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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gos Brunch Sep 25. 2017

권위 없는 자처럼

수사학과 설교학의 줄다리기 3

“교지에 실을 건데 수필 하나 써줄래?”

대학 시절 교지 편집장 친구가 부탁했다. 글 하나 쓰는 건데 뭐 어려울 것이 있나. 쉽게 생각하고 덜커덕 승낙했다. 며칠 후 글을 써서 친구에게 가져다주었더니 친구가 읽어보고 말했다.

“수필을 써달라고 했지 설교를 써오라고 했냐!”

어! 난 수필을 썼는데. 설교라니. 원고를 돌려받으면서 적잖이 당황했다. 고쳐 써서 가져다주었지만, 다시 또 핀잔과 함께 원고를 돌려받았다. 몇 번을 그렇게 하고 나니 글쓰기에 자신이 완전히 사라졌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수필과 설교문을 구분하지 못했다. 글은 다 똑같은 줄 생각했다. 그날 이후 글쓰기는 두 번 다시 안 하리라 다짐했다. 그 후 십수 년이 지나면서 설교는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했지만, 수필이나 다른 잡문을 써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글 잘 쓰는 사람을 보면 나와는 전혀 다른 세상에 사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러면서도 내 안에 글을 잘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곤 했지만, 이내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또 창피당하려고.”


5년 전 페이스북을 처음 하면서 글을 조금씩 쓰기 시작했다. 사진작가 신미식 씨의 격려 때문이기도 하지만, 좋은 글을 쓰고 싶다는 욕망이 나를 움직였다. 가능하면 설교조의 글을 안 쓰리라 다짐하였지만, 쉽지 않았다. 글을 쓰다 보면 언제나 설교가 되었다. 평생을 목회자로 살다 보니 훈계, 설교, 가르침, 설득이 몸에 배어버렸다. 아무리 떨쳐 버리려고 해도 버릴 수가 없었다.


그때 백석예대 크리스 조 교수가 내게 빛을 던져 주었다. 장영희 교수의 수필집을 읽어보라고 권하였다. 나는 장 교수의 수필집을 사서 읽으면서 글쓰기의 눈이 열리는 것 같았다. 장 교수는 자신의 삶에서 일어난 사건을 어린아이에게 이야기하듯 쉽게 풀어썼다. 삶의 사건을 이야기로 풀어가면서 멋진 교훈으로 끌고 가는데 놀라울 정도였다. 그러고 보니 나는 언제나 설교하듯이 분명한 명제와 교훈을 전제하고 그것을 설득하려고 힘을 쓰는 연역적 방식을 사용했다. 삶의 이야기는 예화로써 논지를 설명하고 설득하기 위한 수단으로만 사용할뿐이었다. 나는 설득에만 관심을 가졌지 독자의 마음이나 상황은 생각하지 않았다. 전달하고자 하는 의도, 내용, 목적에만 관심을 가졌다.


장영희 교수의 글은 아무런 의도나 내용이나 목적이 없는 듯 보인다. 도대체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걸까 하면서 이야기를 읽다 보면 어느새 그가 이끌어가는 교훈 속에 빠져들고 그의 이야기에 깊이 공감 하였다.

나의 글이 연역적이었다면 장영희 교수의 글은 귀납법적이었다.

나의 글은 설득이었다면 장영희 교수의 글은 설명이었다.

나의 글은 학술적이었다면 장영희 교수의 글은 이야기였다.

나의 글은 일방적 설교였다면 장영희 교수의 글은 쌍방향 소통이었다.

나의 글은 고전 수사학을 따랐다면 장영희 교수는 새로운 수사학을 사용하였다.


글은 모름지기 내용도 중요하지만, 읽혀야 한다. 말도 마찬가지다. 말에 메시지가 있어야 하지만, 청중이 들어주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전도사 시절 모시던 목사님은 성자와 같은 분이었다. 나는 그분의 인품과 인격을 닮고 싶은 마음이 가득하였다. 그러나 설교는 닮고 싶지 않았다. 언제나 같은 패턴과 톤으로 설교하시고, 제스처나 예화는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청중의 절반은 늘 졸고 있었다.


흔히 듣지 않는 청중을 향해서 설교자들은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라고 말한다. 전하기만 하면 설교자의 임무를 다 한 것인 양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신학교 다닐 때 청중의 상황은 알 필요 없다고 배웠다. 오직 말씀을 바로 해석하고 말씀을 바로 전하는 신학만 배우면 된다고 하였다. 하나님의 말씀만 바로 전하면 말씀이 다 알아서 할 테니 청중은 신경 쓰지 말라고 배웠다. 그러고 보니 내 설교가 그러했다. 나의 글 또한 내 생각과 의도를 어떻게 하면 잘 전할까 생각했지, 독자나 청중은 전혀 배려하지 않았다. 반대로 장영희 교수 누구라도 쉽게 읽을 수 있는 글을 썼다. 그는 삶의 이야기를 나누었고 때로 자신의 부끄러움을 스스럼없이 드러내면서 모든 사람이 공감하는 일반적 교훈을 찾아내었다.


다시 수사학이라는 어려운 이야기를 잠시 해보자. 고전 수사학은 설득에 강조점을 두고, 현대 수사학은 소통에 강조점을 둔다. 둘 다 훌륭한 방법이긴 하지만 요즘처럼 불통인 시대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시대에는 아무래도 소통에 강조점을 둔 현대 수사학이 좀더 의미있어 보인다. 아무리 좋은 글, 훌륭한 글을 써도 반응을 보여주는 사람이 없다면 그것은 문제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하면서 청중과 독자를 탓하기 전에 글 쓰는 법을 바꾸든지, 말하는 법을 바꾸어야 할 필요가 있다.


손자 포스(Sonja Foss)와 카렌 포스(Karen Foss)가 함께 쓴 ‘변혁을 추구하는 초대’라는 책에서 ‘초대의 수사학’(invitational rhetoric)을 제안한다. 그것은 와서 들으라는 식의 일방적 초대가 아니라 하나님의 초청에 함께 가보자는 식이다. 설교자가 강단이라는 권위 있는 자리에서 내려와 청중들에게 나도 당신들과 같이 부족하고 죄 많은 인간이니 우리 함께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서 말씀을 들읍시다 말하며 겸손히 초청한다. 이제까지 하나님의 사자, 선지자, 하나님의 대언자라는 자리에서 내려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는 모두가 똑같은 죄인임을 자각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프레드 크래독(Fred B. Craddock)은 ‘권위 없는 자처럼’(As One without Authority)이란 책을 써서 북미 설교학계에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제 설교자는 강단에서 내려와 청중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알아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 그리고 청중들과 같이 아파하고 힘들어하며 공감하는 능력이 필요한 시대가 되었다. 읽히지 않는 글, 듣지 않는 설교는 하나님도 원하시지 않는다. 설교자들은 메시지를 연구하는 시간 만큼이나 청중을 읽고 시대를 읽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 생각해보면 설교는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글쓰기도 어렵긴 마찬가지다. 이 가을 나는 고민이 깊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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