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케팅 전문회사 바나 리서치 그룹의 회장인 조지 바나(George Barna)는 ‘마케팅이 뛰어난 교회가 더 성장한다’는 책을 썼다. 그는 마케팅 기법을 교회에 적용하면 교회를 더 성장시킬 수 있다고 주장한다. 교회 성장은 많은 목회자의 고민 중 하나이다. 그래서 교회 성장 관련 세미나는 언제나 인기를 끌고 있다. 선교사 역시 선교 현황을 수치로 보고하는 일이 큰 스트레스다. 그동안 몇 명을 전도했는지, 교회는 어떻게 성장했는지, 사역은 얼마나 확장하는지 보고하는 일이다.
사도행전은 초대교회 선교 이야기이다. 그런데 그들은 숫자로 선교보고를 하지 않았다. 그들도 수적 성장을 기뻐하였다. 처음 예루살렘에 복음이 전파되었을 때 3,000명이 회개하고 예수를 믿었다고 자랑스럽게 기록하였다. (행2:41) 그러나 이후 초대교회는 놀랍게도 수적 성장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사역을 수치로 측정하여 보고하는 사람도 없었다.
예수님은 숫자에 관심이 없음을 노골적으로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눅15:7)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눅12:32)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눅18:8)
예수님은 숫자보다 그들의 신실함을 강조하였다.
상황적으로 볼 때 초대교회는 숫자에 관심을 기울이기 보다 진정한 헌신과 신실함에 집중할 수 밖에 없었다. 신앙을 가졌다는 이유로 핍박을 받아야 하는 그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숫자나 건물이 아니었다. 그 어떤 위협과 유혹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참된 믿음이 중요하였다.
상황이 바뀐 것은 콘스탄틴 황제가 회심하고 기독교를 인정하면서부터다. 최고 권력자가 기독교로 돌아선 것을 안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교회로 밀려 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가지 않아, 나라 전체가 기독교를 국교로 받아들였다. 폭발적인 교회 성장이었다. 마땅히 기뻐해야 할 일이지만, 그때부터 교회의 고민은 시작되었다. 참된 그리스도인보다 이름뿐인 그리스도인이 훨씬 많아졌고, 그들은 숫자의 힘으로 교회를 장악하기 시작하였다. 교회 세속화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이름뿐인 그리스도인, 세속화된 그리스도인이 교회를 변질시켰다. 그들은 바른 믿음, 바른 생활, 헌신과 충성에 관심이 없고 자기 세력의 확장, 기득권의 옹호, 통치를 위한 종교 이데올로기가 필요하였다.
교회가 급속도로 성장한 시기는 또 있었다. 1492년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하면서 서구는 식민지 개척에 열을 올렸다. 총과 칼로 무장한 기독교 국가는 식민지 백성에게 세례를 강요하였다. 그들이 진정 회심했느냐는 중요하지 않았다. 무조건 기독교 앞에 굴복하라고 하였다. 그렇게 무력의 힘으로 기독교는 세계 각지로 퍼져나갔다. 19세기 1, 2차 세계대전으로 서구 열강이 무너질 때까지 폭력에 의지한 식민지 선교를 계속하였다. 기독교가 세계를 정복한 것처럼 보였지만, 그것은 거짓이었다.
겉보기에는 교회 성장같지만, 그것은 욕심, 부패, 폭력, 거짓이 버무려졌을 뿐이다. 교회 성장은 예수 이름으로 복음을 증거한다는 명분 아래, 세속적 욕심과 이기심을 채웠을 뿐이다. 세상을 구원하기 위하여 기꺼이 자신을 희생하고 죽음의 길을 걸어갔던 십자가의 길과는 정확히 반대되는 길을 걸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로서 용서, 이해, 사랑은 드러내지 못하였다.
처음 선교사였던 사도 바울은 선교(복음 전파)를 어떻게 생각했을까? 그는 로마에 가고 싶어 하는 마음을 편지로 표현하였다. "예루살렘으로부터 두루 행하여 일루리곤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였기" 때문에 “이제는 이 지역에서, 내가 일해야 할 곳이 더 없습니다.”(롬15:19, 23, 새번역) 그는 자신의 사역을 어떻게 생각하였기에 이런 말을 하였을까? 정말 그 지역에 복음 전할 곳이 없어졌을까? 그 지방의 모든 사람이 다 회심하고 세례를 받았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하였을까? 절대 그렇지 않다. 그가 이런 말을 한 의도는 그 지역에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형성되었다는 뜻이다. 비록 그 모임이 숫자상으로 크지 않을지라도, 아직 건물이 없을지라도 그곳에 참된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세워졌다면, 자신이 할 일은 다 한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바울이 사역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보여주는 말씀이 또 있다.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고전3:6) 그는 심고 물 주고 자라나게 하는 모든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교회 건축 계획도 없었고, 교회 경영이나 교회 성장에 대한 생각도 없었고, 신학교나 지도자 훈련소를 만들 계획도 세우지 않았다. 교회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교회 성장도 하나님의 몫이다. 인간은 다만 주어진 달란트대로 사역할 뿐이다. 바울은 자신의 달란트가 복음을 심는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아볼로 같이 교육을 잘하는 사람이 바울의 뒤를 이어 가르치면 좋다고 생각했다. 목회를 잘하는 디모데나 디도가 교회 공동체를 돌보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교회를 자기 것으로 삼으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선교 센터를 세우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교회 재정 문제도 하나님께 맡겼다. 그는 예수 믿은 지 불과 몇 달밖에 되지 않는 사람들을 신뢰하였다. 그들을 감독으로, 집사로 세워 공동체를 이끌도록 하였다. 성령 하나님께서 그들을 이끌어 주실 것이기 때문에, 그는 염려하지 않았다. 선교지에 세워진 교회는 후원하는 교회의 것도 아니고, 그 교회를 세우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선교사의 것도 아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것이다. 그 교회를 자라게 하시든지, 문을 닫게 하시든지 그것은 하나님의 몫이다.
오늘날 선교는 처음 씨를 뿌렸으면 열매까지 혼자서 다 거두려고 한다. 선교지 교회만이 그런 것이 아니다. 한국 교회 역시도 인간들이 사유화하려고 한다.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에게 돌려야 한국 교회가 살 수 있다.
* 위의 글은 레슬리 뉴비긴이 쓴 '오픈 시크릿'을 참고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