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더 이야기 12
아달월 십사일. 놀라운 승리의 날이다. 나라가 망하고 바빌론에 끌려온 지 70년도 훌쩍 지났다. 이제 바빌론도 망하고 새로운 나라 페르시아가 세상을 지배하였다. 다행스럽게도 페르시아 왕 고레스는 칙령을 발표하여 자기 나라로 돌아가도록 하였다. 그동안 나라 잃은 설움으로 고초를 겪던 유대인들은 술렁거렸다. 몇몇 친구들과 이웃은 고국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70년 이상을 살다 보니 이곳 메소포타미아에서 터전을 마련하고 안정되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주저하였다. 그렇게 몇 년을 보내고 나니 고국으로 돌아갈 기회는 점점 멀어져갔다.
그때 하만이 등장하여 남아있는 유대인을 몰살하려고 했을 때 그들의 심정은 참담하였다. 고국으로 돌아가지 않았기에 하나님께 벌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나님이 그들을 외면하시고 떠나셨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많은 사람이 절망하였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다. 모르드개와 에스더를 통하여 하만과 그의 아들과 잔당을 모두 몰살하였으니 기적이다.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일이었다. 모르드개는 페르시아 전역에 흩어져 사는 유대인에게 아달월 십사일과 십오일을 부림절로 지키라고 명령하였다. “이 달 이 날에 유다인들이 대적에게서 벗어나서 평안함을 얻어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고 애통이 변하여 길한 날이 되었으니 이 두 날을 지켜 잔치를 베풀고 즐기며 서로 예물을 주며 가난한 자를 구제하라.”(에9:22) 부림절은 그렇게 시작하였다.
본래 이스라엘은 종교 국가로서 절기는 하나님께서 특별한 목적과 뜻을 가지고 정하였다. 사람이 절기를 정하는 법이 없었다. 유월절, 무교절, 장막절, 초실절, 칠칠절, 나팔절, 안식년, 희년. 모두 하나님이 정하셨다. 부림절만 예외다. 부림이란 ‘제비뽑기, 운명’이란 뜻을 가진 말로써 하만이 유대인을 죽이기 위하여 제비 뽑은 날이 아달월 십사일이었다. 자신들의 죽음이 정해진 그 날, 도리어 구원을 경험하였으니 그들은 그날을 부림절이라 하였다. 부림절은 일방적으로 모르드개와 에스더가 정한 것이 아니다. 아무리 위에서 정하고 지키라고 명령하여도 백성이 지키지 않으면 절기는 사라지기 마련이다. 유대인은 모르드개의 명령에 기쁨으로 순종하여 지켰다. (에9:23) 그들은 자기들만이 아니라 자손과 자기들과 화합한 자들이 해마다 이 사실을 기록하고 지키기로 작정하였다. (에9:27,31)
에스더서는 이렇게 부림절로 끝을 맺는다. 한 가지 의문은 ‘어찌하여 하나님께서 정하지 않고 사람이 만든 절기 이야기를 담은 에스더서가 성경에 포함되었을까?’이다. 우리 그 답을 찾아가보자.
아시리아에 망한 북이스라엘 10지파는 역사 속에 신속히 사라졌다. 남은 것은 유다 지파와 베냐민 반 지파뿐이었다. 그들이 바빌론에 멸망했을 때 심정이 어떠했을까? 이제 남은 유다 지파도 완전히 사라질까 두려워하였다. 수천만 리 행군하는 그들은 공포에 사로잡혔다.
공포만이 아니었다. 바빌론은 대제국이었다. 세계 7대 불가사의라고 하는 공중정원을 비롯해 바벨탑과 이슈타르 문은 사람을 압도하였다. 지금까지 이스라엘이라는 조그만 나라에서 살던 그들은 우물 안 개구리임이 드러났다. 세계 모든 민족이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는 대제국에서 유대인은 보잘것없었다. 바빌론과 페르시아 제국을 거쳐오면서 유대인이 받은 문화적 압력과 유혹은 엄청났다. 그들은 자기 민족어인 히브리어를 잃어버렸다. 이름도 페르시아 식으로 사용하였다. 하닷사는 에스더로, 다니엘은 벨드사살로, 하나냐는 사드락으로, 미사엘은 메삭으로, 아사랴는 아벳느고로 이름을 바꾸어야 했다. 그들은 살아남기 위하여 유다인의 정체성도 숨겼다. 이제 유다 민족이 북이스라엘 10개 지파처럼 역사 속에 사라지는 것은 시간문제다.
문제는 하나님도 그들 가운데 일하시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에스더의 중심 주제는 ‘하나님의 부재’이다. 그것은 신명기에서 이미 예언한 말씀이기도 하다.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버리며 내 얼굴을 숨겨 그들에게 보이지 않게 할 것인즉 그들이 삼킴을 당하여 허다한 재앙과 환난이 그들에게 임할 그 때에 그들이 말하기를 이 재앙이 우리에게 내림은 우리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에 계시지 않은 까닭이 아니냐 할 것이라.”(신31:17) 이제 유대인의 안녕을 책임지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유대인 자신이다. 유대인은 결정해야 했다. 유대인의 정체성을 포기하고 다문화 사회속에 어우러져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한이 있더라도 유대인의 정체성을 드러내며 살 것인가?
원래 유대인은 자기 정체성이란 전혀 없는 이집트 노예였다. 인권이나 인격적 대우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는 인간 이하였다. 그렇게 약하고 보잘것없는 자들을 하나님께서 구원하심으로 그들의 정체성을 확립해 주었다. 그들이 시내 산에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으므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었다. 시내 산은 유대 민족이 출생한 곳이다. 유대인의 정체성은 스스로 확립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나라를 주셨을 때 그들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파기하였다.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정체성이 확립되는 데 그들은 하나님을 버리고 온갖 우상을 섬기며 제멋대로 행동하였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상황을 예측하시고 신명기에서 그들을 떠나고 그들에게서 얼굴을 숨기겠다고 미리 말씀하셨다. 에스더는 하나님의 부재 상황에서 '유대인이 어떤 결정을 하였는가' 보여주는 성경이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하나님의 부재는 패배요 절망이다. 하나님이 외면하시면 그들은 지렁이만도 못한 존재들이다. 그들은 본래 노예들이지 않았던가? 이제 바빌론에 끌려와 노예 생활하는 그들은 결단해야 했다. 영원히 노예로 살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께서 정하여 주신 하나님의 자녀로서 정체성을 회복할 것인가? 비록 하나님께서 얼굴을 돌리시고 숨기시고 외면하였지만, 이제라도 하나님을 찾을 것인가? 부림절은 하나님 부재 상황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가자고 결단하는 절기이다. 시내 산 언약은 하나님께서 주도적으로 진행한 언약이었다면, 부림절은 디아스포라 유대인이 자발적으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언약이다. 그들은 과거 모세 언약을 기억하고 그 언약을 새롭게 수용하였다. 나라 없이 떠돌아다니는 디아스포라이지만, 그들은 영원히 자녀 손 대대로 하나님을 잊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고 부림절을 지켰다.(에9:27,31)
부림절은 새로운 유월절이다. 그들은 기쁨으로 잔치를 베풀며 가난한 자를 구제하고 서로 선물을 주고받으며 절기를 지켰다. 반드시 유대 땅으로 돌아가야만 하나님을 따르는 백성이 아니다. 비록 타국에서 흩어져 살아도 하나님을 마음에 모시고 사는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다. 아무리 대제국이고 아무리 거대한 문화와 문명을 자랑해도 하나님의 백성으로 자기 정체성을 절대 잃어버리지 않겠다는 결심의 날이 부림절이다.
하나님의 부재가, 하나님의 외면이 반드시 나쁜 결과만 가져오지 않는다. 에스더는 어두운 세상에서 작은 빛을 비추는 새벽별이다. 캄캄하고 답답하고 절망적인 상황에서 그래도 사람들을 빛 되신 하나님에게로 인도하는 에스도는 새벽별이다. 현재 우리나라 기독교의 상황이 절망적이라고 말한다. 내적으로 외적으로, 도덕적으로 영적으로 나락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길이 어디 있는지 모르겠다고 말들 한다. 그러나 길은 분명 있다. 하나님의 부재가 역설적이지만 우리에게 답을 제시한다.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하나님께로 돌아가자!
에스더서의 주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