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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gos Brunch Apr 20. 2018

광야 같은 세상에서

이스라엘은 광야 민족이다. 아브라함은 당대 최고의 문명 도시 갈대아 우르를 떠나 광야로 나아갔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구원하심으로 애굽의 종 되었던 자리에서 광야로 나아갔다. 다윗은 왕이 되기 전까지 광야에서 도피생활을 하였다. 엘리야는 광야에서 죽음을 갈구하였다. 이스라엘은 광야와 비옥한 땅이 혼재되어 있다. 북부 바산 지역과 해안 평야 지역, 요단 강이 흐르는 주변은 비교적 살만한 동네이다. 이스라엘이 처음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그 지역은 이미 원주민들이 터를 잡고 있었다. 이스라엘은 그들의 텃새에 밀려 내려오고 내려와 광야와 근접한 남쪽 산악지역과 광야에서 살았다. 성경에 나오는 주요 지명들은(예루살렘, 베들레헴, 여리고, 헤브론, 브엘세바) 모두 광야와 인접한 메마른 지역이다. 광야는 이스라엘과 뗄레야 뗄 수 없는 지리적 상관관계를 가진다. 따라서 광야는 이스라엘의 신앙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


광야는 사람이 살기 어려운 공간이다. 예레미야는 이곳을 ‘씨뿌리지 못하는 땅’이라고 하였다.(렘2:2) 씨뿌리지 못하는 땅이란 노력해 보았자 아무런 열매를 거둘 수 없다는 뜻이다. 그곳은 약속도 없고 소망도 없고 새로운 것도 없는 황무한 땅이다. 오히려 광야는 적대적이고 파괴적인 땅이다. 예레미야는 광야를 칼이 있는 곳이라 하였다. (애5:9) 여리고로 내려가다 광야에서 강도 만난 이야기는 이스라엘에서 매우 흔한 이야기다. 광야는 모양도 없고 생명도 없다. 광야에 산다는 것은 원수의 땅에 던져진 것과 같다. 광야는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곳이고, 어느 날 누가 죽어 나간다고 해도 하나 이상할 것이 없는 땅이다. 광야는 낮에도 밤에도 언제나 위험으로 가득찬 곳이다.(시121:6) 광야는 한 마디로 혼돈(카오스)과 공허한 두려움으로 가득한 곳이요, 열린 미래에 대한 아무런 기대가 없는 곳이다. 엘리야가 광야에서 죽기를 소망한 것은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다.


이렇게 혼돈과 무질서, 절망과 죽음, 원수와 위험, 어둠과 공허로 가득한 광야가 왜 이스라엘에게 의미있는 장소로, 아니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로 여겨졌을까?


1. 아브라함과 광야


아브라함은 75년 동안 갈대아 우르에서 터를 잡고 편안하게 살았다. 그의 성품과 삶의 자세로 보아 어느 곳에서든지 그는 근면 성실 정직하였을 것이다. 그는 75년 동안 성실히 노력해서 쌓아 올린 부와, 주변 사람에게 인정받을 만큼 명예를 누리며 살았을 것이다. 사람마다 아브라함을 향하여 엄지를 올리며 칭찬하였을 것이다.

“저 사람은 믿을 만한 사람이야.”

“저 사람은 훌륭한 사람이야.”

“저 사람은 성공한 사람이야.”

그는 이제 자신이 쌓아 올린 위치에서 편안한 여생을 즐기며 살 계획이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그의 모든 삶의 근거를 버리고 광야로 나아가라고 하셨다. 그가 애써 장만한 집과 땅, 친인척을 포함한 모든 인간관계, 심지어 부자 관계까지 다 끊고 광야로 나아가라고 하셨다.  그렇다고 해서 장래에 무슨 큰 소망이나 위로나 기대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는 갈 바를 알지 못하였다. (히11:8)  그는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을 건너 메마른 광야로 나아갔다.  그 당시 강은 나라와 민족을 구분 하는 경계선이었다. 강을 건너면 민족이 달라지고, 언어가 달라지고, 문화와 풍습이 달라진다. 강을 건넌 사람은 이방인이거나, 도망자이거나, 목숨을 걸고 가야만 하는 특별한 사정이 있는 사람이거나, 다른 나라를 침략하려는 군인이다. 그러므로 강을 건넌 사람에게 호의적으로 대할 사람은 없다. 아브라함은 큰 강을 두 개나 건너야 했다. 그것은 다시 돌아갈 희망을 완전히 끊어버렸다는 뜻이다.


아브라함이 광야로 나아가서 얻은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경험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하나님께 인정받는 것이다. 지금까지 그는 사람을 만났다. 사람을 만날 때 반드시 필요한 것은 그가 쌓아올린 업적, 경력, 재산, 명예 등이다. 사람이 사람을 평가하는 것은 그런 것들이다. 그것은 사람을 있는 모습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두껍게 쌓아올린 가면을 보는 것이다. 사람은 다른 사람의 겉모습으로 속을 판단하는 경우가 많다. 두꺼운 가면을 쓴 겉모습이 진짜 자기 모습인 줄 착각하며 사는 사람도 많다. 남들이 자신에게 하는 말이 진실인줄 오해하는 사람도 있다. 하나님은 그런 겉모습이 아니라 우리의 속모습, 우리의 진짜 모습을 보고 싶어한다. 그래서 아브라함에게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고 하였다.


광야는 그렇게 하나님을 직접 만나는 곳이다. 아무 것도 걸치지 않은 벌거벗은 모습, 수치와 죄악으로 얼룩질 모습 그대로 나가는 곳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사랑하신다. 우리의 존재 자체를 사랑하신다.

부족하고 연약하고 더럽고 추하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신다. 광야는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을 만나는 장소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이런 저런 가면으로 가려졌던 모습, 사람들이 평가하던 모습이 아닌 진솔한 자기와 솔직하게 대면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2. 이스라엘과 광야


아브라함이 광야를 경험한 것과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경험한 것은 약간의 차이가 있다. 아브라함은 세상의 모든 것을 버리고 광야로 나아갔다. 부와 명에, 인간관계를 끊고 나아가 자신을 만나고 하나님을 만났다. 반면 이스라엘은 애굽의 종 생활을 하고 있었기에 버릴 것이 없었다. 어느 곳에 가든 애굽의 종 생활보다 힘들까? 자신을 위하여 살지 못하고 평생 남을 위하여 날마다 노동하며 살아가던 이스라엘에게 무슨 소망이 있을까? 인권 사각지대에서 때리면 맞아야 하고, 뺏으면 뺏겨야 하는 그들에게 권리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아무 것도 버릴 것이 없다고 생각하였지만, 그들에게도 버릴 것은 있었다. 그것은 노예 의식이다. 살기 위해서 매일 같이 고개 숙여야 했던 굴종 의식이다. 비굴 해도, 얼굴에 물을 뿌리고 모욕을 주어도, 살기 위해서 때로 무릎을 꿇어야 했다. 억울하다고 항변 하지도 못하고, 자기의 사정을 털어놓고 싶어도 들어줄 사람 하나 없었다. 언제나 남의 눈치만 보며 하루 하루를 연명하였다. 언제나 웃는 낯으로 마주 잡은 두 손을 비비며 살아갈 수 밖에 없었다. 치사하고 더러워서 사표를 집어 던지고 뛰쳐나갈 용기 하나 없었다. 바보, 병신, 머저리, 인간 같지 않은 놈, 온갖 욕설과 폭언에도 고개 숙일 수 밖에 없었다.


놀라운 사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사랑하셨다. 그들을 구원하셨다. 그들을 하나님의 자녀라 불러주셨다.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주시고 운영하게 하셨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광야는 하나님의 진심을 알아가는 자리였고,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훈련받는 장소였다. 사람에게 인정받으려 하지 말고, 사람이 뭐라 하든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고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장소였다. 하나님은 결단코 그들을 포기하지 않으신다. 그들을 때리실 때도 있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사랑하셔서 어르시고 품으시고 업으시고 끝까지 인도하신다. 누가 하나님의 그 고집과 열심을 꺾을 수 있겠는가? 광야는 그렇게 하나님을 경험하는 장소이다.


3. 탕자와 광야


탕자도 아브라함처럼 아버지의 집을 떠났다. 그는 아브라함처럼 친인척 모든 인간관계를 끊고 집을 나갔다. 지금까지 자라오면서 정 붙였던 고향 땅을 기꺼이 등지고 떠나갔다. 그는 세상의 쾌락과 향락을 추구하기 위하여 농촌을 떠나 도시로 나아갔다. 겉으로는 아브라함과 비슷한 것 같지만 그의 길은 아브라함과 전혀 달랐다.  그는 하나님을 만나려고 떠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버리려고 떠난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탕자가 간 도시는 또 다른 광야였다.


사람이 많은 곳이라고 외로움이 없는 것은 아니다. 사람이 많다고 해서 그들 모두가 호의적이지는 않다. 오히려 그곳은 적대적이고, 이기심과 모략으로 가득한 곳이다. 돈이 있을 때는 이용하고, 빼먹을 것이 있을 때는 친구처럼 가까이 다가오지만, 그 반대의 경우는 너무나 냉정하게 등을 돌리는 곳이 도시다. 탕자는 도시에서 냉대와 멸시와 손가락질과 왕따를 경험했다.  사람이 없는 곳이 광야가 아니라, 하나님이 없는 곳이 광야다. 탕자의 여행은 또 다른 광야 여행이었다.  


그는 광야 같은 세상에서 인생 밑바닥을 경험하였다. 사람의 치사함, 더러움, 이기심, 배반을 모두 경험하면서 그는 홀로임을 느꼈다.  그것은 정말 아무 희망도 없고, 내일도 없고, 어둠과 혼돈과 답답함만 가득한 광야였다. 그 광야에서 돌아올 수 있었던 근거는 아버지였다. 자기를 용서하고 품어주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먹을 것을 주지 않을까 하는 작은 희망이었다. 물론 아버지는 그의 과거와 잘못과 죄악을 하나도 묻지 않으시고 그를 품어주셨다. 탕자가 기대하지도 못하고 상상하지도 못한 아버지의 크나큰 은혜다.


4. 광야와 믿음


광야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기대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그저 죽지 못해 사는 것이다. 갈증으로 목이 타는 심한 고통에도 눈물을 삼키며 견디는 것이다. 먹을 것이 없어 돼지 먹이인 주염 열매를 먹으면서도 버티는 것이다. 매일 아침 길목에서 종이에다 “배고파요. 어떤 것이라도 좋으니 조금만 도와주세요.” 팻말을 들고 있는 노숙자를 본다. 어쩌면 그의 모습은 광야같은 세상에서 살아가는 탕자, 곧 나의 모습인지도 모른다.  매일 아침 걸으며 나는 생각한다. 광야의 삶을 살아가는 자에게 믿음이란 무엇일까? 내일에 대한 기대 - 광야에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광야의 삶에 믿음은 하루를 버텨내는 힘이다. 비록 내일이 보이지 않고, 비록 소망이 없다 할지라도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내 딛는 힘이다. 아브라함도 이스라엘도 다윗도 탕자도 모두 그렇게 참고 견디며 하루하루를 버텨냈다.


그 힘의 근거는 가끔씩 누군가 던져주는 빵 한 덩어리, 물 한 모금 때문에 얻어지기도 한다. 누군가 나를 향해 보여주는 작은 미소, 간단한 고갯짓만으로도 가슴이 따뜻해진다. 혹시나 나를 아는 사람이 나에게 형식적으로 던져주는 격려의 말도 순간 위로가 된다. 나를 인정해주고, 나를 알아주는 사람 한 명만 있어도 자살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사람이 사람에게 살 소망을 줄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신비로운 일이다.


사람이 주는 위로도 대단하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야 말로 믿음의 참된 근거가 된다.  하나님께서는 작은 빵 부스러기가 아니라 생명의 떡과 생명수를 주신다.  

“그래도 나는 너를 사랑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넌 나의 사랑하는 아들이란다.”

광야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사랑 고백을 듣는 것은 기대하지 못한 축복이다. 그 축복 때문에 비록 아직 내일에 대한 소망이나 기대가 희미할지라도 또 하루를 버텨낸다.  그 버텨내는 힘이 바로 믿음이다. 결국 그 믿음이 광야같은 사막에 꽃을 피우고 샘물을 솟아나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사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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