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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gos Brunch Jan 05. 2018

우리 모두의 하나님

에스더 이야기 10

히브리어는 자음으로 구성된 독특한 언어다. 히브리어 모음은 읽을 때 알아서 붙여야 한다. 더욱이 히브리어를 비롯한 모든 고대어는 띄어쓰기를 하지 않았다. 문장을 이해하기 쉽도록 사용하는 문장 부호(마침표, 쉼표, 따옴표 등)도 없었다. 그러다 보니 읽는 사람마다 다르게 읽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이를테면 ‘아버지가 방에 들어가시다’를 히브리어식으로 쓴다면 ‘ㅇㅂㅈㄱㅂㅇㅇㄷㄹㅇㄱㅅㄴㄷ’라고 썼다. 제대로 띄어 읽지 않으면 ‘아버지 가방에 들어가신다’가 될 수 있다.


이러한 문제로 AD6세기 경에 이르러서 학자들은 히브리어 모음을 새로 만들었다. 상황이 이러하니 구약을 해석하는 일은 매우 어려웠다. 유대인은 언어의 특수성 때문에 한 가지 해석만 고집하지 않았다. 그들은 구약 해석의 다양성을 수용하였다. 완벽하게 이단적이 아니라면, 구약 해석 모음집인 탈무드 안에 모두 수용하였다. 경전 해석에 자유로움이 있던 유대교는 매우 포용적인 종교였다.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하면서 중요한 이슈로 삼은 것은 성경 해석권이다. 그때까지 성경 해석에 대한 권한을 교황만 가지고 있었다. 교황의 해석 이외 다른 모든 해석은 이단이었다. 유대교와 달리 로마 가톨릭은 매우 편협하고 독선적이었다. 그들은 종교재판이라는 형식을 빌수많은 사람을 이단으로 지목하죽였다. 마틴 루터는 교황만이 가지고 있던 성경 해석권을 모든 사람에게 돌려주었다. 그는 만인 제사장설을 외치면서 모든 사람이 성경을 읽고 해석할 수 있다고 주장다. 종교개혁과 동시에 독일어 성경 번역을 한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다. 이제 누구라도 성경을 읽을 수 있고 또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위험한 혁명이었다.


사람마다 본문을 읽고 해석하는 능력이 다 다르기 때문이다. 나도 글을 쓰면서 늘 느끼는 것이지만, 글이 무엇을 말하는지 의미파악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는 사실이다. 글을 읽을 수 있다고 모두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 아니다. 글이 조금만 길어지면 머리가 아프다고 호소하는 사람도 있다. 우리 주변에는 난독증과 실질적 문맹자들이 의외로 많다. 하긴 2017년 사회조사 결과에 따르면 지난 1년 동안 책을 한 권도 안 읽는 사람이 인구의 절반이라고 한다.


마틴 루터가 성경을 모든 사람의 손에 쥐여 주었지만, 읽고 해석할 능력을 갖춘 사람은 매우 드물다.  설령 읽는다 할지라도 잘못 해석하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루터가 종교개혁을 한 지 500년 동안 교육 시스템이 개발되어 모든 사람이 글을 읽을 수 있도록 했는데도 상황은 이 지경이다. 기독교 안에 이단이 날마다 생기는 이유도 루터의 공헌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다. 날로 범람하는 이단들 때문에 교파마다 자신들이 성경을 어떻게 해석하는지를 나타내기 위하여 신조와 신앙고백을 발표하였다. 내가 속한 장로교는 16세기 중반 칼빈의 제네바 요리문답을 시작하여 프랑스 신앙고백, 스코틀랜드 신앙고백,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벨직 신앙고백, 제2스위스 신앙고백, 도르트 표준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등을 지지하고 따른다. 한국에 처음 선교하러 들어온 선교사들은 12 신조를 채택하여 한국 장로교의 신앙을 정하였다. 물론 감리교는 감리교대로 침례교는 침례교대로 모든 교파가 자기만의 독특한 신앙고백을 가지고 있다. 서로가 나만 옳다고 하는 독선적인 사고방식을 갖지 않는다면, 우리는 모두 기독교라는 한 울타리 안에서 평화할 수 있다.


문제는 독선적이고 전투적인 태도다. 요즘 SNS에 어떤 문제를 놓고 기독교인들끼리 논쟁하는 모습을 종종 보게 된다. 그들 중 상당수는 포용성을 잃어버리고 나 아니면 모두가 틀렸다는 식의 독선적 태도를 보인다. 자기와 다른 의견을 발표하면 비인격적인 언어나 욕설을 함부로 내뱉는 경우도 있다. 특히 극단적 보수주의나 개혁을 부르짖는 사람들이 주로 그러하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성경을 읽으면서 가장 먼저 가져야 할 태도는 포용성이다. 그런 면에서 성경을 모음 없는 자음(히브리어)으로 기록한 것은 매우 큰 의미가 있다.


나는 에스더서를 살펴보면서 고민이 많다. 성경학자들 마다 에스더서의 특징을 이야기하면서 배타적 민족주의를 거론하기 때문이다. 얼핏 에스더서를 보면, 에스더서에는 민족적 자부심과 증오와 복수 정신이 넘쳐흐른다. 유대인을 멸하려 했던 하만과 그의 잔당 7만 5천 명을 죽이고 그날을 승리의 날이라 축제를 하였으니 그럴 만도 하다.


그런데 다시 한번 생각해 보자. 고대 이스라엘 민족이 ‘민족’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있었을까? 민족이라는 개념이 처음 등장한 것은 언제일까? 과거 중국에서 오늘날 ‘민족’과 비슷한 뜻으로 사용한 단어는 ‘족류(族類)’였다. 같은 족속에 속하는 부류라는 뜻이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인조 대까지 조선인을 여진인, 왜인 등 다른 족속과 구분할 때 ‘족류가 다르다’고 하였다. 과거에는 ‘족류’라는 말보다는 ‘백성’이란 의미를 지닌 ‘동포’라는 말을 더 사용하였다. 이때의 ‘동포’는 국왕의 은혜를 입은 백성이란 뜻이었다. 19세기가 들어서면서 민족이라는 개념이 등장하였다. 비교적 고립된 환경에서 살았던 대한민국은 동포, 민족, 백성을 동의어로 사용하면서도 혼돈이 크지 않았다.


그러나 국경이 불분명한 유럽이나 중동 지역에서 민족 개념은 매우 희박하였다. 구약성서는 민족을 구성하는 인종적 요소로 공동 조상인 아브라함을 언급한다. 문제는 아브라함을 공동조상으로 삼는 족속이 많다는 사실이다. 모압, 암몬, 에돔, 유대 등 중동의 모든 민족이 아브라함을 공동조상으로 여긴다. 그러므로 공동조상을 좀 더 제한할 필요성이 있다. 성경은 야곱이 얍복 강에서 하나님과 씨름하다 ‘이스라엘’이란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야곱의 열두 아들 중 네 번째 아들 유다는 곧 유다 족속의 조상이 된다. 그러니까 유다 족속은 매우 제한적이어서 야곱의 열두 아들 중 유다의 후손을 지칭한다면, 이스라엘은 그보다 폭이 넓어 야곱의 후손을 칭한다. 그래도 혈통적으로 민족을 구분하기는 매우 어려운 측면이 많다.


성경은 혈통만큼이나 성소를 중심으로 한 공동예배의식을 통해 하나됨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 설령 타 민족이라 할지라도 할례라는 종교의식을 행하고 공동의 종교 문화를 가진다면, 그는 유대민족이 될 수 있다. 유대민족은 혈통적이라기보다는 종교적으로 뭉쳐진 종교 문화 공동체였다. 그러므로 현대 민족주의 시각으로 구약성경을 해석하면, 자칫 잘못 해석할 경우가 많다.


현대적 시각으로 볼 때 에스더서는 민족적인 개념을 포함한다. 그리고 일부 성경학자들처럼 배타적 민족주의를 주장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성경(구약)은 배타적 민족주의 성격을 가진 에스더서나 오바댜서, 나훔서뿐만 아니라 모든 세계를 포용하려는 요나서도 같은 성경 안에서 함께 아우르고 있다.

사실 하나님은 모든 민족의 하나님이시고, 그들을 향한 특별한 계획을 가지고 계셨다. 이스라엘이 조상으로 생각하는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이미 이러한 계획을 알리셨다.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창12:3)

하나님은 야곱을 축복하면서도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였다.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창28:14)

선지자들은 이러한 사상을 더욱 확장 발전시켰다.

내가 또 너로 이방의 빛을 삼아 나의 구원을 베풀어서 땅끝까지 이르게 하리라.”(사49:6)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해 뜨는 곳에서부터 해 지는 곳까지의 이방 민족 중에서 내 이름이 크게 될 것이라”(말1:11)

예언자뿐만 아니라 시편 저자들도 여러 곳에서 모든 민족이 구원받을 것을 노래하였다.

땅의 모든 끝이 여호와를 기억하고 돌아오며 모든 나라의 모든 족속이 주의 앞에 예배하리니”(시22:27)

주여 주께서 지으신 모든 민족이 와서 주의 앞에 경배하며 주의 이름에 영광을 돌리리이다.”(시86:9)


성경은 하나님을 따르는 백성을 사랑하고 지키고 보호하심을 이야기하지만, 그것은 편협한 사랑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모두를 품어 안고 사랑하시며 모든 민족이 구원받기를 원하신다. 에스더서를 지나치게 민족주의 시각으로만 보면 편협하고 독선적이며 전투적일 수밖에 없다.


19세기 제국주의의 억압에서 자유함을 얻기 위하여 약소국가들은 민족주의를 내세웠다. 바빌론 포로 생활을 하면서 온갖 핍박과 고통과 설움과 눈물을 흘렸던 유대 민족도 전투적이 되었다.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싸워야 했다. 그걸 민족주의라고 해석하는 것은 고대 유대인의 상황을 외면하고 지나치게 확대 해석한 것은 아닐까? 성경은 여러 곳에서 하나님은 유대 민족만을 위한 하나님이 아니라 모든 민족의 하나님임을 선포하였다. 편협한 선민의식이나, 나와 다르면 모두 죽여야 한다는 사상은 하나님의 사상이 아니다. 원수 나라인 니느웨에 가서 복음을 전하고 그들을 구원으로 이끄는 요나서 이야기는 가히 혁명적이다. 원수이며 죄인인 모든 사람을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주님의 사랑을 구약에서도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다.

하나님은 구약에서나 신약에서 모두 똑같은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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