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더 이야기 6
에스더를 어떻게 읽어야 할까? 하나님께서는 에스더를 통하여 무엇을 가르쳐 주시려는가? 성경학자들은 의견이 분분하다. 구약은 신약과 달리 이야기(narrative) 형식을 빌려 하나님의 뜻을 전달한다. 따라서 해석이 다양할 수밖에 없다. 시대에 따라, 환경에 따라, 사람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 일제강점기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죽으면 죽으리이다”는 각오로 왕 앞에 나아간 에스더가 너무나 훌륭하게 보였다. 교단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가결하고 먹고 살기 위하여 일제에 고개 숙이는 목회자들이 속출하던 때였기 때문이다. 막강한 권력 앞에 무릎 꿇었던 상황에서 에스더는 분명한 메시지를 주었다. 죽음 이외 다른 길이 보이지 않던 그 시대 순교를 각오한 에스더의 모습은 하나의 좌표였다.
시대는 변하였다. 이제 순교의 메시지는 큰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물론 아직도 돈과 명예와 권세에 초연하면서 오직 하나님 말씀대로 살려면, 순교 정신이 필요하다. 그렇다고 해서 정말 순교하는 상황은 아직 오지 않았다. 오히려 세속주의가 판을 치고 있는 이 시대 기독교는 세상과 타협하며 썩어가고 있다. 편안함, 안락함, 부귀와 영화가 신앙의 목적이 되어 버린 시대다. 이제 에스더를 재해석해야 할 때가 되었다.
한국 기독교는 이런저런 이유로 점점 코너에 몰리고 있다. 교회마다 교인 수는 줄어들고 기독교의 리더십과 영향력은 볼품없어졌다. 1907년 평양 대부흥을 기대하면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여 보았지만, 하나님은 아무런 조처를 하지 않으신다. 오늘 우리의 상황은 에스더의 세상과 같다고 할 수 있다. 힘없는 유대인, 구심점을 잃어버리고 뿔뿔이 흩어져 살아가는 유대인, 모국어인 히브리어는 잊어버리고 외국어인 아람어를 사용하는 유대인뿐이다.1) 민족의 운명이 바람 앞에 촛불 같은 상황에서 기댈 것은 오직 나약한 여성 한명 뿐인 세상과 지금은 다를 바가 없다. 대한민국 기독교에 과연 소망이 있을까? 대한민국 기독교에 과연 미래가 있을까? 에스더가 나라의 운명을 하나님께 맡기고 금식하며 기도하지만, 하나님의 음성은 단 한마디도 들려오지 않는다.
“하나님, 묵묵히 계시지 마십시오. 하나님, 침묵을 지키지 마십시오. 조용히 계시지 마십시오. 오, 하나님!”(시83:1)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고, 하나님의 지도를 받지 못한 에스더는 그냥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나아갈 뿐이다.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암흑 속에서 불안하지만 더듬더듬 앞으로 나가는 에스더가 가련해 보인다. 오늘 우리가 그러하다. 죽으면 죽으리다는 말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면서 나가는 발걸음이라기보다 내일을 알지 못하는 불안함 속에서 어렵게 한 발을 내딛는 연약한 한 여자의 가녀린 기도다. 그건 오늘 우리의 기도이기도 하다. 에스더서는 하나님의 지도를 받지 못하는 그리스도인이 좌충우돌 하는 몸부림과 같다.
4장 1절은 3장 마지막 절과 묘한 대조를 이룬다.
“왕은 하만과 함께 앉아 마시되 수산 성은 어지럽더라.”(에3:15)
“모르드개가 이 모든 일을 알고 자기의 옷을 찢고 굵은 베 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성중에 나가서 대성통곡하며”(에4:1)
하만은 앉아 웃고 마시며 떠드는 데 모르드개는 대성통곡하고 있다. 사람은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다. 상황을 바로 파악하지 못하면 그걸 거꾸로 한다. 지금 기독교는 마땅히 울 때이지 웃을 때가 아니다.
아하수에로 왕은 쾌락과 향락을 위하여 하만 한 사람을 앞세우고 독재 정치를 하였다. 충언은 필요 없다. 논의도 필요 없다. 왕권에 도전하는 자는 죽음뿐이다. 유대인 학살 결정은 아무런 논의나 검토도 없이 밀실에서 졸속으로 결정하였다. 자기에게 절하지 않는다는 하찮은 이유로 한 민족 전체를 멸절하기로 하였다. 본보기인지도 모른다. 공포 정치는 시작되었다.
모르드개는 굵은 베 옷을 입고 대성통곡하였다.2) 그는 자기 하나 때문에 민족이 멸망하게 되었다는데 책임감을 느끼고 회개하는 마음으로 울었을까? 아니다. 결코 아니다. 그는 페르시아가 완전히 잘못된 길로 가고 있음을 온몸으로 항의하는 중이다. 조선 시대 선비들은 왕에게 직언할 때 상소문을 들고 대궐 문 앞으로 나아가 엎드렸다. 그냥 나간 것이 아니라 도끼를 들고 나아갔다. 저희의 충언을 듣지 않겠거든 차라리 이 도끼로 목을 치소서! 아무리 막돼먹은 전제 군주라 할지라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직언하는 백성의 말을 무시할 수 없다. 모르드개의 심정이 바로 그러하였다. 그는 모든 사람이 보라는 듯, 굵은 베 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대궐 문 앞까지 대성통곡하면서 행진하였다. 그의 저항은 한 사람으로 끝나지 않았다. 페르시아 각 지방에 흩어져 사는 유대인이 모르드개와 함께 하였다.
“크게 애통하며 금식하며 울며 부르짖고 굵은 베 옷을 입고 재에 누운 자가 무수하더라.”(에4:3)
오늘날 어깨동무를 하고 길바닥에 누워버리는 연좌데모가 연상되지 않는가? 그러나 왕에게 나아가는 언로는 이미 막혀버린 상황이다. 왕은 국정에 아무런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나라는 하만에게 맡기고 그저 먹고 마시고 노는 것에만 몰두하기로 작정한 왕이다. 누가 이 사실을 왕에게 알릴 수 있을까?
언로가 꽉 막힌 상황에서 모르드개가 마지막으로 희망을 둔 것은 사촌 여동생이며 왕비인 에스더이다.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에스더는 베 옷을 입고 재에 누운 삼촌을 위하여 옷을 보내었다. 그 옷을 입을 모르드개가 아니었다. 에스더는 모르드개의 상황을 자세히 알아보도록 내시 하닥에게 지시하였다. 모르드개의 의도는 분명하였다.
“왕에게 나아가서 그 앞에서 자기 민족을 위하여 간절히 구하라!”(에4:8)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페르시아 법에 의하면 왕이 부르지 않았는데 왕비가 먼저 나갈 수 없었다. 하긴 왕비가 수천 명이니 서로 왕을 보러 나가겠다고 하면 여자들의 싸움이 말이 아닐 터였다. 왕은 자기 편한 대로 여자들을 상대하려고 함이 분명하다. 에스더는 30일 동안 부름을 받지 못하였다. 에스더가 죽기를 각오하지 않고서야 어찌 왕을 만나겠다고 나설 것인가? 사실 아무런 생각 없이 향락에만 몰두한 왕과 사이가 좋다고 해서 좋아질게 하나도 없는 에스더였다. 쾌락을 함께 즐길 것이 아니라면, 30일이 아니라 30년 동안이라도 건드리지 않고 그냥 내버려두는 게 에스더로서는 더 좋을 수 있다. 왕비로서 적당한 권세와 안락과 풍요로움이 있기 때문이다.
모르드개는 에스더에게 다시 한번 압력을 가하였다.
“너는 왕궁에 있으니 모든 유다인 중에 홀로 목숨을 건지리라 생각하지 말라! 이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버지 집은 멸망하리라 네가 왕후의 자리를 얻은 것이 이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알겠느냐!”(에4:13,14)
모르드개가 하나님을 분명하게 언급하지 않았지만, 그의 신학은 분명하다. '일할 사람이 너 하나뿐이라고 생각하지 마라. 너 아니더라도 하나님은 언제나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신다. 만일 네가 침묵하고 책임을 감당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백성에서 너는 제외될 것이다. 잠시 사는 세상에서 너는 안전할지 모르지만, 영원하신 하나님 앞에서 너는 멸망이다.'
모르드개의 압력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무거웠다. 딸처럼 사랑했던 에스더에게 죽음을 요구하고 있다. 이제 유대인 신분도 밝히고 왕에게 나아가 죽음을 각오하고 간청하여 민족을 살려라. 어떻게 해야 할지 자세한 방법도 가르쳐주지 않고 짊어지기 어려운 무거운 짐만 던져 주는 꼴이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에스더라고 무슨 뾰족한 답이 있는 것이 아니다. 에스더를 영적으로 지도하는 영적 지도자가 있는 것도 아니다. 기도한다고 하나님의 음성이 있는 것도 아니다. 정말 답답하고 깜깜한 상황이다.
에스더는 마침내 결단한다.
"죽으면 죽으리이다."(에4:16)
어찌할 바를 모르지만 일단 앞으로 나아가야겠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가 가야 할 길이다. 아브라함은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다.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아는 사람 하나도 없는 곳으로 가야 했다. 말도 다르고, 문화도 다르고, 생각도 다른 그곳에는 아무런 근거가 없었다. 비비고 기댈 언덕도 없었다. 오직 하나님뿐이다.
하나님의 요구는 기존 질서에 적당히 순응하면서 편안함을 추구하지 말라는 뜻이다. 권력에 안주하지 말고, 세상에 안주하지 말고 하나님과 함께 새로운 사회,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보라는 도전이다. 에스더가 앞으로 나간 것은 하나님의 응답을 받아서 나간 것이 아니다. 그녀는 결정해야 할 순간에 자신이 지금까지 누리던 평안함을 포기하기로 하였다.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난 아브라함처럼 그녀는 권력과 부귀와 영화로부터 떠나기로 하였다. 에스더서의 특징은 하나님의 숨은 모습과 그걸 모르는 인간의 고뇌와 갈등이다.
한국 기독교가 갱신하는 길이 어디 있을까? 답을 찾고자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는 것도 좋은 일이다. 그러나 답을 기대하지 마라. 성경에 이미 수 없이 반복하여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모른 척 외면하고 있을 뿐이다. 답은 하나다. 기득권을 버리고 애굽의 노예였던 그때로 다시 돌아가 새출발하라는 것이다. '죽으면 죽으리이다'는 오늘 새롭게 해석해야 할 커다란 명제다.
주)
1. 타향살이가 100년 되니 유대인은 히브리어를 잊어버리고 아람어가 히브리어인 줄 생각하였다. 신약성경에서 히브리어라고 언급한 단어들은 사실은 아람어였다.
2. 모르드개가 굵은 베옷을 입었다고 해서 우리가 장례식 때 입은 굵은 삼베 옷을 생각하면 안 된다. 광야 민족인 유대인은 산양이나 약대 털로 거칠게 짠 옷을 입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