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 이후 기독교는 분열하였다. 루터를 중심으로 한 독일과 칼빈을 중심으로 한 스위스는 개신교의 본부였다. 로마 가톨릭은 전열을 정비하여 종교개혁 진영을 공격하며 전쟁을 벌였다. 전쟁은 30년 동안(1618-1648) 진행되었다. 농토는 황폐하고, 산업은 파괴되고, 도덕은 땅에 떨어졌다. 사람들은 살기 위해 못 할 짓이 없다고 생각했다. 30년 전쟁으로 가장 큰 피해를 본 나라는 독일이었다.
독일 인구는 3천만이 1,200만으로 감소하였다. 비텐베르그 인구는 40만 명에서 4만 8천 명으로 감소하였고, 아우구스부르그의 인구는 8만 명에서 만 8천 명이 되었다. 개신교 성직자 중에서 전사자는 루터파 300명과 칼빈파 350명이었다. 개신교는 학식을 갖춘 지도자를 한꺼번에 잃어버렸다.
30년 전쟁으로 종교의 자유를 얻긴 얻었지만, 독일 루터 교회는 다시 일어설 힘이 없었다. 전쟁의 와중에 태어난 필립 야콥 슈페너(Philipp Jacob Spener 1635~1705)는 루터 교회에 활력을 불어넣을 방안을 고민하였다. 그의 책 “경건한 열망”(1675년 출간)은 그러한 고민을 담고 있다. 그는 개인 성경공부를 강조하였다. 지도자들이 모두 죽고 난 후 독일 루터 교회가 살 길은, 평신도가 스스로 성경을 공부하고 스스로 신앙을 일으켜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
슈페너의 경건주의 사상은 영국으로 전파되어 웨슬리 형제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찰스 웨슬리가 지은 회심 찬송 ‘이 곤고한 영혼 어디서 시작할까?’(Where Shall My Wondering Soul Begin?)는 슈페너의 개인주의 신앙을 표현한다.
“너를 용서하시기 위해
주님 허리 상하여 붉은 피 흘리셨네
너를 위해 영원하신 하나님 약해지셨네
너를 위해 영광의 왕께서 죽으셨네.
믿고 네 모든 죄 용서받으라.
믿기만 하면 천국은 너의 것!”2)
이후 복음주의 진영은 개인주의 신앙을 강조하고 구원은 개인적으로 받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부모의 믿음이 당신과는 아무 상관이 없고 오직 자기 스스로 신앙을 고백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에만 구원이 있다고 가르쳤다. 천국 문은 회전문과 같아서 딱 한 명씩 들어갈 수 있다는 말을 하였다.
구원의 의미를 개인화시키면서 신앙도 개인주의로 빠져들었다. 공동체, 사회, 국가 등 우리가 함께 살아야 하는 세상에 대한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존 스토트는 이점을 강력히 비판하였다. “우리는 정통적인 복음주의자로서 구원을 개인적인 것으로 끝내버리는 잘못을 자주 되풀이해 왔다.... 그러나 개인적 구원은 ‘공동적’인 관계 속에서 전시되어야 한다.”3)
구원은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신다.(고전1:21) 하나님께서 구원할 자를 선택하시고, 그들을 콕콕 집어내어 구원하시면, 가장 정확하고 쉬울 텐데 굳이 미련한 전도의 방법을 통하여 구원하시려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구원이 개인적이 아니라 관계적임을 가르치고자 함이다.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롬10:14) 구원은 사람의 관계를 통하여 이루어진다.
하나님께서는 축복의 전달자로 누군가를 선택하고 부르고 보내는 일을 하신다. 하나님께서는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모든 것이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하나되게 하셨다.(엡1:10)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목적을 위하여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셨다.(엡1:4) 교회는 그러한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도록 부름 받은 공동체이다.(벧전2:9) 4)
구원은 관계적이다. 에덴에서 하나님과 교제하고 사귀는 관계가 바로 천국이고 구원의 궁극적 실재이다. 구원의 목적은 만물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는 관계를 회복하는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다. 무릇 생명 있는 모든 존재는 필연적으로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 관계는 삶의 모습을 결정한다.
옛말에 친구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고 한다. 사람은 자기 수준 안에서 인간관계를 가진다. 지금 내가 어울리는 사람, 지금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의 수준이다. “내 주위에는 왜 이런 사람만 있지?” 불평하지만, 그것은 곧 자신의 모습일 때가 많다. 정몽주 어머니가 말한 것처럼 백로는 까마귀 우는 데 가지 않는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와 바른 관계를 가지는 것이야말로 참된 행복의 길이다.
문제는 죄로 말미암아 우리의 관계는 모두 깨지고 말았다는 사실이다. 친한 사람과의 관계이든, 아니면 이웃이나 사회와의 관계이든, 사람 사이에 갈등과 분열과 반대와 이중성 등의 모습이 없는 데가 없다. 세상은 깨어진 관계의 집합소이다.
하나님께서는 에덴에서 보여주셨던 아름답고 조화로운 관계의 회복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모든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고자 한다. 하나님은 한 개인의 구원에만 관심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공동체 곧 하나님 나라의 회복을 원하신다. 그러므로 구원은 관계적이고 공동체적이다.
레슬리 뉴비긴은 구원을 이렇게 정의한다.
“구원은 우리를 다 함께 묶어 주고 우리를 참된 상호관계로 이끌어 주고 자연 세계와의 참된 관계로 회복시켜 주는 행위임이 틀림없다. 이는 구원의 선물이 우리 상호 간의 열린 태도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뜻이다. 그것은 지붕을 뚫고 들어오는 한 줄기의 빛과 같이 위로부터 우리 각자에게 직접 오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우리가 문을 열고 이웃을 초대하는 행위를 통해 이웃에게서 올 것이다. 그렇게 되려면 이웃에게 보냄을 받아야 한다(롬10:14). 축복의 전달자가 되도록 부름을 받고 선택을 받는 사람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이 축복은 모두를 위해 주어진 것이다. 그러나 이 축복이 각 사람을 타인과 묶어 주는 식으로 주어지고 받아들여 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무효로 끝나고 말 것이다.”5)
개인의 구원은 궁극적으로 공동체를 세우기 위함이고,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기 위함이다. 성경 이야기는 관계 맺기 이야기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집트의 노예로 있던 이스라엘 백성을 건져내시고 그들과 언약 관계를 맺으신다. “나는 너희 중에 행하여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니라.”(레26:12)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관계 맺기를 가르치신다. “너희와 함께 사는 그 외국인 나그네(난민, 타인)를 너희의 본토인처럼 여기고, 그를 너희의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너희도 이집트 땅에 살 때에는, 외국인 나그네(난민,타인) 신세였다. 내가 주 너희의 하나님이다.”(레19:34, 새번역)
영국의 작가 로렌스(D.H. Lawrence, 1885-1930)는 “우리는 살아서 생명을 전해주는 사람들이다. 우리가 생명을 전해주지 못하면 생명은 우리를 통해 흘러가지 못한다.”라고 말했다. 로렌스가 어떤 생각으로 이 말을 했는지 모르지만, 나는 그의 이 말이 그리스도인의 사명을 적절하게 묘사한다고 생각한다. 그리스도인은 바른 관계 맺기를 통해 구원을 이루는 사람이다. 구원은 개인적일 뿐만 아니라 관계적이어야 하고 공동체적이어야 한다.
주
1) 알리스터 맥그라스, 신학이란 무엇인가, 김기철 옮김 (복있는 사람;서울) 2016년, 834쪽
2) Ibid. 835쪽
3) 존 스토트, 기독교와 현대사상, 홍치모 옮김 (성광문화사 ; 서울) 1992년, 244쪽
4) 레슬리 뉴비긴, 오픈 시크릿, 홍병룡 옮김 (복있는 사람;서울) 2017년, 134쪽
5) Ibid. 13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