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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gos Brunch Aug 24. 2018

신앙은 해석이다.

감사하라고요? 왜요? 당신이 뭔데 나에게 '감사하라' 하시나요?

부족한 것 하나 없이 언제나 거들먹거리면서 힘없고 가난한 나에게 감사하라고요?  

그저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고 고분고분 순종하라는 뜻으로 감사하라는 건가요?

힘 좀 있다고 아랫사람을 깔보고 무시하기 일쑤이면서 나보고 감사하라고요?

무시당해도 감사하고 억눌려도 감사하라는 건가요?

언제나 자기 권리만 주장하고, 남의 권리는 헤아릴 줄 모르는 당신이 나보고 감사하라고요?

자기 것은 악착같이 챙겨 먹으면서, 나보고 양보하는 게 미덕이라고 말하는 당신이 감사하라고요?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살면서 죽지 못해 살아가는 나보고 감사하라고요?

헌담과 후욕과 모략과 비방을 일삼는 당신이 나보고 감사하라고요?

감사는 하나님의 명령이다. 감사는 기독교의 미덕이다. 감사는 행복의 지름길이다. 맞는 말이지만 그 말을 누가 하느냐는 훨씬 더 중요합니다.


돈 있는 사람, 힘 있는 사람, 성공한 사람, 잘 사는 사람, 행복한 사람이 할 말은 아닌듯합니다. 환경과 조건이 좋아서 명품을 온몸에 휘감은 사람이 할 말은 아닌듯합니다. 온갖 방법을 동원해서 반대파를 모략하는 사람이 할 말은 아닌듯합니다. 거짓과 위선의 가면을 쓰고, 말만 번지르르한 사람이 할 말은 아닌듯합니다. 자기가 한 짓은 생각하지 않고 함부로 남을 비판하는 사람이 할 말은 아닌듯합니다.


하나님의 언어인 감사를 함부로 명령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감사를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따로 있는듯합니다. 한 노인이 바닷가 노을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노인의 얼굴은 주름이 깊게 패어 있고 병색도 보였습니다. 일어설 힘조차 없어 보였습니다. 노인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인생의 그냥 그런 하루일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이것은 그냥 그런 날이 아닙니다.

이것은 당신에게 오늘 주어진 단 하루입니다.

이것은 당신에게 오늘 주어진 선물입니다.

이것은 당신이 받은 당신만의 선물이기에, 그에 대한 적절한 대답은 감사뿐입니다.

만약에 당신이 '유일한 오늘'이라는 놀라운 선물에 감사하는 법을 배운다면, 그리고 마치 오늘이 당신 인생의 첫날이고 더 볼 수 없는 마지막 날인 것처럼 말하는 법을 배운다면, 당신은 오늘 하루를 아주 잘 보낼 것입니다.”

노인의 이야기를 듣는 데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아브라함 요수아 헤셸은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아침에 눈을 뜨고 세상을 바라볼 때, 그 어느 것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마십시오.

모든 생명은 경이로운 것이며 하나님의 놀라운 선물입니다.

의미 없는 생명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영적으로 깨어 있다는 것은 생명의 경이로움을 느낄 줄 안다는 것입니다.”


수년 전 암투병하다 하늘나라로 가신 젊은 엄마가 있습니다. 어린 자녀를 두고 떠나는 것이 못내 안타깝고 아쉬워했습니다. 때때로 눈물도 보였습니다. 계속되는 항암치료의 고통에 몸도 일으켜 세우기 힘들어했습니다.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가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녀는 저에게 “목사님 그동안 감사했습니다.”라고 말하는 데 눈물이 왈칵 솟구쳤습니다. 그녀는 무슨 마음으로 감사를 말했을까요? 저같이 건강하고 넉넉한 사람도 감사보다는 불평을 더 하는데, 그녀는 어떻게 감사를 고백했을까요? 제가 준 도움이 하나도 없는데 말입니다.


저는 생각했습니다. 죽음 너머에 있는 영원한 삶에 대한 확신이 없다면, 결코 감사를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몸은 아프고, 가슴은 무너지지만, 그래도 자신을 품어주고, 사랑해주고, 용서해주는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하면 감사할 수 없을 것입니다. 감사는 우리 주변의 불행이나 악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감사는 그 모두를 뛰어넘을 수 있는 무엇입니다.


감사는 누가 말하느냐에 따라 무게가 달라집니다. 저는 예수님께서 감사하라고 말씀하시면,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분은 나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치신 분입니다. 매 맞으시고, 침 뱉음을 당하시고, 모략과 모욕을 받으시고, 고통받으셨고, 생명까지 내어 주셨습니다. 주님은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더 깊은 고통과 슬픔과 억울함과 원통과 분노를 아십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불평 한마디 없으셨습니다. 불평 거리가 없어서가 아닙니다. 불평 거리를 찾자면 차고 넘쳐났을 것입니다. 주님은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불평으로 받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사명으로, 은혜로, 감사함으로 받으셨습니다.


여기서 주님이 해석하신 십자가의 의미가 달랐음을 봅니다. 전 신앙이란 해석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분은 성경이 역사적 과학적 사실임을 입증하려고 몸부림칩니다. 저는 성경이 사실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사실보다 해석이 훨씬 중요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너고, 광야 40년을 구름 기둥과 불기둥의 인도함을 받으며 걸었습니다. 그건 사실입니다. 그들 모두가 그 사실의 현장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어진 삶의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역사의 현장에서 감사하기보다 불평하였습니다. 왜요? 해석을 잘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모든 삶을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메추라기도 당연하고, 반석에서 터져나오는 물도 당연하고, 구름기둥도 불기둥도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를 애굽에서 건져주셨으니 인도하시고 보호하시고 축복하시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떤 때는 당연을 넘어서 부족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불평과 원망은 그렇게 나왔습니다. 


오직 여호수아와 갈렙만 당연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매일 벌어지는 사건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를 보았습니다. 눈에 보이는 모든 사실 뒤에 숨어있는 하나님의 손길을 발견했습니다. 아침에 떠오른 태양, 하늘에서 내리는 만나, 구름기둥 불기둥, 눈 앞에 메추라기, 그건 일상이 아니라 은혜라고 생각했습니다. 습관처럼 반복되는 하루하루가 하나님의 놀라운 선물이라고 해석했습니다. 


오늘 이 시대는 불평하는 시대입니다. 불만족이 존경받는 시대입니니다. 히딩크가 “나는 아직도 배고프다”고 말하였을 때 온 국민은 열광했습니다. 리먼 브라더스의 뛰어난 투자 전문가 폴 마주르(Paul Mazur)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는 미국을 필요의 문화에서 욕망의 문화로 옮겨야 합니다. 사람들이 욕망하도록 그래서 기존에 쓰던 물건이 고장 나지 않아도 새로운 것을 찾도록 자극해야 합니다.”

현대 사회를 돌아가게 하는 것은 필요가 아니라 욕망입니다. 현대인은 모두 자기가 받아야 할 대우, 권리에 민감합니다. 불평이 미덕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매의 눈으로 불평 거리를 찾아다닙니다.


슬로처치를 쓴 크리스토퍼 스미스는 ‘우주의 모든 기초는 아낌없이 주는 하나님의 성품 위에 세워졌다’고 했습니다. 하늘의 해와 달과 별들, 공중의 새와 바다의 물고기와 땅 위의 모든 것이 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심지어 아들까지 내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영원한 기부자(giver)입니다. 아까운 것이 하나도 없고 못 줄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본질이 주는 것이라면, 그리스도인의 마땅한 본질은 감사여야 합니다. 그런데 타락한 세상, 욕심 많은 세상에서 감사의 삶을 살기란 참으로 어렸습니다. 모든 것을 다 주는 데도 사람들은 더 받으려고만 하고 감사하지 않습니다. 아직도 배고프다고 아우성칠 뿐입니다.


전 그래서 신앙은 해석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인생의 막바지에서 주어진 한 날의 위대함을 볼 줄 아는 것도 해석이요. 암 투병으로 못내 아쉬워하며 떠나야 하는 젊은 엄마가 감사할 줄 아는 것도 해석이요. 모략과 배신을 경험하면서도 분노하지 않는 것도 해석이요. 견디기 힘든 슬픔과 고통 속에 있으면서 웃을 수 있는 것도 해석입니다.


성경은 인생을 감사로 해석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모음집입니다.

그 모음집에 저의 이야기도 우리의 이야기도 포함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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