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김춘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김춘수의 ‘꽃’)
시를 비롯하여 어느 예술 작품이든 작가는 자신의 의도를 담는다. 생각 없는 작품은 있을 수 없다. 누가 인정하든 안 하든 작가는 자기 생각을 표현한다.
그러나 작품이 발표된 후 독자는 해석하기 시작한다. 물론 작가의 의도를 파악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작가와 직접 대화할 길이 있으면 그의 의도를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되겠지만, 대부분 그런 기회를 얻지 못한다. 따라서 작품과 독자와의 대화가 시작한다. 설령 작가의 의도와 배경을 안다고 해서 그것에 반드시 동의할 필요는 없다. 독자는 자기가 느끼고 깨닫는 바를 보면 된다. 독자의 평가로 작품은 새롭게 해석된다.
김춘수의 ‘꽃’이라는 시를 읽는 독자도 여러 가지 해석을 한다. 사랑을 나누는 청춘 남녀가 이 시를 읽는다면, 필경 연애시로 해석할 것이다. 서로에게 의미 있는 사람이 되려는 사랑의 감정을 표현한 시로 읽을 수 있다.
보다 깊은 뜻을 탐구하는 사람은 이 시를 존재론적으로 해석한다. ‘하나의 몸짓’에 불과했던 의미 없는 것에서 서로 이름을 불러줌으로써 존재의 가치가 살아난다. 무의미한 존재가 아닌 의미 있는 존재로 인정받기를 소망하는 실존적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나는 이 시를 조금 다르게 해석하고 싶다. 먼저 시인 김춘수의 배경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는 1922년 경남 통영에서 태어났다. 그는 유년 시절 호주 선교사가 운영하는 미션계 유치원에 다녔다. 자신의 집에서 일하던 침모와 유치원 보모를 따라 교회에 가기도 했다. 그는 어릴 때부터 기독교가 정서적으로, 감각적으로 몸에 배었다. 성인이 된 이후로도 기독교, 특히 예수라는 인물에 관심을 가졌다. 그는 성경을 애독하였다. 비록 자신은 기독교인이 아니라고 하였지만 예수는 그의 작품 활동에 중심 주제였다. 그는 늘 예수님을 의식하며 살았다.
그는 ‘언제나 어디서나 누군가가 보고 있다’는 의식을 가졌다. 그를 바라보는 시선의 주체는 곧 예수님이다. 그는 ‘이설 두 마당 2’라는 시에서 이렇게 노래한다.
“갑자기 훤해지더니
무엇으로
마치 투명한 렌즈로 사방이 뒤덮이는 듯했다.
세상은 그것뿐이다.
그것은 눈이다.
누구의 눈인지도 모르는 눈이다.
나는 널 알고 있다.
그러나 어쩔 수가 없었다.
그 눈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예수는 그때 분명히
또 한번 확인하게 되었다.
그렇다.
누군가가 보고 있었다.”
시인은 자신을 무한한 연민과 사랑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예수님을 의식하였다. 자신의 참혹한 고통과 가혹한 운명을 알고 있다는 듯 “한없이 슬픈 눈”으로 그를 감싸 안으신다. “나는 널 알고 있다.” 그의 시 ‘아만드 꽃’에서 이렇게 노래한다.
“예수는 앓아누운 젊은이의 손을 가만히 오래오래 쥐어줌으로써 운명과 싸우려고 한다.
예수는 한 번도 이겨본 일이 없다.
예수는 다만 죽어가는 한 젊은이의 두려움과 외로움 곁에 가만히 언제까지나 있어 주었을 뿐이다.
(중략)
사랑은 기적을 낳지 않는다.
예수는 다만 사랑했을 뿐이다.”
김춘수에게 예수는 무엇보다 절대적이고 무한한 사랑의 실천자이다. 김춘수는 예수를, 한계에 직면한 불우한 이들의 고통에 동참하고 그들 곁에서 연민과 사랑의 눈길로 위로하는 인물로 이해한다. ‘요보라의 쑥’에서는 이렇게 읊는다.
“너무 달아서 흰빛이 된
해가 지고, 이따금 생각난 듯
골고다 언덕에도 굵은 빗방울이
잿빛이 된 사토(砂土)를 적시고 있었다.
예수는 죽어서 밤에
한 사내를 찾아가고 있었다.
예루살렘에서 제일 가난한 사내
유월절에 쑥을 파는 사내
요보라를 그가 잠든
겟세마네 뒤쪽
올리브숲 속으로, 못 박혔던 발을 절며
안심하라고,
쑥은 없어지지 않는다고
안심하라고,”
쑥은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나올 때 겪은 고난을 잊지 않기 위해 쓴맛 나는 나물을 상징한다. 예수님은 가난에 시달리며 불안에 떠는 요보라를 찾아가서 위로한다. 쑥은 없어지지 않는다고.
나는 김춘수 시인의 꽃도 연애시나 존재론적 시로 해석하기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것으로 해석하고 싶다. 구약성경에 보면 하나님은 사람의 이름을 지어주시고 부르신다.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함이니라.”(창17:5)
사래를 사라로 바꾸시고(창17:15) 야곱을 이스라엘로 고쳐 부르셨다.(창35:10)
이름을 부르심은 단순한 부름이 아니다. 그것은 그 이름값에 걸맞는 삶을 살라고 부르시는 것이다. 마치 부모가 자식이 태어날 때 이름을 지어주는 것과 같다. 부모는 자신의 소망과 기대를 아이에게 담는다. 하나님도 우리의 이름을 그렇게 불러주신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을 불러 주기를 간절히 소망하고 있지 않았을까? 자기 이름이 불리기 전까지는 아무런 의미 없는 존재였다. 그러나 이름을 불러주는 순간 그는 기꺼이 의미 있는 존재가 되기를 원하였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부르셨고 그들의 아버지가 되셨다. 시인이 정말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을 불러주기를 소망했는지 단정할 수 없지만, 난 그렇게 읽고 싶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사람이다. 단순하게 부르지 않고 하나님은 기대와 소망을 담아 불렀다. 이제 우리는 그 이름에 걸맞게 향기나는 그 무엇이 되어야 한다. 결코 잊혀지지 않는 눈짓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
참고
1) 김춘수, "김춘수 전집 1 시" (문장사, 1982)
2) 김춘수, "김춘수 전집 3 수필" (문장사, 1983)
3) 전병준, "김춘수 시에서 적극적 수동성의 윤리" ⌜한국시학연구⌟ (27), 한국시학회, (2010)
4) 김유중, "김춘수와 존재의 성화" ⌜어문학⌟ 128, 한국어문학회, (2015)
5) 손병희, "김춘수의 시와 "예수 체험"의 형상화" ⌜국어교육연구⌟ 63, 국어교육학회, (2017)
6) 손병희 "김춘수의 시와 유년기 체험의 변주" ⌜국어교육연구⌟ 60, 국어교육학회,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