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21장
왕정국가에서 왕은 국가의 존망을 좌우하는 위치에 있다. 신하들은 개인이나 당파의 이해에 관심을 두지만, 왕은 국가 전체를 생각해야 한다. 조선은 500년 역사를 이어온 특별한 나라다. 세계 역사를 살펴보아도 500년 역사를 이어간 나라가 많지 않다. 특별히 우리나라만 아주 예외적으로 신라 천 년, 고려 오백 년, 조선 오백 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이렇게 오랫동안 나라를 이어온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나는 조선이라는 나라에 특별히 관심이 많다.
정도전이 조선을 설계할 때, 그는 왕과 신하의 관계를 바르게 정립하려고 애를 썼다. 비록 왕이 막강한 권한을 가졌지만, 신하는 왕을 가르치고, 충고하는 시스템을 여러모로 갖추었다. ‘경연’은 하루 최소 세 번 왕과 신하가 함께 고전을 읽고 공부하는 시간이다. ‘책문’은 왕이 신하에게 시대의 아픔과 고민을 질문하는 제도다. ‘사간원’은 왕에게 목숨을 내걸고 충언을 하는 기구다. ‘사관’은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왕과 신하의 언행과 행동을 기록하는 기구다. 이런 시스템이 제대로 기능하면, 나라가 바르게 서지만, 시스템이 무너지면, 결국 나라도 망하는 법이다.
‘책문’은 주로 과거시험의 마지막 단계에서 장원 급제하는 예비 신하에게 왕이 시대의 고민을 질문하므로 그의 역량과 포부와 비전을 점검한다. 과거에 응시한 젊은이는 시대의 문제를 고민하고, 부조리에 반항하며, 새로운 시대를 설계하고 꿈꾸며 글을 쓴다. 책문은 때로 유능하고 충직한 신하에게 솔직한 답변을 듣기 위하여 주기도 한다. 왕이 회의 석상에서 신하의 의견을 듣기도 하지만, 공식적인 글로써 보기를 원하는 책문 제도는 아름답다. 책문의 답은 아첨이 아니라 시대의식을 가지고 충언하는 글을 올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어떤 말이 서로 오고 갔을까? 김태완 씨가 쓴 ‘책문, 시대의 물음에 답하라’(소나무, 2004년)를 읽으면서 나는 감동하고 또 울었다.
예레미야 21장을 보면 시드기야 왕이 예레미야에게 사람을 보내 질문을 한다. 시드기야는 도대체 어떤 마음으로 예레미야에게 사람을 보냈을까? 시드기야는 예레미야를 좋아했을까? 아니다. 시드기야는 예레미야를 참 선지자라고 생각했을까? 글쎄다. 상황이 너무 다급해서 예레미야에게 순수한 마음으로 기도 부탁하기 위해서였을까? 그럴 수 있다. 시드기야는 자기 주변에서 아첨하는 거짓 선지자들의 말을 신뢰할 수 없었나? 그럴 수 있다. 시드기야는 자기가 듣고 싶은 말을 예레미야에게서 듣기를 원해서였을까? 그렇다.
그는 솔직히 예레미야의 생각과 말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그는 이미 자기 프레임이 확실한 사람이다. 거짓 선지자들이 아첨하고 아부하는 말에 예레미야도 동조하기를 원했다. 다른 소리는 듣고 싶지도 않았다. 그런 면에서 시드기야는 정말 어리석은 왕이다.
실학자 성호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충언에 대하여 글을 썼다. "임금은 바른말 하는 신하가 없는 것을 근심하지 말고, 바른말을 받아들이지 못함을 근심해야 한다. 말은 쉽지만, 행동에 옮기기는 어렵다. 어려운데 임금이 실천하면 신하가 따르지 않을 도리가 없다.”(정민이 쓴 '일침'에서 글을 약간 변형했습니다.) 시드기야는 예레미야의 말이든, 하나님의 말씀이든 관심이 없다. 오직 자기 유익과 이익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다. 어떻게 하면 나라가 평안하여 자신의 보위를 지킬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위기를 타개하고 마음껏 권세를 누릴 수 있을까? 그가 진심으로 백성을 생각하거나, 나라를 생각해서 예레미야를 찾은 것이 아니다. 오직 자기 자리와 마음껏 권세를 누릴 생각뿐이었다. 생각해보면 정치 지도자들처럼 남의 말 안듣는 사람도 드물다. 그들은 다른 정파에서 하는 소리에 귀를 막고 자기 생각과 프레임만 옳다고 강변한다. 민주주의가 대화라고 하지만 정치가들은 대화를 모른다. 자기 소리만 옳다고 한다.
유다가 멸망한 이유는 간단하다.
“다윗의 집이여 너는 아침마다 정의롭게 판결하여 탈취당한 자를 압박자의 손에서 건지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너희의 악행 때문에 내 분노가 불같이 일어나서 사르리니 능히 끌 자가 없으리라.”(렘21:12)
왕은 정의와 공평을 시행해야 하는 자리다. 즉 자신을 생각하지 말고 백성을 생각하라는 말이다. 힘 있는 자를 생각하지 말고 힘없는 자, 연약한 자, 억울한 자의 사정을 생각하라는 말이다. 왕이 왕 답지 못할 때 하나님께서 다윗과 세운 언약은 불사르고, 하나님께서 거하시겠다고 하던 성전을 무너뜨린다. 바벨론이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무너뜨리신다. 5절에 보면 하나님의 분노가 하늘 끝까지 치솟고 있음을 본다.
“내가 든 손과 강한 팔 곧 진노와 분노와 대노로 친히 너희를 칠 것이며”
진노, 분노, 대노. 이보다 더 강력한 표현이 있으면, 그것도 사용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방 불신자들을 향하여 이렇게 진노를 나타내시는가? 남의 집 자식이 잘못하면, 혀를 차며 안타까운 눈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내 자식이 호래자식이어서 막돼먹고 교양이나 버릇은 찾아볼 수 없을 때, 분노와 진노와 대노가 나온다. 하나님의 진노는 자식을 사랑하기에, 자식이 바로 서기를 누구보다 간절히 바라기에 나오는 감정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 자체만 보지 말고, 하나님의 마음을 읽어야 한다.
하나님의 진노는 불신자에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소위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유대인에게 쏟아지는 것이다. 세상의 죄악으로 물든 불신자에게 분노를 쏟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에게 쏟는 것이다. 특별히 지도자에게, 왕에게, 목사에게 하신다. 기름부어 세우고 모든 사람 위에 크게 쓰려고 했던 자에게 하신다. 착각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분노, 진노, 대노는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평신도보다 지도자에게 주어진다. 그런면에서 하나님의 분노는 시드기야뿐 아니라 왕가의 혈통을 이어오며 유다의 리더십을 가져온 다윗의 집안에 주어진 것이다.
만일 대한민국 기독교가 매를 맞아야 한다면, 그건 분명 하나님 앞에서, 평신도 앞에서 지도력을 발휘했던 목사들이 맞아야 한다. 그런면에서 성호 이익의 말을 곱씹어 보아야 한다.
“임금은 바른말 하는 신하가 없는 것을 근심하지 말고, 바른말을 받아들이지 못함을 근심해야 한다. 말은 쉽지만, 행동에 옮기기는 어렵다. 어려운데 임금이 실천하면 신하가 따르지 않을 도리가 없다.”
목사는 바른말하는 신하가 아니다. 행동에 옮기기는 어렵지만 그래도 죽을 힘을 다해 행동하려고 애를 써야 하는 왕과 같은 지도자이다. 말하기는 쉽다. 입이 열 개면 열 마디 백 마디가 나온다. 그러나 행동하기는 정말 어렵다. 그 어려운 일을 해내는 사람이 지도자인 목사여야 한다.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약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