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교회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은 1900년대 구한말을 시대적 배경으로 한 의병 이야기다. 그때는 격동의 시대였고, 사상적으로 큰 혼란을 겪던 시기였다. 비록 드라마가 역사적 사실을 그대로 담고 있지 않지만, 그 당시 젊은이들의 갈등과 고민과 아픔과 눈물을 상상할 수 있어서 흥미 있게 보고 있다.
19세기 말 조선은 망가지고 망가져 더는 손 쓸 수 없는 지경이었다. 조선 말 세도정치는 타락하였고, 백성은 죽지 못해 사는 환경에서 마지막 몸부림으로 각지에서 민란을 일으켰다. 사회적 혼란과 유교적 봉건체제의 기반이 뿌리째 흔들리고 있었다.
반면 18세기 중엽 영국에서 시작한 산업혁명은 사회 경제 구조를 변화시켰다. 서구는 기술혁신으로 막강한 국력을 갖추었다. 자본주의는 그들을 이끄는 사상이 되었다. 그들은 힘 있는 자가 모든 것을 독식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아시아, 아프리카, 아메리카를 식민지로 만들기 위하여 혈안이었다.
조선이 그들의 먹잇감으로 바뀌는 건 시간문제였다. 수백 년 동안 속국처럼 여겼던 중국, 새롭게 강자로 떠오르며 조선을 집어삼키려는 일본, 겨울에도 얼지 않는 항구를 원해 남진하던 러시아, 그리고 서구 열강은 조선을 약탈하고자 싸움을 벌였다.
1895년 11월 15일, 친일 정권인 김홍집 내각은 3차 갑오개혁을 단행하였다. 말이 개혁이지 사실은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조선을 지배하기 위한 사전작업이었다. 개혁은 ‘태양력 사용’, ‘단발령’, ‘변복령’, ‘건양 연호 사용’이었다. 1) 다른 것은 문제 되지 않았지만, 단발령은 큰 반발을 일으켰다.
당시 일반 백성은 오랜 유교 전통을 따라 상투 트는 것을 효의 상징으로 여겼다. 그러나 상투는 원래 중국인의 머리 모양으로 속국인 조선에게 복종의 표시로 강요한 것이었다. 처음에는 복속의 뜻이었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민족 정체성의 상징으로 바뀌었다. 아이러니칼하게도 만주국인 청이 명을 정복하면서 복속의 표시로 변발을 시행 하였지만, 조선은 망한 명나라의 전통을 이어받은 진정한 유교 국가임을 자부하면서 상투를 고집하였다. 2) 상투는 조선의 전통이며 사회적 법적 성인의 상징이었다. 혼인하면서 상투를 틀고, 상투를 튼 사람만 제사에 참여할 수 있었다. 상투는 조선이라는 국가 존재 자체와 같았다.
아무리 왕의 명령이라 할지라도 상투를 자른다는 것은 조선의 정체성을 버리는 것으로 생각하여 전국의 유생들은 반발하였다. 송병선은 천마산으로 들어가며 “내 머리는 자를 수 있지만 내 머리칼은 자를 수 없다”라고 하였고, 기우만은 “나라는 망하지 않는 법이 없으니 머리를 깎이고 나라를 지키기보다는, 차라리 머리를 보존하다가 나라가 망하는 편이 낫다”면서 상소를 올렸다. 학부대신 이도재는 “단발의 이로움은 없고 해로움만 보이기 때문에 명령을 따를 수 없다”고 항명하며, 대신 직을 사임하였다. 병자 수호조약이 체결되었을 때 도끼를 들고 광화문 앞에 나아가 상소하였던 최익현 역시 크게 반발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주장하는 “신체발부 수지부모(身體髮膚受之父母)”의 원뜻은 털을 깎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몸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 효의 시작이란 뜻이다. 조선의 ‘상투’와 ‘망건’은 효경은 물론이고 어느 유교 경전에도 나오지 않는다. 고려와 조선이 섬긴 유교 국가인 송,명조의 전통에도 없는 일이었다.
구한말 개화 사상가인 유길준(1856-1914)은 최익현에게 글을 썼다. “부모의 병환이 위독하면 손가락을 끊고 다리를 잘라 부모의 생명을 구하는 것이 효자의 떳떳한 도리라면, 이제 나라가 병들어 시든 것을 구하려는 마당에 어찌 한 줌의 머리털을 그리도 아끼십니까?” 3)
그러나 같은 개화파 윤치호는 조금 다른 시각을 보였다. “나 자신이나 다른 조선인은 단발에 반대하지 않지만, 일본인이 단발하도록 강요하기 때문에 반대한다.” 4) 단발령을 시행하기 석달 전 일본의 낭인은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시신을 우물에 던졌다가 다시 꺼내어 불태웠다. 이런 참극에 이어 시행한 단발령이 나라를 개화하고 힘을 키우기 위함이 아니라, 일본의 강요에 의해 억지로 시행하였던 것이다. 후일 친일파로 낙인찍힌 윤치호였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부국 강병을 위한 개화사상을 주장하며 민족 주체성을 내세워 저항하였다.
시대가 바뀌면서 새로운 생각을 받아들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조선말 ‘단발령’사건으로 알 수 있다. 구한말 ‘단발령’사건을 길게 이야기한 것은 초대교회 ‘이방인 고넬료’ 사건을 이야기하고 싶어서다. 유대인은 자신을 ‘선민(選民)’으로, 이방인을 개와 같이 여기는 사상적 전통을 가지고 있었다. 5) 초대교회 역시 유대 전통 아래 있었다. 베드로와 요한이 로마의 백부장인 고넬료에게 세례 주었다는 소식에 예루살렘은 들끓었다.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에 할례자들이 비난하여 이르되 ‘네가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었다’하니”(행11:2,3)
성경에 딱 한 절로 설명하니 무심코 지나가기 쉽다. 그러나 당시 유대 크리스천에게 이것은 매우 중대한 문제였다. 수백 년 동안 지켜왔던 전통을 말 한마디로 가볍게 바꾸어 나갈 조직은 없다.
그동안 유대인은 율법을 정확하게 지키기 위하여 목숨을 걸고 싸워왔다. 빌라도가 유대인이 우상으로 여기는 황제의 초상을 예루살렘에 들여왔을 때, 유대인은 강력히 반발하고 폭동까지 일으켰다. 유대교가 부패하고 타락하였지만, 그들은 자신의 전통을 지키는 데 목숨을 걸었다. 마치 조선 시대 목숨 걸고 단발령에 저항했던 유학자들과 같았다. 이러한 싸움은 교회 역사를 이어오면서 계속하여 나타난다. 인간이 만들어 놓은 전통과 그것을 깨려는 개혁적 사상은 언제나 부딪치기 마련이다.
나는 사도행전의 ‘고넬료 사건’을 읽으면서 받은 충격은 그들이 인간의 전통이나, 고집이나, 생각보다 성령의 인도하심에 선선히 순종하였다는 사실이다. 빌립이 에디오피아 재무장관을 만나 복음을 전하고 세례를 주었던 것도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하였기 때문이다. 교회를 잔혹하게 핍박하였던 사울을 형제로 영접한 것도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한 아나니아가 있었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이 이방에 나가 선교할 수 있었던 것도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하였기 때문이다. 초대교회는 인간이 다스리는 교회가 아니었다.
인간의 전통, 편견, 고집, 사상, 주도권(헤게모니)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오직 성령의 인도하심이 중요하였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다. 하나님의 통치는 받는 것이지, 하나님의 이름을 빌려서 인간이 통치하는 것이 아니다. 교회는 성령이 인도하는 대로 따라가는 한에서 복음의 증인이 될 수 있다.
인간의 조직이나, 여론 조작이나, 패권 다툼으로 교회를 이끌어 간다면, 그것은 곧 망하는 지름길이다. 복음의 진정한 승리는 세상적인 의미에서 교회가 강할 때 얻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교회가 멸시와 배척을 받는 등 연약한 가운데서도 믿음을 지킬 때 얻어지는 것이다.6) 교회는 인간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교회를 변화시키지 못한다면, 세상을 어찌 변화시킬 것인가? 하나님은 결코 뒤처져 따라가는 분이 아니시다. 언제나 앞장서서 따라오라고 명하신다. 따라가는 자가 그리스도인이요, 하나님의 교회다. 한국교회는 주도권을 가진 인간이 그 주도권을 내려놓는 데서 살 길이 열릴 것이다.
1) 건양 연호는 고종이 왕을 황제로 고치면서 연호를 건양(建陽)으로 바꾼 것을 말한다. 이제 중국의 속국이 아닌 주권국임을 뜻하는 것이지만, 속 뜻은 청국을 배제하려는 일본의 의도가 담겨있다.
2) 변발(辮髮) - 앞머리와 옆머리를 깍고 남은 머리를 땋아 뒤로 늘인 것을 말한다.
3) 김삼웅, ‘단발령 논쟁에 담긴 보수, 개화의 시대 인식’, 인물과 사상, 2007년 9월호, 213쪽
4) 윤치호 일기(4) 1895년 12월 28일자
5) 유대인은 스스로 하나님의 선택을 받아 특별한 사랑을 받는 민족이라고 여겼다.
6) 레슬리 뉴비긴, 오픈 시크릿, 홍병룡 옮김 (복있는 사람;서울) 2017년, 12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