의 상징으로 변했습니다."

그가 연설만으로 국민의 감정을 자극한 것은 아니다. 횃불과 서치라이트, 합창 등을 동원하여 이성적 판단보다 감정을 자극하는 분위기를 연출하였다. 1934년 뉘른베르크 전당대회는 야간에 개최하였는데 관중석 불은 끄고 오직 연단에만 빛을 비춤으로 히틀러에게 집중하고, 그가 쏟아내는 연설에 빠져들게 하였다. 마치 종교집회와 같은 분위기 속에 반복적인 동작과 리듬에 군중은 '하이 히틀러'로 대답하였다.


그는 때로 여러 가지 복잡한 상황에서 자신이 최선을 다하여 왔음을 논리적(로고스)으로 설명하였다.

“4개월 동안 나는 조용히 사태 진전을 지켜보았습니다. 다만, 경고를 보내는 것을 중단하지 않았습니다. (…) 나는 3주 전 폴란드대사에게 만약 폴란드가 계속 최후통첩 형식의 각서들을 단치히에 보내고, 독일인에게 박해를 가하며, 단치히에서의 독일 무역을 방해할 관세 조치들을 종식하지 않는다면, 독일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라 통지했습니다. 나는 영국 측의 조정안을 받아들이기 위해 한 번 더 마지막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러는 동안, 무엇보다 갑작스러운 폴란드의 총동원령과 이어 자행되는 폴란드의 잔학행위들은 그러한 조정안을 받아들이는 데 실패하게 했습니다.”

그는 차분히 상황을 설명하면서 독일 국민이 이제 일어설 때임을 설득하였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설득의 삼 요소를 아주 적절하게 사용하여 독일 국민을 전쟁으로 몰아갔다. 객관적으로 보면 히틀러는 탁월한 웅변가임이 틀림없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히틀러는 최악의 지도자였다.


20세기는 불행한 시대였다. 인류 역사상 가장 잔혹한 전쟁이 끊이지 않던 시기였다. 동시에 대중을 설득하여 범죄의 길로 끌고 간 악한 지도자의 시대이기도 하다. 독일, 소련, 중국, 일본, 이탈리아, 캄보디아 등 독재자들은 한결같이 탁월한 설득력을 선보였다. 그러는 동안에 히틀러의 말대로 사람들은 각성하기 시작하였다. 말 잘하는 리더라고 해서, 신뢰성이 있는 리더라고 해서 과연 믿을 수 있을까? 지도자에 대한 불신, 수사학에 대한 불신이 퍼져나갔다. 이제는 그 어떤 사람의 말도 믿지 않는 시대가 되었다. 의심하고, 불신하는 것이 교양인 시대가 되었다. 누구를 일방적으로 추종하는 사람이야말로 어리석은 사람이고, 자기 판단과 생각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이 지성인이다. 지도자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다. 자기 생각과 다르면 그가 대통령이라 할지라도, 성직자라 할지라도 가차 없이 비판하고 욕설을 퍼붓는 시대가 되었다. 일부에서 수사학의 시대는 끝났다고 선언하였다.

마틴 부버(Martin Buber, 1878~1965)

학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장한 설득의 심리학에 회의를 가지기 시작하였다. 1959년 다니엘 포가티(Daniel Fogarty)는 ‘새로운 수사학을 위한 근원’(Roots for a New Rhetoric)이란 책을 썼다. 그는 설득이란 일방적이고 수직적인 수사학이 아니라 수평적인 새로운 수사학이 나와야 함을 역설하였다.


다니엘 포가티가 새로운 수사학을 주장하기 전 유대인 철학자 마틴 부버(Martin Buber, 1878~1965)는 1923년 ‘나와 너’를 출간하였다. 마틴 부버는 1878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빈 대학교, 취리히 대학교, 베를린 대학교에서 철학과 미학을 배웠다. 유대인의 특성이 그러하듯 그는 정체성 문제로 고민하였다. 유대인은 공부를 아무리 잘해도, 아무리 부자여도, 아무리 유럽에서 오래 살았어도 언제나 변두리 인이다. 마틴 부버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간격과 대화와 관계에 집중하였다. 그는 히틀러 치하에서 독일을 떠나 여러 나라를 전전하다가 마침내 팔레스타인에 정착하였다.


그가 정착한 팔레스타인도 평화의 땅은 아니었다. 유대인과 아랍인은 원수처럼 으르렁거리며 싸우고 있었다. 독일에 핍박받던 유대인들은 이제 팔레스타인을 핍박하였다. 마틴부버는 유대와 아랍 연방의 평화 운동에 열정을 쏟았다. 수천 년 동안 적대 관계에 있던 두 민족의 화해와 화합을 이루려는 그를 동족인 유대인들은 비난하고 미워하였다. 그는 나아가 유대인과 독일인의 화해를 위해 힘쓰다 1965년 6월 6일 세상을 떠났다.


그의 철학은 단순한 사변적 이론이 아니다. 그가 살던 시대의 아픔과 갈등과 싸움을 온몸으로 부딪히며 고민한 철학이다. 아무리 포스트모던 시대라 하지만, 그의 말에 귀 기울여야 할 이유는 충분히 있다.


지금까지 철학의 관심사는 1인칭 대명사 ‘나’에 머물렀다. 이러한 철학을 자아 철학(Ich-Philosophie)이라 한다. 자아 철학은 홀로 고립된 존재로서 자기 자신에 관해서만 관심을 집중한다. 나의 메시지를 어떻게 잘 전달할까에만 관심을 가진다.


마틴부버는 철학의 관심을 나에게서 ‘너’에게로 확대하였다. 이른바 대화의 철학(Philosophie des Dialogs) 혹은 만남의 철학(Begegnungsphilosophie)이라 한다. 두 사람이 만나 관계를 맺고 대화를 나누므로 쌍방향 소통을 할 수 있다. 두 사람이 소통하려면 자기에게만 관심을 집중할 것이 아니라 상대방에게 관심을 가지고 상대방의 마음과 생각을 이해하고 공감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마틴 부버는 대화를 통해 소통하는 상호작용의 관계에서만 진정한 자유를 체험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프랑스의 철학자 폴 리쾨르(Paul Ricoeur, 1913~2005)는 마틴 부버의 사상을 발전시켜 대화주의를 주창하였다. 리쾨르는 인간을 다른 인간들과 의사소통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로 규정하였다. 그러나 불행하게 인간과 인간 사이에는 커다란 간격이 있다. 인간은 자기만의 고유한 경험과 생각을 하는데 이를 인간의 언어로 온전히 전달할 수 없는 한계가 있다. 그렇지만 서로를 이해하고 인정하려는 노력이 대화 가능성을 열 수 있다.


각자 자기주장만 일삼으며 남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려고 하는 시대에 현대 여러 철학자는 나름대로 고민하며 소통의 길을 찾았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커다란 간격이 있어 서로 오해하고, 갈등하고, 싸우고, 죽이기까지 한다. 수천 년 동안 이어져 온 갈등과 싸움을 어떻게 하면 종식할 수 있을까?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장한 수직적 설득 방식은 이제 먹히지 않는 시대가 되었다.


이제 설교학으로 돌아가 보자. 설교학은 인간과 인간의 소통 문제뿐만 아니라 신과 인간의 소통을 다루는 학문이다. 인간과 인간 사이에도 커다란 간격이 있어서 소통이 잘되지 않는데 하나님의 언어를 인간의 언어로 바꾸어 전달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도전이라 할 수 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언어를 왜곡 없이 인간에게 전달할 수 있을까?


해답은 하나님께서 주셨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6-8)


하나님은 인간과 소통을 위해서 인간 세상에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오셨다. 그것도 가장 낮고 천한 모습으로 오셨다. 인간이 겪어야 할 모든 고통과 서러움과 왜곡과 갈등과 싸움과 죽음을 다 겪으셨다. 예수님은 인간에게 “나를 따라오너라.” 하지 않으시고 “나와 함께 가자.” 말씀하셨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장한 고전 수사학의 설득 방식이 “나를 따라오너라” 였다면, 소통을 고민하는 새로운 수사학의 설득 방식은 “나와 함께 가자.”다. 기꺼이 내려오셔서 마음을 여시고 죄 많은 인간을 이해하시고 공감하시고 함께 하심이 하나님의 소통방식이다. 이제 설교도 일방적으로 주입하고 설득하는 수직적 방식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취하신 방법대로 겸손히 내려와 공감하며 함께하며 소통하여야 한다.


종교개혁으로 설교단이 조금 낮아지긴 했지만, 하나님은 더 내려오라 요구하신다. 그건 이 시대의 요구이기도 하다.


참고논문

1. 김종영, "히틀러의 레토릭"  ⌜독어교육⌟ 34집, 한국독어독문학교육학회  (2005)

2. 김종영, "히틀러의 1933년 5월 1일 연설문 분석" ⌜독어교육⌟ 25집,  한국독어독문학교육학회  (2002)

3. 송희영, "히틀러의 연설, 열광과 도취의 도가니" ⌜카프카연구⌟ 37집, 한국카프카학회 (2017)

4. 송용구, "대화와 소통에서 함께 누리는 자유" ⌜문예운동⌟ 문예운동사 (2015)

5. 남정길, "부버의 대화원리와 그 적용" ⌜기독교사상⌟ 21집, 대한기독교서회 (1977)

6. 최성식, "마틴 부버 대화철학에서의 원간격과 간격 개념에 관한 존재론적 고찰" ⌜범한철학⌟ 46집, 범한철학회 (2007)

7. 전종윤, "철학의 권리와 대화주의 - 데리다와 리쾨르 철학의 교양교육 차원에서의 이해" ⌜교양교육연구⌟ 8집, 한국교양교육학회 (2014년)

8. 전종윤, "폴 리쾨르 철학에 있어서의 대화주의" ⌜한국수사학회 학술대회⌟ 한국수사학회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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