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ogos Brunch Sep 05. 2018

당신은 어떤 사람입니까?

1. 눈에 보이는 것만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


전에 살던 집 마당에 여름이면 살구가 익어가기 시작했다. 주황빛 얼굴을 한 살구는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였다. 나는 점잖게 다가가 손을 내밀어서 하나를 선택하였다. 반으로 쪼개면 과육과 씨앗이 보기 좋게 나누어졌다. 새콤달콤한 맛이 저절로 미소짓게 하였다. 살구는 달고 열량이 낮아 다이어트에도 좋은 과일이다.


살구와 비슷하게 생겼으나 맛도 없고 시기만 한 과일이 있는데 개살구다. 개는 ‘가짜’라는 뜻으로 살구와 비슷하게 생겨 사람을 미혹하기 때문에 ‘개’자를 붙인다. 개살구는 살구보다 열매도 크고, 빛깔도 반지르르하여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다. 막상 먹어보면 시고 떫은 맛이 나서 도무지 먹을 수가 없다. 그래서 겉모습은 아름답지만, 마음은 아름답지 못한 사람을 ‘빛 좋은 개살구’라 한다.


교회를 지을 때 암반 때문에 땅을 깊이 파지 못하였다. 경사면에 지었기 때문에, 지하 1층이 지상의 도로와 면을 같이하여 마치 지상 1층과 같다. 교회는 지나다니는 분들이 쉬었다 가라고 소파도 가져다 놓고 거울도 달아 놓았다. 지하주차장 안이어서 과연 얼마나 이용할까 생각했지만, 의외로 많은 사람이 이용하였다. 지나가는 사람, 특별히 젊은 여자들 대부분은 거울을 보고 지나갔다.


사람은 누구나 보여주거나 드러내고 싶은 욕망이 있다. 아름다운 디자인, 화려한 장식, 완벽한 구성 등을 보면 인간의 문화가 잘 보이려는 마음에 기초하여 발전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문제는 잘 보이려는 마음이 지나쳐 그것이 삶의 목적이 되는 경우다. 이를 허영심이라 한다. 부자가 되기 위하여 열심히 노력하는 것을 나무랄 수 없지만, 부자도 아니면서 부자 행세하는 건 문제다. 무리하게 돈을 빌려 온갖 포장을 하다 결국 파산하는 사람이 있다. 내실은 전혀 없으면서 실력 있는 척 가식하다 망신당하는 사람도 있다.


화려한 스포트라이트 아래 유명 상표로 치장한 연예인의 모습은 멋지다. 겉모습은 아름다워 보이지만, 과연 내실은 어떠할까? 협찬 상품으로 포장했던지, 자기 돈으로 사서 꾸몄든지 그건 중요하지 않다. 남들에게 잘 보이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자신은 안다. 그 모든 것이 허울뿐인 껍질이라는 사실을, 자신은 빛 좋은 개살구라는 사실을 안다. 화려한 은막 뒤의 스타들이 마약에 손을 대는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다. 과장된 포장 뒤에 숨겨놓은 공허함, 외로움, 우울증, 자괴감 때문이다.


현대는 이미지로 승부를 보는 시대다. 속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이 제일 중요하다. 수많은 사람이 화려한 겉모습만 추구하다 인생을 마감할 때에야 잘못 살았음을 깨닫는다. 아니 그 전에 자신의 공허함 때문에, 외로움 때문에, 거짓 때문에 스스로 망가지고 무너지는 경우가 많다.

2.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사람


독일의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에게 어느 젊은이가 도움을 요청하였다. 청년은 자기가 쓴 시를 보여주며 자신이 시인이 될 소질이 있는지 평가해달라고 하였다. 릴케는 이렇게 답하였다.


“자네는 자네의 시가 훌륭한 것인지 내게 묻고 있네.

자네는 이미 다른 사람들에게도 여러 차례 물었네.

자네의 시를 잡지사에도 보내 보았네.

자네 시를 다른 시와 비교도 하였겠지.

편집자가 자네 시를 읽어보고 완곡하지만 분명하게 출판할 뜻이 없다고 했겠지.

그런데

나는 그렇게 하지 말기를 바라네.

자네는 지금까지 외부를 바라보았네.

다른 사람이 어떤 평을 할까? 그런 생각만 했네.

이제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되네.

아무도 자네에게 조언을 하거나 도움을 줄 수 없네.

길은 오직 하나밖에 없다네.

자네 자신을 깊이 살펴보게나.

자네가 계속 글을 써야 할 이유를 탐구해보게.

한밤중 가장 고요한 시간에 일어나 자신에게 물어보게

내가 반드시 써야만 하는 이유가 있는가?”


릴케는 외부를 보지 말고 자기 내면을 보라고 충고한다. ‘다른 사람이 어떻게 평가하고 보느냐’가 아니라 자신을 ‘스스로 어떻게 보느냐’가 중요하다. 남에게 잘 보이려 애쓰는 사람은 결국 가식과 외식과 위선만 남길 뿐이다. 시든, 그림이든, 음악이든, 무엇이든 진정한 작품을 남기려면, 본인의 내면세계를 깊이 들여다보아야 한다. 인생을 보다 의미 있고 보람있게 살려면, 어떤 자극에 즉각적 반응을 하지 말아야 한다. 겉모습에 현혹되어 흔들리지 않도록 반응 속도를 늦추고 자신을 깊이 들여다보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건 사실 쉬운 일이 아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의 말단 신경을 자극하고 미혹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지 못하면, 어린아이처럼 미숙하게 반응하게된다.


세상의 현자들은 우리에게 충고한다. 조용히 묵상하면서 자기 내면의 소리를 들어보라고. 니체는 ‘우상의 황혼’에서 인간은 세 가지를 배워야 한다고 하였다. 첫째 보는 것을 배워야 하고, 둘째 생각하는 것을 배워야 하고, 셋째 말하고 쓰는 것을 배워야 한다.


앤소니 드 멜로의 우화에 여행자와 목동의 대화가 나온다. 여행자는 목동에게 날씨를 물었다.

“오늘 날씨가 어떨 것 같습니까?”

“오늘은 제가 좋아하는 날씨가 될 것입니다.”

“아니 그걸 어떻게 아십니까?”

“저는 제가 좋아하는 것만을 항상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얻는 것을 좋아하자고 결심했습니다.

그러니 오늘 날씨가 어떠하더라도 저는 그것을 좋아할 것입니다.”


배운 것 없는 목동이지만, 날씨만 보지 않았다. 목동은 날씨를 보면서 깊이 생각하였고 삶에 적용하였다. 목동은 삶 속에서 지혜를 깨달은 현자라고 할 수 있다. 세상의 많은 현자는 묵상, 관상, 참선, 명상, 침묵, 홀로서기를 강조한다. 그들은 내면의 소리를 듣기 위한 다양한 방법을 동원한다.


3.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는 사람


세상에 취하여 정신을 놓고 세상만 바라보며 살 것인가?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지혜로운 사람이 될 것인가? 그리스도인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까? 루터는 말하였다.

“누구나 죽음과 싸움을 저마다 홀로 싸울 뿐입니다.

죽음과 싸울 때 나는 당신 옆에 있을 수 없고, 당신도 내 옆에 설 수 없습니다.”

어찌 보면 세상의 현자들이 말하는 홀로서기를 말하는 듯 보인다.


디트리히 본회퍼는 이렇게 말하였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부르셨을 때 당신은 홀로 하나님 앞에 서고 홀로 응답해야 합니다.

당신은 홀로 십자가를 지고, 싸우고, 기도해야 합니다.

당신은 홀로 죽을 것이고, 홀로 하나님 앞에서 결산해야 합니다.

당신은 자신에게 눈을 돌리면 안 됩니다.

당신을 선택하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당신이 홀로서기를 싫어한다면, 당신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외면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하나님을 대면하는 사람이다. 세상을 보는 것도 아니고, 자기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도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앞에 서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자이다. 조용히 하나님의 음성을 기다리는 사람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사람이다.


문제는 귀먹고 눈먼 그리스도인이 많다는 사실이다. 전통과 관습에 얽매어 자기 신앙이 최고라고 생각한다. 보수와 진보라는 정파적 이념에 사로잡혀 하나님 말씀을 바로 보지 못한다. 세상과 물질에 취하여 외식하면서도 축복받은 삶이라고 착각한다. 봉사와 헌신에 사로잡혀 말씀에 귀 막고 있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하나님은 우리와 일대일로 만나기를 소망한다. 하나님은 엘리야, 모세, 다윗과 선지자들을 광야로 이끄셨다. 광야는 물도 음식도 사람도 없는 곳이다. 세상 그 어디보다 죽음을 가까이서 맛볼 수 있는 곳이 광야다. 그리고 겸손하게 하나님 앞에 무릎 꿇을 수 있는 곳이다. 자존심도, 자부심도, 자랑도 모두 내려놓아야 하는 곳이다. 인간 본연의 모습으로 하나님을 대면하는 곳이다. 하나님께서 광야로 인도하신 까닭은 자기 내면의 목소리를 들으라는 것이 아니다. 마음속에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라 함이다.


그러면 광야는 어디인가? 광야는 물리적인 공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조용히 듣는 자리이다. 그러므로 말씀을 깊이 묵상하는 자리가 곧 광야다.  말씀이신 주님이 육신을 입고 우리 가운데 오신 것처럼, 말씀을 깊이 묵상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신다. 우리는 다만 말씀에 마음을 모아야 한다. 그리고 말씀이 하라는 대로 나의 몸과 마음을 맡겨야 한다. 묵상이 깨달음을 넘어서서 실천으로 나가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말씀 따라 사는 사람이다.


참고도서

1. 디트리히 본회퍼, '신도의 공동생활' 문익환 옮김 (기독교서회 ; 서울) 1996년

2. 헨리 나우웬, '영적 발돋움' 이상미 옮김, (두란노;서울) 2004년

3. 조의완, iChurch 시대의 일곱가지 치명적 죄악, (대장간;대전) 2012년



















매거진의 이전글 신앙은 해석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