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신화에 젊은 미소년 나르시스 이야기가 있다. 사냥하다 지친 나르시스는 더위를 식히고자 샘으로 갔다. 몸을 숙여 물을 마시려고 하다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란다. 세상에 이렇게 아름다운 사람이 있다니. 나르시스는 물에 비친 모습이 자기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는 물속에 비친 자신을 사랑하기 시작했다. 물속에 비친 자신에게 수없이 입을 맞추었다. 그를 껴안고자 두 손을 담그면 그때마다 물속의 형상은 흐려졌다. 애가 탄 나르시스는 마음이 녹아내렸다. 그는 내 앞에서 도망치지 말고 자신의 슬픔을 보듬어 달라고 울부짖었다. 마침내 나르시스는 물속으로 몸을 던져 죽었다. 그 후 샘 곁에 노란 작은 꽃이 피었는데 사람들은 수선화(narcissus)라고 하였다.
1899년 독일 정신과 의사 네케가 나르시시즘이란 말을 처음 사용하였고, 프로이트가 이 말을 정신분석 용어로 활용하면서 널리 퍼져나갔다. 정신분석학에선 자신을 리비도(Libido 성 본능, 성욕)의 대상으로 여기는 것을 나르시시즘, 보통 자기애(自己愛)라 한다. 정신분석학과 달리 일반적으로는 나르시시즘을 성적인 의미를 빼고 자기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사용한다. 정도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사람은 누구나 자기를 사랑하는 마음을 가진다.
문제는 자기를 사랑하는 마음이 지나치면, 나르시시즘이 되어 정신적으로 문제가 된다. 자기 사랑하는 마음은 내 생각만 옳다고 고집부리는 자기 중심적 상태로 나가기도 한다. 정치계에서 흔히 나타나는데 보수와 진보를 가리지 않고 자기 편만 옳다고 아우성이다. 자기만 옳다고 주장하는 사상을 근본주의라고 부른다. 독일의 철학자 위르겐 하버마스(Jurgen Habermas, 1929~)는 근본주의를 정의하였다. '자기 신념이나 생각이 논리적이지도 않고 근거가 전혀 없음에도 자기만 옳다고 끝까지 고집스럽게 주장하는 정치적 사고방식이 근본주의다.' 근본주의는 정치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도덕 근본주의, 종교 근본주의도 있다. 나는 옳고 다른 사람은 다 틀렸다는 근본주의적 사고방식은 대화를 단절하고 관계를 단절한다. 근본주의가 도를 넘어서면, 나와 다른 사람을 다 죽여버리려고 한다. 히틀러가 그러했고, 스탈린이 그러했고, 현대 극단적인 종교, 정치세력이 그러하다.
자기를 사랑하는 마음이 어느 정도 필요하지만, 다른 사람도 사랑하는 여유가 있어야 한다. 남의 생각을 알려면 남을 잘 관찰해야 한다. 공부는 바로 거기에서 출발한다. 내 생각만 옳다 하지 않고 남의 생각과 관점을 흡수하여 나의 지경을 넓혀나가는 것이 공부다. 식물을 공부하면 식물학, 자연을 공부하면 자연과학, 사회를 공부하면 사회과학, 사람을 공부하면 인문학이다. 공부하는 사람은 마음 문을 열어야 한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어야 한다. 나만 옳다고 고집부리지 않고 다른 사람의 생각과 사상을 이해하려 하고, 받아들이려 애쓰는 사람이 공부하는 사람이다. 민주사회도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소통과 대화로 사회적 합의를 이루어가야 한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의견에 너무 종속되면, 문제가 발생한다. 직업별로 우울증을 검사하면, 연예인 우울증이 상당하다. 늘 사람들의 인기를 먹고 사는 연예인은 다른 사람의 평가에 민감하기 마련이다. 부정적인 댓글 하나에도 의기소침하고, 과거보다 인기가 떨어지면, 우울증에 걸리곤 한다. 다른 연예인과 비교하면서 강박증에 빠지고 마침내 인생무상을 느끼며 불행을 선택하기도 한다. 매주 대통령 인기도를 발표하는 것을 보면서 대통령도 보통 힘든 직업이 아니란 생각을 한다. 정치가가 백성의 소리, 고민, 아픔, 애환을 들어야 할 필요가 있지만, 언제나 백성의 소리만 듣고 '어떻게 할까요?' 묻는다면 지도자 자격이 없다. 지도자는 백성을 인도하고 앞길을 열어가는 사람이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윈스턴 처칠은 야당에 지독한 공격을 받았다. 온갖 루머와 야유와 비난과 욕설에 치를 떨어야 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처칠은 야당의 공격에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기자가 그에게 이유를 물었을 때 그는 이렇게 답했다. “내가 그 사람들을 존경한다면 그들의 의견에 신경을 쓰겠지요. 그러나 그들을 존경하지 않는다면 신경 쓸 이유가 없지요.”
하나님은 99세 아브람에게 나타나 말씀하셨다.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창17:1)
하나님께서 왜 이런 말을 하였을까? 지금까지 아브람이 하나님 앞에서 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제부터 마음을 고쳐먹고 바르게 살라는 뜻일까? 아니다. 그가 고향을 떠날 때부터 언제나 하나님과 동행하였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99세 아브람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을까? 나는 그 대답이 창세기 16장 마지막 부분에 있다고 생각한다.
“하갈이 아브람에게 이스마엘을 낳았을 때에 아브람이 팔십육 세였더라.”(창16:16)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부르실 때부터 그에게 한 가지 소원이 있었다. 75세가 되도록 자녀가 없었기에 자녀가 많았으면 하였다. 지금도 남아 선호 사상이 남아 있지만, 고대에는 아들이 몇 명이냐로 그 사람의 축복 정도를 평가하였다. 시편 저자는 아들이 많은 자가 얼마나 복된지를 노래하였다.
“젊은 자의 자식은 장사의 수중의 화살 같으니
이것이 그의 화살통에 가득한 자는 복되도다
그들이 성문에서 그들의 원수와 담판할 때에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로다.”(시127:4-5)
아브람은 아들이 없었다. 기껏 하갈이라는 첩에게서 아들 하나를 얻었을 뿐이다. 그때가 86세였다. 그리고 13년이 흘렀다. 사람들은 아브람을 조롱하였다.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왔다더니 아들 하나도 없고 너의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설령 말하지 않더라도 그들이 바라보는 동정의 눈빛 하나로도 아브람은 마음이 상하고 괴로웠을 터이다.
그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너는 다른 사람의 말이나 평가에 신경 쓰지 말고 다만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내 앞에서’ 종교개혁자들은 코람 데오(coram Deo, 하나님 앞에서)라는 라틴어를 즐겨 사용하였다.
‘하나님 앞에서’는 무슨 뜻일까? ‘어서 와 한국이 처음이지 영국 편’에 보면 젊은 모험가 제임스 후퍼의 초청을 받아 한국에 온 데이비드가 있다. 젊은이들 틈바구니에 65세 데이비드는 어딘가 어울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초청받은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데이비드의 아들 롭 곤틀렛은 제임스 후퍼의 절친한 친구였고 모험가였다. 제임스 후퍼와 함께 최연소 나이로 에베레스트를 오르기도 하였다. 20살 롭은 몽블랑 빙벽을 타다가 추락하여 죽었다. 그 후 롭의 친구들은 그를 기리기 위하여 ‘원마일 클로저(One Mile Closer)'라는 기부 사이클 행사를 진행하였다. 데이비드는 아들을 기리는 모임에 참여하면서 젊은이들과 어울렸다. 이번 한국 여행 기간 내내 데이비드는 아들 롭을 생각하였다. '아들이라면 북한산을 정복했겠지' 하면서 북한산을 올랐다. '아들이라면 스키를 타고 패러글라이딩을 했겠지.' 그는 아들을 생각하며 젊은 친구들과 함께 모험하였다. 그는 무엇을 먹든 무엇을 하든지 아들을 생각하였다. 그만큼 그는 아들을 사랑하였다.
'하나님 앞에서'는 바로 이와 같지 않을까?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 너무나 사랑하기에 하나님을 생각하는 사람. 주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할 때 삶 속에 언제나 하나님을 생각한다. '하나님의 임재 연습'이란 책을 쓴 로렌스 형제는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데는 기술도 필요하지 않고 지식도 필요하지 않다. 오직 필요한 것이 있다면 그 어떤 것보다 하나님만을 사랑하고자 하는 그분께만 드리는 마음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자다. 공부가 남의 생각과 사상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라면 하나님 앞에 사는 것은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사람(백성)의 소리를 들으면서 그들의 아픔과 고민과 눈물을 이해하고 품어주는 것도 필요하지만,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귀도 필요하다. 하나님의 음성은 길이요 진리요 빛이기 때문이다. 지도자는 길을 인도하는 인도자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길을 인도하고 앞장서서 걷는 사람이 리더이고 영적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고 존경받는 사람이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사랑하여 늘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나아가 완전을 추구하는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