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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gos Brunch Dec 21. 2017

변화를 향한 작은 몸부림

에스더 이야기 9 

그리스는 온통 산으로 이루어져 척박하기 이를 데 없다. 산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데, 농사지을 수 있는 땅은 매우 적었다. 산은 도시와 도시를 나누는 경계가 되었다. 골짜기마다 작은 도시가 만들어졌고 그 도시는 곧 나라가 되었다. 그렇게 생긴 나라가 아테네, 스파르타, 테베, 고린도, 메가라, 시키온 등 20여 개가 넘었다. 작은 땅덩어리에서 그리스 도시 국가는 날마다 싸웠다. 그리스 도시 국가는 시민에게 딱 한 가지 의무만 주었다. 20세에서 60세까지 남자는 반드시 국방의 의무를 담당해야 했다. 남자는 어려서부터 전투를 위하여 기술을 익히고 몸을 다듬었다. 하나로 뭉치지 못하고 늘 싸움만 싸우는 작은 땅덩어리 그리스는 보잘것없었다.


페르시아 황제 크세르크세스가 그리스를 공격할 때 '보리 한 줌' 밖에 되지 않는 나라라고 비웃었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상대가 되지 않는 작은 나라였다. 전통적으로 페르시아는 인해전술로 승리를 거두었다. 헤로도토스의 기록에 의하면 페르시아가 동원한 군대가 180만 명이라고 하지만 이는 과장이다. 학자들은 페르시아 군대가 20만 명 이상일 거라고 추정한다. 페르시아가 동원한 배는 800척이었다. 이에 반해 그리스는 모든 도시 국가의 군인을 총동원하여도 페르시아의 10분의 1밖에 되지 않았다. 두 나라의 전쟁은 살라미스 해전에서 판가름이 났다. 비록 선박은 적었지만 바다에 익숙했던 그리스가 페르시아 해군을 전멸하였다. 크세르크세스는 대장군 마르도니우스에게 육군을 맡기고 ‘걸음아 날 살려라.’ 도망쳐 버렸다. 전통적으로 페르시아는 육군이 강하였다. 20만 대군은 하나도 손해 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스와 싸워 이길 가능성은 충분하였다. 그런데도 크세르크세스는 더 이상 전쟁터에 있고 싶지 않았다. 


페르시아와 그리스가 육상에서 전쟁을 벌인 것은 살라미스 해전 1년 뒤인 479년이다. 페르시아는 숫자의 힘을 믿었다. 전술도 전략도 정보도 필요 없다. 수적 우위 말고도 페르시아에는 자랑스러운 부대가 있었다. 기병 1만 명과 불사부대 1만 명이었다. 기병은 요즘으로 치면 전차와 같은 위력을 발휘한다. 페르시아 기병은 말을 달리면서 화살을 정확하게 쏘는 것으로 유명하였다. 불사부대는 황실 근위대로서 페르시아에서 가장 용맹하고 전투에 능한 군사로 이루어졌다. 


페르시아의 정예부대와 대적하는 군대는 역시 그리스의 최정예 군사인 스파르타의 중무장 보병이었다.  스파르타는 기병은 없고 중무장 보병5,000명과 5,000명의 보조병사들이 있었다. 스파르타 역시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전투 방식이 있다. 그들은 적을 앞에 두고 등을 돌리는 짓은 절대로 하지 않았다. 적의 병사가 많고 적음을 떠나 적 앞에서 후퇴는 없었다. 영화 300으로도 유명한 전투가 스파르타 군인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스파르타 왕 레오니다스는 300명의 용사를 이끌고 페르시아 대군과 맞서 싸웠다. 그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300명 전원이 전사하면서 페르시아와 맞서 싸운 것은 후퇴를 모르는 스파르타 군인의 전통을 보여주었다. 


새롭게 스파르타 군대를 이끄는 장군은 레오니다스의 조카로 34살 파우사니아스였다. 젊은 파우사니아스는 전통적인 방식으로 싸우면 결코 페르시아 정예부대를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전통도 중요하고 명예도 중요하지만, 전쟁은 승리가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전투가 벌어질 지형을 살펴보면서 페르시아 기병을 무력화시킬 방도를 궁리하였다. 그는 평야에서 전투하기보다 구릉지대로 적을 유인하여 전투하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생각했다. 문제는 후퇴를 모르는 스파르타 군인들을 설득해야 했다. 후퇴를 모르고 용맹하게 맞서 싸우던 전통을 가진 스파르타 군인들은 젊은 장군의 계책에 동의하지 않았다. 후퇴는 수치다. 후퇴는 죽음이다. 절대 후퇴는 있을 수 없다. 젊은 파우사니아스는 병사들 한 명 한 명을 설득하였다. 때로 큰 말싸움도 벌어졌다. 그러나 34살 장군은 인내력을 보이며 마침내 자신의 전술을 관철시켰다. 전투 결과는 파우사니아스의 예측대로 되었다. 플라타이아이 전투는 그리스 쪽의 대승으로 끝났다. 페르시아 쪽 전사자는 7만 명이 넘었지만 그리스 쪽 전사자는 불과 159명이었다. 


변화를 주도했던 파우사니아스는 일약 영웅이 되었다. 전통을 따라 습관대로 전투를 하였다면 승리는 없었을 것이다. 시대는 언제나 변화를 요구한다. 사람들에게 “세상이 변화되었으면 좋겠습니까?”라고 물으면, 대부분이 그렇다고 답한다. 그러나 “이 세상을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을까요?”라고 물으면, 사람들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된다. 변화를 원하지만, 변화를 향한 움직임은 찾아보기 힘들다. 


변화보다는 현실에 안주하기를 원하고, 전통과 습관을 따라 사는 것이 편안해서 우물쭈물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새로운 시도나 모험은 실패할 가능성이 너무 커서 감히 엄두를 내지 못한다. 그저 여기가 좋사오니 현실에 머무르려고 한다. 그런 사람은 리더의 위치에 있어도 리더라고 말할 수 없다. 물이 점점 끓어오르는 데 ‘아! 따뜻하다.’ 하면서 조용히 있는 멍청한 개구리와 같다. 리더는 꼭 어떤 자리의 정점에 앉아야 리더가 아니다. 있는 자리에서 변화를 추구하며 나아가는 사람이 바로 리더다. 

에스더서를 읽으면서 신학적인 주제를 찾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나님의 섭리나 역사하심이 나타나는 것도 아니요 종교적인 주제가 있는 것도 아니다. 에스더서의 중심 주제는 숨어계시는 하나님과 움직이는 에스더라고 할 수 있다. 에스더는 페르시아의 왕비로서 하만이 무슨 짓을 해도 나 몰라라 외면하면 자신은 편안히 살 수 있었다. 괜히 페르시아의 법을 어기고 왕 앞에 나섰다가 죽임을 당할 수도 있고, 왕이 절대적으로 신임하며 모든 권력을 한 손에 쥐고 있는 하만에게 대항했다가 아얏소리도 못하고 당할 수 있었다. 변화보다는 현실에 안주하는 것이 훨씬 좋다. 에스더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건 하나님의 자녀가 걸어야 할 길은 아니다. 오늘도 망해가는 현실에 안주하는 기독교 지도자들이 너무 많다. 변화를 향한 아주 작은 몸짓도 하지 않은 체 그저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고 ‘여기가 좋사오니’ 하면서 노래한다. 당장 5년 후 10년 후도 내다보지 못하는 청맹과니와 다를 바가 없다. 


앞날을 다 알고 있는 우리가 에스더서를 읽으면 아무 흥미가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앞날을 한 치도 알지 못하는 에스더의 마음을 헤아린다면, 그녀가 얼마나 힘들었을지 조금은 짐작할 수 있다. 말 한마디에 한 민족을 멸절시킬 수 있는 권세를 가진 왕 앞에서 그녀는 얼마나 두려웠을까? 그녀는 왕을 최대한 높이며 말하였다. 

‘왕의 목전에서 은혜를 입었으며’, ‘왕이 좋게 여기시면’ 

왕을 칭송하는 말을 이중으로 반복하면서 그녀는 조심스럽게 말하였다. 


“내 생명과 내 민족을 살려 주소서.”

그녀는 자기 생명과 자기 민족을 하나로 보았다. 민족을 위하여 나가기로 한 이상 그는 자기 생명을 전부 걸었다. 어떤 결과가 나올지 전혀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그녀는 변화에 온몸을 맡겼다. 


에스더의 말에 아하수에로(크세르크세스)왕은 몸이 떨려 말이 나오지 않았다. 에스더 7:5의 시작 부분을 히브리 원문으로 살펴보면 문법적으로 다듬어지지 않은 문장임을 알 수 있다. 

“왕이 왕비에게 물었다. 그리고 그가 왕후 에스더에게 물었다.”

이는 왕이 큰 충격 속에 분노와 당혹함으로 말을 더듬는 듯한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폐위이긴 하지만, 이미 왕비 와스디를 잃어버린 경험이 있던 왕은 분노하였다. 누가 감히 나의 왕비에게 손을 대려는가? 페르시아의 법에 따르면 왕 외에는 왕비와 최소 일곱 걸음 정도의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 그리고 왕이 아닌 그 누구도 왕비나 왕의 여자와 홀로 있어서는 안 된다. 페르시아 왕은 그만큼 자기 여자를 지키려는 욕구가 강하였다. 


범인으로 지목된 하만은 당황하였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를 맞는 겪이라고 하만이야말로 큰 충격을 받았다. 왕비를 해할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았는데, 왕비가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절대 하지 않았을 텐데. 그는 깊은 수렁에 빠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분노한 아하수에로는 잔치 자리를 떠났다. 막다른 상황에 다다르면 일단 회피하려는 것이 인간의 본능이다. 한 사람은 사랑하는 왕비요 한 사람은 자기가 제일 신임하는 국무총리 하만이다. 둘이 부딪혔는데 어떻게 해야 할까? 사태를 어찌 수습해야 할지 모르는 아하수에로는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일반적으로 남자는 궁지에 몰리면, 생각이 멈춘다. 여자들은 그걸 알지 못하고 빨리 말하라고 뭐든 말해보라고 남자를 재촉하지만, 남자들은 할 말이 없어 분노할 뿐이다. 그때는 도리어 잠시 생각할 시간을 주는 것이 좋다. 에스더는 왕을 쫓아가면서 결정을 내려달라고 재촉하지 않고 그에게 시간을 주었다. 


생각을 정리하고 돌아온 아하수에로는 못 볼 것을 보았다. 하만은 아직도 그 자리를 떠나지 않고 홀로 있는 왕비의 의자에까지 다가가 엎드렸다. 왕의 분노는 극에 도달하였고, 하만은 모르드개를 매달려는 장대에 달려 죽었다. 마침내 상황은 변하였다. 한순간 한순간이 긴장과 두려움으로 숨이 막혔다. 그래도 에스더는 잘 버텨냈다. 


우리 하나님은 역전의 하나님이시다.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말 못 하는 자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뜨거운 사막이 변하여 못이 될 것이며 메마른 땅이 변하여 원천이 될 것이며 승냥이의 눕던 곳에 풀과 갈대와 부들이 날 것이며 거기에 대로가 있어 그 길을 거룩한 길이라 일컫는 바 되리니”(사35:6-8)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은 변화를 갈망하며 조심스럽게 나아가는 에스더의 앞길을 인도하였다. 변화를 만들려고 생명을 내걸고 몸부림친 에스더의 노력을 하나님은 외면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변화를 이끄는 지도자를 찾으신다. 


에스더가 높임 받는 것은 그녀가 왕비여서가 아니다. 그녀는 민족이 멸절하는 최악의 상황에서, 아무런 길도 보이지 않는 답답한 상황에서 변화를 만들어냈다. 아주 작은 빛을 보고서 자기 생명 전부를 걸고 앞으로 나아갔다. 하나님은 그녀와 함께하시고 그녀를 이끄셨다. 그녀가 알든 모르든 하나님은 그녀와 함께하셨다. 지금 조국의 기독교는 변화를 향한 작은 몸부림이라도 필요하다. 모두가 아는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모두가 변화를 외치지만 변화의 몸짓을 보이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이제는 말이 아니라 행동이 필요한 시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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