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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gos Brunch Jan 24. 2018

폭력 사회에서 비폭력을

에스더 이야기 11

12월 13일 드디어 운명의 날이 밝았다. 하만을 추종하며 유대인을 멸하려는 자들과 싸움이 벌어졌다. 결과는 싱거웠다. 그날 유대인을 해하려는 자들은 전멸당하였다. 왕이 유대인 편에 섰다는 소식이 전해졌고, 총리인 모르드개를 중심으로 각 지방 모든 관료가 유대인을 도왔으니 결과는 뻔하였다. 그날 유대인은 마음대로 모든 대적을 멸하였다. 하만의 열 아들을 포함하여 수산 성에서만 500명, 전국적으로는 75,000명을 살해하였다.


왕은 에스더에게 이제 무슨 소원이 더 있느냐고 물었다. ‘속 시원하냐?’ ‘이제 됐지?’ 뭐 그런 뜻으로 물었는지 모른다. 에스더는 아직 분이 풀리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하만의 열 아들의 시체를 나무에 매달게 하시고 하루 더 원수들을 진멸하도록 하소서.” 에스더의 요구에 따라 14일에도 수산성에 사는 유대인들은 300명을 더 처단하였다.


유대인은 이날을 승리의 날이라 기뻐하지만, 현대 독자들은 이러한 폭력행사에 마음이 불편하다. 에스더서를 설교하는 설교자들도 이 본문은 설교를 잘 안 한다. 인권이 발달한 오늘날 세상의 대세는 비폭력 평화주의다.


에스더서의 결론 부분을 읽으면서 폭력과 비폭력의 문제를 고민해야 한다?

폭력은 정당한가?

폭력은 성경적인가?

비폭력적 사회변혁이냐?

폭력적 사회변혁이냐?

국가의 폭력은 어디까지 정당한가?


사전적으로 폭력이란 남을 거칠고 사납게 제압할 때 쓰는 물리적 수단이나 힘을 뜻한다. 그러나 인권개념이 폭넓게 해석되는 지금 폭력은 단순한 물리적 억압을 뛰어넘어 사람을 무시하고, 악용하고, 부정하고, 오도하는 모든 행위를 폭력으로 해석한다. 넓은 의미에서 폭력은 비인간화하는 행동 즉 인간의 존귀함을 무시하고 물건으로 대하는 행동이다.

인류 사회는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이는 사건 이후 한 번도 폭력의 악순환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 특히 20세기에 들어서면서 대량학살(genocide)곳곳에서 자행하므로 인간 본성이 얼마나 악한지 여실히 보여주었다. 심지어 종교의 이름으로 인종 말살을 시도한 적도 있었다. 기독교를 비롯한 세계 모든 종교가 이러한 범죄에서 자유롭지 못다. 권력 이데올로기에 빠져든 종교는 어김없이 잔혹한 살인을 아무런 죄책감없이 저지른다. 인간 본성의 폭력성, 권력 이데올로기의 폭력성은 그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는 걸까?


프랑스 인류문화학자 르네 지라르(René Girard, 1923-2015)는 인간의 폭력 메커니즘을 집중적으로 연구하였다. 인간의 마음 안에는 미움, 원한, 거짓, 시기, 질투 등 폭력적 성향이 내재한다. 인간사회는 이런 폭력의 악순환 위에 건설되었다. 그는 고대 종교를 살펴보면서 희생양 제사에 주목하였다. 제의적 희생은 모든 종교적 문화적 활동의 원형이다. 인간이나 동물의 피를 흘리는 희생 제사는 폭력을 사용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을 달래는 수단이다. 희생 제사는 신에게 봉헌하는 것이 아니라 잠재적으로 발생할지 모르는 거대한 폭력에 봉헌하는 것이다. 사회를 제대로 유지하려면 폭력에 사로잡히지 않아야 하는 데 권력자들은 사회의 불만과 불평 세력을 무마기 위하여 순진한 양을 희생한다. 여기서 그의 희생양 이론이 나온다.


인간은 언제나 폭력의 상황에 살고 있다. 구약 성경은 폭력의 위협 아래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을 그린다.

“사람들의 비방 소리 들려오며 협박은 사방에서 미쳐 옵니다.

그들은 나를 노려 무리 짓고 이 목숨 없애려고 음모합니다.

야훼여, 나는 당신만을 믿사옵니다.

당신만이 내 하나님이시라 고백하며

나의 앞날을 당신의 손에 맡기오니,

악을 쓰는 원수들의 손에서 이 몸을 건져주소서.”(시31:13-15, 공동번역)


민족의 근원을 이집트 노예에 두었던 이스라엘은 언제나 약소국가였다. 그들은 바빌론(아시리아)과 이집트라는 두 강대한 제국의 틈바구니에서 눈치만 보며 살 수밖에 없었다. 중근동 지방의 소수 민족은 생존이 지상 최대의 과제였다. 전멸당할 것이냐? 살아남을 것이냐? 그들이 오로지 여호와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의지한 데는 이런 이유가 있었다.


그런데도 그들 역시 폭력에 익숙한 인간이었다. 약하고 힘없을 때는 생존이 목표였지만, 자신들에게 조그마한 권력이라도 주어지면, 금세 돌변하여 남을 죽이고 멸하려 하였다. 구약 성경을 읽으면서 이러한 이율배반적 인간의 실상을 보게 된다. 세상에서 가장 이름 없는 민족, 야곱이 고백한 것처럼 지렁이만도 못한 민족인 유다는 끊임없이 패거리를 지어 같은 동포끼리 서로 헐뜯고 비방하고 싸웠으며 타민족을 멸시하고 말살하려 하였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꿈꾸신 나라의 모습과는 완전히 달랐다.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폭력을 자행하였으며, 가난한 자와 약한 자들을 짓밟았다. 그들의 폭력은 마침내 하나님을 향하여 자행되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유대 땅에 오셔서 평화를 외쳤다.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라.”(마5:39)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5:44)

평화를 외치는 예수님의 메시지에 그들은 귀를 막았다. 도리어 십자가에 예수님을 매달아 죽였다. 그들은 악을 써가며 외쳤다.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눅23:21) 폭동과 무자비한 폭력의 기운이 예루살렘을 가득 채웠다. 예수님은 그들의 폭력을 잠재우고 권력을 유지하려는 로마군에 의해 희생양으로 십자가에 달리셨다. 예수님은 본인의 말씀대로 열두 영이나 되는 천사를 불러 저항할 수 있었지만, 기꺼이 폭력의 희생양이 되셨다. 그렇게 함으로 인간의 폭력 메커니즘을 직시하게 하고 폭력의 한계를 인식하도록 하였다. 그들이 하나님께 폭력을 가할 수는 있었지만, 결코 하나님의 마음 곧 사랑을 제거할 수는 없었다.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을 통하여 이 땅에 폭력의 고리가 끊어지고 참된 평화가 오기를 원하였다.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는 무리들을 통하여 진정 평화로운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기를 원하였다. 과연 그리스도인은 평화의 나라를 건설하고 있는가? 아니면 또 다른 폭력의 앞잡이가 되고 있는가?

생명의 위협을 느끼던 유대인은 도리어 75,000명을 잔혹하게 살해하였다. 고대 사회의 정황을 고려하면 이해 못할 바는 아니지만, 그것이 곧 하나님의 뜻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예수님은 선한 폭력도 거부하였다. 악한 체제를 바꾸기 위한 폭력도 거부하고 오히려 자신을 폭력 앞에 내어주었다. 십자가는 구원의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지만, 지라르처럼 폭력적 사회를 무너뜨리고 평화의 나라를 이루기 위하여 기꺼이 자신을 희생하신 희생양으로도 읽을 수 있다. 폭력이 난무하던 로마 지배에서 기꺼이 자신을 희생하셨던 예수님의 십자가 정신을 우리는 다시 생각해야 한다.


때때로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심판의 칼을 드셔서 선과 악을 나누고 불의를 척결하기를 원하지만, 하나님은 인간이 바라는 그런 폭력은 행사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심판하시기보다 그들을 사랑으로 품어 주고 싶어 하시며 마침내 구원하기를 소망하신다. 이사야 선지자는 메시아가 우리를 대신하여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가 나음을 받는다고 선언하였다.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죄를 지은 자들 입장에서 그들을 변호하려고 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다. 특별히 권력을 이용하여 백성을 우롱하는 데 앞장섰던 자가 기독교인이라면 더더욱 변호할 수 없다. 예수님의 희생양 정신은 온갖 적폐와 폭력과 부정으로 얼룩진 그리스도인에게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을 믿노라 하면서도 부패와 타락의 온상이 되었다면, 그는 마땅히 심판받아야 한다. 예수님의 희생양 정신은 예수님처럼 순수하고 진실하게 살아온 사람이 자신을 희생하고 헌신할 때 뜻이 빛나는 법이다. 오늘 이 시대 예수님을 따라 십자가를 지며 희생하는 사람이 극히 드문 것은 그만큼 이 땅의 기독교가 부패하였다는 증거이다. 용서받고, 존경받고, 이해받기만 원하는 그리스도인들로 이 땅을 채울 것이 아니라 기꺼이 주님의 십자가를 지고 자신을 희생하는 진실한 그리스도인으로 채워지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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