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으로 읽는 성경 이야기
나는 초등학교 시절 아버지를 따라 전학을 자주 다녔다. 어린 시절 새로운 학교에 가서 새롭게 적응해야 하는 것은 나에게 커다란 두려움이었다. 강원도 강릉에서 경상도 점촌으로 그리고 다시 서울로 학교를 옮겼다. 학교를 옮겨 다닐 때마다 각 지역의 사투리도 달랐고 문화도 달랐다. 새롭게 전학 간 그곳은 나에게 혼돈 그 자체였다. 내가 서야 할 곳이 어디인지, 어떻게 행동하고 말해야 하는지 알지 못하였다. 나는 외로운 섬과 같은 존재였다.
객관적으로 보면 어느 학교나 잘 통제되고 있었다. 부모님은 언제나 선생님 말씀을 잘 들으라고 가르쳤다. 뜻도 모르면서 날마다 국민교육헌장을 암송해야 했고, 때에 따라서는 모내기, 피살이, 퇴비 모으기, 학교 운동장에서 돌을 줍기도 하였다. 학교는 질서정연했고, 학생들은 순종적이었다. 겉보기에는 비슷한 모습이었지만, 나에게 새로운 학교란 언제나 혼돈과 두려움 그 자체였다. 나는 신세계에 던져진 얼뜨기처럼 적응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중세 도시를 그린 모습을 보면 하나의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커다란 성을 중심으로 마을이 형성되어 있고, 성벽이 그 마을을 둘러싸고 있다. 아침이면 성문이 열리고 사람들은 성벽 주변의 밭에 나가서 일을 한다. 밭에서 조금 더 멀리 나가면 커다란 숲이 있고, 그곳은 미지의 세계로 사람들은 감히 숲속의 세계에 들어가려고 하지 않는다. 성을 중심으로 한 마을 공동체는 안전한 곳이고, 성 밖은 위험한 곳으로 미지와 혼돈의 세계로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중세인에게 토지나 숲, 산이나 강은 두려운 미지의 공간이며 거기에는 인간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불가사의한 힘이 작용한다고 생각하였다. 1) 그들이 사는 동네는 질서가 잡혀있고 조화로운 곳으로 이해하였다. 성안에 사는 사람들은 오래 전부터 알아온 친근한 사이이기에 새로 알아야 할 것이 없었다. 반면에 성 밖의 세상은 온통 새로운 것, 익숙하지 않은 것으로 가득 찬 어지러운 세상(chaos)이었다.
고대 로마의 시인 오비디우스(Publius Ovidius Naso, BC43~AD17)는 그리스 신화와 당시 떠돌던 소아시아의 설화, 트로이 전쟁사, 로마의 건국 신화를 모은 책 ‘변신 이야기’를 썼다. 변신 이야기에는 천지 창조에 대한 대 서사시로서 성경과 함께 서양 중세 문화를 형성하는 하나의 축이 되었다. 거기 이런 구절이 있다.
“그렇게 사물은 무질서한 혼란으로부터 생겨났고, 각각의 사물은 자신의 장소를 찾음으로써 영원한 질서 속에 묵이었다.”
오비디우스가 모은 신화 이야기에 의하면 우주 만물은 혼돈에서부터 시작하였다.
혼돈에서부터 우주가 시작되었다는 이야기는 고대 희랍 민족인 펠라스기족(Pelasgi, BC3500) 신화에서 유래한다.2)
“태초에 만물이 여신 에우리노메(Eurynome)가 ‘혼돈으로부터 발가벗은 채 태어났다. 그녀는 발을 디딜 수 있는 실재적인 게 전혀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하늘로부터 바다를 분리해내고 그 물결 위에서 홀로 춤을 추었다.”3)
여신 에우리노메를 문자 그대로 이해하면 ‘널리 방랑함’이란 뜻이다. 한곳에 정착하여 공동체를 이루지 못하고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는 사람의 마음은 어떠할까? 초등학교 때 전학 다니면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며 살아야 했던 내가 느꼈던 두려움을 그도 느꼈을까?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살아야 하는 신화 속 인물의 마음을 확실하게 알 수 없지만, 상상력을 동원하여 추측해 볼 수는 있다. 자신을 보호해 줄 공동체는 어디에도 없다. 혼자 사냥하거나 채집 생활을 하면서 먹고 살아야 한다. 매일 매일 먹고 사는 것이 전쟁이다. 언제 어디서 사나운 들짐승들이 공격할지 모른다. 어쩌다 사람을 만나면 들짐승보다 더 큰 두려움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그가 만나는 동물, 사람, 환경은 모두 혼돈 그 자체가 아니었을까? 그가 가는 곳(장소, 공간)은 어디든 공포와 두려움으로 가득 찬 미지의 세계다.
그는 혼돈(chaos)을 어떻게 생각하였을까? 우주과학이 발달한 오늘날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같았을까? 우주를 이루고 있는 요소들이 마구 뒤섞여 있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었을까? 나는 창세기를 읽으면서 비슷한 고민을 하였다. 처음 창세기를 읽는 사람들이 요즘 창조 과학자들이 주장하는 바처럼 생각하고 읽었을까?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창1:1-2)
과학적 지식이라곤 눈곱만큼도 찾을 수 없는 그들은 창세기를 어떻게 읽었을까? 나는 성경이 객관적 과학도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고대인들 역시 성경을 읽으면서 자기들의 사회적 상황, 공동체적 상황, 자연적 상황에 의존해서 성경을 읽고 해석하였을 것이다. 성경을 읽을 때마다 생각해야 할 것은 첫 번째 독자들은 말씀을 어떤 마음으로 받았으며, 어떻게 해석하였는가를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 그 말씀을 재해석해서 적용해야 한다. 창세기를 처음 읽는 사람은 과학적 사고방식으로 생각하지 않았음은 분명하다. 그들은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특별한 공간과 장소에서 태어나 자라고 성장하였다.
영국의 문화 인류학자 빅터 터너(Victor Witter Turner, 1920-1983)는 ‘공동체는 단지 함께 떼를 이루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4) 공동체는 함께 모여 살 장소가 필요하고, 그 장소에 적응하며 살면서 만들어진 세계관, 가치관을 공유한다. 그러므로 창세기는 고대인들의 가치관과 세계관을 반영하고 있으며 그 당시 사람들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도록 쓰였다. 그런 면에서 나는 창세기를 현대 과학의 눈으로 읽는 것처럼 어리석은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보호받지 못한 상태에서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는 사람은 온 세상이 혼돈이었고, 인생이 공허하였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보호와 돌봄을 베푸셨다. 그것은 고대인들에게 질서와 조화로움이었다. 하나님 안에 있으면 그곳이 어디든 안전하였다. 에덴은 바로 그런 곳이다. 하나님을 떠나는 것은 안전을 포기하는 것과 같다.
고대 그리스 정치가 아르키타스(Archytas, BC428~347)는 말하였다.
“존재하는 모든 사물은 장소 안에 존재하든가, 그렇지 않고 장소를 빼앗긴다면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5) 창세기는 읽는 독자(고대 처음 독자이든 현대 우리이든)에게 질문한다. 너는 어느 장소에 있느냐? 하나님의 보호하심 안에 있느냐? 아니면 하나님의 보호하심 밖에 있느냐?
노파심에 다시 한번 언급하면 ‘안에 있다. 밖에 있다.’는 것은 자신의 느낌이나 자신이 믿는다고 고백하는 신앙에 달려 있지 않다. 그것은 빅터 터너가 이야기한 바대로 그 장소가 가지고 있는 세계관과 가치관을 공유하고, 그것을 지켜나가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성경적으로 표현하자면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깨달아 그 뜻을 준행하며 살아가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그것으로 안과 밖, 질서와 혼돈의 세계를 규정한다.
주
1) 아베 긴야, ‘중세 유럽 산책’, 양억관 옮김, (한길사;서울) 2005년, 65쪽
2) 펠라기스족은 기원전 4000년대 중엽 팔레스타인에서 그리스로 침략해 들어온 구석기인들이다.
3) 에드워드 S 케이시, ‘장소의 운명’, 박성관 옮김, (에코리브르;서울) 2016년 36쪽
4) ibid, 23쪽
5) ibid, 68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