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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gos Brunch Dec 15. 2017

복수와 저주의 시를 어떻게 읽어야 할까?

청교도를 연구하는 모임에 참여한 적이 있다. 그 모임에서는 시편을 찬송가로 만들어 불렀다. 낯설었다. 그래도 신선하였다.


시편은 찬송이면서 동시에 기도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런데 시편은 인간의 간구와 노래를 모은 책이다. 시편에는 찬양만 있는 것이 아니다. 분노도 있고, 눈물도 있고, 탄식도 있고, 저주도 있다. 시편은 사람이 표현할 수 있는 모든 감정을 다 담고 있다. 그런데 사람들이 자기 감정을 다 담아 기도하고 찬송하였던 글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여 정경으로 받아들였다는 사실은 놀라울 따름이다. 


시편은 정직하다. 시편은 그리스도인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 지를 잘 보여준다. 기도를 어떻게 해야 할지, 찬송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보여준다. 시편을 읽다 보면 하나님은 우리의 정직함을 요구하신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하나님의 우리의 속마음을 숨김없이 다 드러내기를 원하신다. 경건한 척, 신앙이 있는 척, 거룩한 척, 도덕적인 척하는 것을 싫어하신다.


시편 저자는 오늘날 그리스도인과는 확실히 다르다. 그들은 가식이 없다. 속에 분노가 있으면 분노를, 남을 저주하고픈 마음이 있으면 그 저주를 그대로 표현하였다. 탁월한 구약학자인 듀크대 엘런 데이비스(Ellen F. Davis) 교수는 ‘하나님의 진심’(복있는 사람, 2017)이란 책을 썼다. 그는 우리가 시편을 잘못 읽고 있음을 지적하였다.


저주시 가운데 시55:13-15 말씀은 충격적이다. 

“나를 모욕하는 자가 동네 불량배였다면

차라리 내가 달게 받았을 것을.

욕설을 내뱉은 자가 낯모르는 악인이었다면

내가 신경 쓰지도 않았을 것을.

그러나 그자가 바로 너!

나와 함께 자란, 나의 가장 친한 벗이라니!

우리가 팔짱 끼고 함께 걷던 그 기나긴 시간,

하나님 이야기에 시간 가는 줄 몰랐지.

저 배신자들을 잡아 산 채로 지옥에 보내소서.

저들이 극심한 공포를 맛보게 하시고

저주받은 삶의 황폐함을 낱낱이 느끼게 하소서.”(시 55:12-15, 유진 피터슨 역)

시편 저자가 저주를 퍼붓고 있는 대상은 다른 사람이 아닌 어제까지 절친한 친구다. 흔히 정치하는 사람들이 말한다.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가 되고, 오늘의 동지가 내일의 적이 된다.’ 시편 저자의 상황이 딱 그러하다. 전부터 늘 나를 욕하던 사람은 그러려니 하고 참을 수 있다. 만나기만 하면 자기 자랑을 늘어놓는 사람도 참아줄 수 있다. 그런데 믿었던 친구, 어제까지 함께 신앙생활하며 은혜를 나누었던 그 친구가 칼을 빼 들면, 참기 힘들다. 시편 저자는 참는 단계를 뛰어넘어 저주의 기도를 한다.


어떤가? 우리는 이런 기도를 하나님께 드릴 수 있을까? 이런 시편을 기도라고 하여야 할까? 의외로 시편에는 복수심을 표현하는 시편들이 제법 있다. 시 109편은 아주 길게 복수를 노래한다.

“나의 하나님, 내 찬양의 기도를

못 들은 체 마소서.

거짓말쟁이들이 나에게 욕설을 퍼붓고

거짓된 혀로 나를 개떼처럼 잡으려 합니다.

크게 짖어 대며 적의를 드러내고

까닭 없이 내 뒤꿈치를 뭅니다!

내가 그들을 사랑했건만 그들은 나를 비방하고

내 기도를 죄악으로 취급합니다.

그들은 나의 선을 악으로 갚고

나의 사랑을 미움으로 갚습니다.

악인을 보내셔서, 나를 고소한 법관을 고소하게 하소서.

사탄을 급파하셔서 그를 기소하게 하소서.

그가 유죄 판결을 받게 하시고

그가 드리는 기도는 모두 죄가 되게 하소서.

그의 수명을 줄이시고

그의 일자리를 다른 사람에게 주소서.

그의 자식은 고아가 되게 하시고

그의 아내는 미망인의 상복을 입게 하소서.”(시 109:1-10, 유진 피터슨 역)

우리는 이런 복수와 저주의 시편을 만나면 당황한다.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셨다. 성경학자들조차 당황하여 이러한 시편을 그냥 지나치는 경우가 많다. 어떤 학자는 이것은 아직 윤리 개념이 발달하지 못한 구약의 저급한 사상이고 예수님께서 오심으로 제대로 된 윤리 개념이 정착하였다고 말하지만, 나는 동의할 수 없다. 어떤 학자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동일시한 것처럼 이스라엘과 동일시하였음에 주목하고 이 시편을 동일화(identificatio)로 해석하였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니라.”(창12:3)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운명 공동체로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시편의 저주시는 곧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표현한 것으로 해석한다. 어떤 학자는 시편 저자가 저주를 퍼붓는 경우는 개인적인 감정 때문만이 아니라 사회적 불의와 부조리함 때문이라고 본다. 사회가 하나님의 뜻과 법을 온전히 준행하지 못하고 있음을 엄하게 책망하고 하나님 나라가 온전히 세워지기를 소망하는 기도로 해석한다.


시편 저주 시에 대한 여러 해석을 읽어보면서도 나는 찜찜함을 털어버리지 못하였다. 그런데 엘런 데이비스의 책을 읽으면서 저주 시에 대하여 새로운 눈을 뜨게 되었다. 하나님은 아름다운 언어, 교양있는 언어, 거룩한 언어로 기도할 때만 들으시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속에 담겨 있는 쓰레기 같은 감정을 다 받아주신다. 괜히 우아한 척 미사여구로 포장하지 말고, 직설적으로 말하라고 하신다. 아무리 폼을 잡아도 사람은 본디 악하고 죄 된 법이다.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마15:11)

사람의 속은 예외없이 시커멓다. 나는 한때 기도하던 중 사람의 속이 보일 때가 있었다. 안수하는 중에 나도 모르게 그의 과거, 그의 잘못, 그의 죄악을 책망하고 있었다. 그때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나는 곧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하나님 사람의 속을 들여다보고 싶지 않습니다.

사람의 속은 모두가 죄악투성이고 더럽고 추하기 그지없는 데 그 속을 보아서 무엇하겠습니까?

저는 하나님의 말씀의 속을 보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깨달아 사람의 더러운 마음을 깨끗게 하는 사역자가 되게 하소서.”

다행스럽게도 그날 이후 두 번 다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우리의 시커먼 속을 보고도 우리를 사랑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 한 분뿐이시다. 그러기에 시편 저자는 자기의 시커먼 속, 추잡하고 더러운 속을 여과 없이 하나님께 쏟아놓았다. 누가 그런 기도의 말을 들어 줄 수 있겠는가? 나는 하나님의 마음이 바다보다 더 넓고 넓음에 감사를 드린다. 그래서 가끔 나는 하나님께 소리쳐 원망도 해보고, 때로 복수에 찬 기도도 드려 보기도 한다. 목사가 그래서 안 되지요 말하는 분들이 있긴 하지만, 내가 하나님 앞에서가 아니면 누구에게 그런 소리를 할 수 있겠는가?


나는 시편 저자가 직접 칼을 들고 원수에게 덤벼들지 않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그 지저분한 속을 다 쏟아 놓음에 감사드린다. 나도 기도만 할뿐이지 실제 원수를 만나서 복수심에 불타는 눈으로 째려보지는 않는다. 하나님께 호소할 뿐이다. 물론 하나님은 우리가 복수와 저주에 가득 차서 기도한다고 해서 다 들어주시는 분은 아니시다. 니느웨의 멸망을 간절히 소망하고 기도했던 요나의 기도와 달리 하나님은 니느웨 백성에게 큰 은혜와 자비를 베푸셨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어찌 악인이 죽는 것을 조금인들 기뻐하랴 그가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 사는 것을 어찌 기뻐하지 아니하겠느냐.”(겔18:23)

하나님께서 인간의 생각대로 세상을 다스리셨다면 이 땅은 피비린내로 가득 찼을 것이다. 어쩌면 우리가 제일 먼저 지옥으로 떨어졌을지 모른다. 요나가 고백한 것처럼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요4:2)이시다.


고대 랍비들은 성경에 대하여 늘 말하였다. “뒤집고, 또 뒤집어라. 거기에 다 들어있다.”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나쁜 버릇을 가지고 있다. 좋은 말씀, 축복의 말씀은 언제나 나를 향한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저주와 분노와 심판의 말씀은 다른 사람을 향한 말씀으로 생각한다. 랍비의 충고대로 저주시를 거꾸로 해석하면 어떨까? 누군가 하나님을 신실히 믿는 사람이 눈물 흘리며 나를 지목하여 저주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죄인이기 때문이다. 나에게 직접 말은 못 하고, 나를 향하여 분노와 독을 뿜어 내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시편을 조금 다르게 볼 수 있지 않을까?


교회의 목사로 있다 보면 교인들에게 이런저런 원망을 들을 때가 종종 있다. 솔직히 나는 그런 소리가 듣기 싫다. 그런데 하나님은 인간의 온갖 더러운 말과 욕설과 저주를 다 들으시고 그들을 품어주신다. 그들뿐만 아니라 그들의 원수까지도 품어 주신다. 그런데 나는 옹졸하고 치졸하여서 욕할 줄만 알지, 남의 욕을 열린 마음으로 받아줄 줄 모른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지만 아직 한참 멀었다. 언제 나는 하나님의 마음과 성품을 눈곱만큼이라도 닮을 수 있을까? 오늘 나는 조금 용기를 내어 나를 욕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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