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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gos Brunch Jul 11. 2018

권위는 무엇인가?

“나는 불교를 믿는 데 어째서 나에게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라고 하십니까?” 이러한 질문은 불교도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할 수 있는 질문이다. 기독교인도 때로는 “왜 우리가 수천 년 전 쓰인 성경의 권위를 받아들여야 하는가?” 질문하기도 한다. 이러한 질문에 당황하거나 분노해서는 안 된다.


예수님도 사역하실 때 이런 질문을 종종 받았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들을 합니까? 누가 권한을 주어서 이런 일들을 합니까?”(막11:28, 공동번역) 사도들도 비슷한 질문을 받았다. “당신들은 무슨 권한과 누구의 이름으로 이런 일을 하였소?”(행4:7, 공동번역)


권한에 대한 질문을 분석해 보면, ‘당신 뒤에 누가 있으시오?’ 하는 질문이다. 당신이 나에게 강요나 요구나 명령이나 권면을 할 수 있는 권한이 있소? 그리스도인이 할 수 있는 유일한 대답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이다. (행4:10) 이는 그리스도인의 궁극적 권위를 나타내는 말이다.


여기서 생각할 점이 있다. 첫 번째, 그리스도인은 정말 예수 그리스도를 궁극적 권위로 인정하고 순종하는가? 정말 예수님의 말씀 앞에 무릎 꿇고 머리 숙여 순종하고 복종하는가? 자신도 순종하지 않으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한다면 사람들이 그 권위를 인정할까? 두 번째,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한다고 할 때 세상 사람들은 그 권위를 받아들일까?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에 복종해야 할 이유가 있다면 무엇일까? 이러한 질문에 우리는 대답할 말이 있어야 한다.


첫 번째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는 개인적인 헌신의 성격을 가진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는 모두 신앙고백(credo)을 한다. 라틴어의 크레도(credo)는 영어로 표현하면 ‘I believe in(나는 믿는다)’으로 1인칭 단수이다. 라틴어 ‘cre’는 '심장'을 뜻하고 ‘do’는 '내가 드린다'는 뜻이다. 곧 ‘내가 심장을 드린다'는 말이다. 신앙고백은 나의 헌신과 나의 결단을 표현하는 행위다. 누군가 신앙고백을 한다면, 나는 그 말에 담고 있는 뜻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고 싶다.


그러나 불신자들은 코웃음치며 ‘너나 잘 믿으세요.’라고 할 것이다. 당신의 개인적인 선택이 어떠하든, 당신이 그 선택에 심장을 바쳐 헌신하든 말든, 그건 너의 문제일 뿐이다. 당신의 선택과 헌신을 나에게 강요하지 말라! 그건 개인 취향의 문제이고, 개인 선택의 문제이다. 당신이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고, 날마다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는 것을 무어라 평하지 않겠다. 다만 나를 귀찮게 하거나, 나에게 믿으라고 요구하지 마라. 당신이 예수를 좋아하든, 부처를 좋아하든, 마호메트를 좋아하든 내 알 바 아니다. 오늘 이 시대는 모두가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주장하고 행동하고 믿는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이다. 베토벤을 좋아한다고 해서 뽕짝 좋아하는 나를 비판하거나 비웃지 마라. 반 고흐를 좋아한다고 해서 학교 미술 선생님을 존경하는 나를 우습게 보지 마라.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종교는 취미생활의 하나로 전락하였다.


로마는 관용적이어서 세계의 모든 종교를 다 수용하였다. 고대 원시인이 믿던 대지의 여신 가이아(Gaia)든, 그리스인들이 믿던 제우스(Zeus)든, 이집트의 신 오시리스(Osiris)든 상관 없었다. 그들이 말하는 윤리가 저질스럽던지, 고상하든지 개의치 않았다. 그것이 개인의 종교이고, 취향이라면 얼마든지 존중할 수 있다. 로마인들이 가진 사고방식과 오늘날 포스트모더니즘은 유사한 점이 상당히 많다. 종교 간의 대화와 관용은 최고의 미덕인 사회다.


만일 기독교가 개인의 신앙으로 머문다면, 로마는 얼마든지 받아들일 마음이 있었다. “나만 예수 잘 믿고 천국 간다’는 식으로 종교를 개인화(cultus privatus)하면 문제될 것은 없었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상관 않겠다. 나는 그냥 내 신앙만 잘 유지하겠다.”는 태도를 가진다면, 박해받을 이유는 없었다. 로마는 모든 종교에 활짝 열려 있었다.


기독교는 그러한 로마와 타협하면서 조용히 신앙생활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처음 기독교인들은 그럴 수 없었다. 그들은 죽는 한이 있어도 포기할 수 없는 것이 있었다.

“예수가 주님이다.”

“예수가 세상을 통치하신다.”

“우리는 예수(하나님)가 통치하는 세상을 만들려고 힘쓰는 자들이다.”

로마의 처지에서 보면, 이러한 주장은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주장이었다. 그건 반역이고 세상을 요동케 하는 일이다. 처음 기독교인들이 핍박받을 이유는 충분하였다. 그들은 스스로 고난과 박해의 길을 선택하였다.

도대체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세상(하나님 나라)은 무엇이길래 처음 기독교인들은 생명을 내걸었는가? 여기서 두 번째 질문에 답을 생각해야 한다. 그리스도인만이 아니라 세상 모든 사람이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나라에 들어와야 할 이유는 무엇일까? 하나님 나라는 도대체 어떤 나라인가?


요즘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나라’를 영적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많다. 하나님 나라는 죽어서야 가는 나라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만일 하나님 나라를 영적으로 해석한다면, 세상 사람에게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라고 설득한 근거는 사라진다. 왜냐하면 세상 사람은 매우 현실적이고 실제적이고 구체적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눈에 보이는 것도 제대로 믿지 못하는 의심 많은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하나님 나라를 이 땅 사람에게 보여주어야 할 책임이 있다. 하나님의 뜻이 그대로 실현되는 공동체의 모습을 조금이라도 보여주어야 한다. 하나님이 만드시는 나라의 그림자라도 보여주어야 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랑, 자비, 긍휼, 용서, 이해, 인내, 오래 참음, 선을 실천하는 공동체를 보여주어야 했다. 세상과 다른 세상(하나님 나라)을 보여주어야 했다.


구약 선지자는 정의와 공의가 강수와 같이 흐르는 나라를 꿈꾸었다. 가난한 자와 약자가 착취와 억압 속에 피눈물 흘리는 일이 없는 나라를 소망하였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도 가장 작은 자를 소중히 여기는 나라였다.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마25:40, 공동번역) 예수님은 약한 자들, 작은 자들, 보잘것없는 자들과 자신을 동일시하였다. 그들과 함께하는 나라가 바로 하나님 나라다. 세상은 오직 돈에만 관심이 있다. 사람(약자)의 생명에 대해서, 사람(약자)의 인권에 대해서, 사람(약자)이 살아가면서 마땅히 누려야 할 행복과 보람에 대해서는 큰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경제 지표나 성장율은 신경쓰면서, 어두운 뒷골목에서 신음하는 사람은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 나라가 세상이다.


자기 안위만 힘쓰고, 자기 부흥과 성장만 신경 쓰고,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종교가 아니라, 현장에 나가 다치고 상처받은 사람을 감싸 안는 공동체가 초대 기독교인이 만들려고 하는 하나님 나라였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서 다스리는 나라에 대한 구체적인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고, 하나님 나라가 진실로 이 땅에 구현되어기를 간절히 소망하며 헌신하는 자이다. 그는 당당하게 세상 나라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나라가 얼마나 좋은지 불신자에게 힘있게 호소하고 설득하는 사람이다. 공산주의자들이 만들려고 하는 나라와 돈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자본주의 나라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통치하는 나라는 세상과 분명 다르다. 하나님 나라는 평화의 나라이고, 정의로운 나라이고, 모든 사람이 행복한 나라이다. 그곳에는 상처받을 일이 없고, 억을하여 눈물 흘리는 일이 없다. 그곳에는 돈 없어서 치료받지 못하는 환자들이 없는 나라이다. 그 나라는 찬양으로 가득한 나라이고, 사랑으로 이해하고 감싸주는 나라이다. 누가 옳으냐 그르냐로 논쟁하는 일 없이 누구에게 선이 되고 위로가 될까 서로서로 돌보아주는 나라이다. 하나님께서 만드고자 하는 나라이다. 처음 그리스도인들이 만들려고 했던 나라이다.  

우리가 만들고 싶어 하는 나라는 어떤 나라일까?


* 위의 글은 레슬리 뉴비긴이 쓴 '오픈 시크릿'을 참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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