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8장
요한복음 8장에 보면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혀 온 여인 이야기가 나온다. 이 이야기는 꾸며낸 이야기 같아 보이지 않는다. 남녀 불평등 사회에서 얼마든지 벌어질 수 있는 사건이다. 요즘은 여성 인권이 신장되었기 때문에 이 본문을 성 평등의 문제로 거론하기 좋은 본문이다. 어떻게 간음하다 현장에서 사로잡혔는데 여성만 잡아 왔는가? 현대인은 쉽게 의문을 가질 수 있다. 남녀 불평등 사건이 성경에 기록되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불편한 마음을 가지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 보면 2,000년 전 사회에서 여성의 권리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000년 전 남자는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혀도 온갖 구실로 빠져나갈 수 있었다. 오직 여자만 문제였다. 아무도 그런 것을 시비 걸지 않았다. 그때는 그런 사회였다. 본문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간음하다 현장에 잡힌 여성의 생명을 하찮게 생각하였다. 그녀는 인간도 아니었다. 손가락질 받아 마땅하였다. 그녀는 죽어 마땅한 존재였다. 그녀는 단지 예수님을 정죄하고 공격할 도구일 뿐이었다.
모든 사람이 똑같은 사회인식을 하고 있을 때 그것에 저항하기란 쉽지 않다. 잘못하면, 간음한 여인과 함께 돌 맞아 죽을 위기에 빠질 수도 있다. 이러한 상황에 처한다면,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모든 사람이 ‘예’라고 말하는데 과감히 ‘아니오’라고 할 수 있는가?
'여자가 돌에 맞아 죽건 말건 신경 쓸 일이 아니고, 아쉬워할 일도 아니다.'하면서 외면할 것인가? 모세의 율법에 따르면 그녀는 어차피 죽을 죄를 지은 여인이다. 굳이 변호하면서 군중의 심기를 건드릴 필요는 없다. 그녀 편에 서서 좋을 것은 하나도 없다. 실제로 이런 상황에 부딪히면, 대부분 그렇게 생각할 지 모른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어떤 생각하실까? 죄를 지었다고 모두 죽여야 한다면, 이 세상에 살아남을 사람이 있을까? 하나님께서는 기꺼이 죄인을 위하여 아들을 보내어 생명까지 희생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기꺼이 죄인 편에 섰을 것이다.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이 그러하다면, 우리는 어떠해야 할까?
우리는 이 땅에 살면서 수많은 죄인을 본다. 어떤 사람은 죄에 등급이 있으니 구별해서 보아야 한다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죄가 다 같다고 말씀하신다.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약2:10)
죄를 범하고 범해서 죄에 중독된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할까? 돌에 맞아 죽어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우리 주변에 있지 않을까? 난민, 성 소수자, 이단, 모슬렘, 테러리스트, 공산주의자, 등. 죽어라! 사라져라! 돌을 던지고 싶은 경우가 있지 않을까? 과연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어떻게 생각하실까? 모두 이 땅에서 깨끗이 쓸어버리고 싶으실까?
예수님은 수많은 종교인이 자기 죄를 숨기고, 자기는 의로운 듯 양손에 돌을 들고 덤벼드는 모습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하셨다. 과연 저들은 남을 정죄하고 심판할 자격이 있을까? 남을 심판하기에 앞서 먼저 자신을 하나님 앞에 내어 놓아야 하지 않을까? 말씀을 잘못 가르친 죄, 세상 권력 앞에 아부하던 죄,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지 못한 죄, 세상의 가치관에 빠져 살았던 죄, 소통하지 못하고 고집만 부리던 죄, 성령의 인도함 받지 못하고 제멋대로 산 죄, 물질 욕심부리며 살았던 죄, 게으름, 교만, 이기심, 등. 헤아리기도 어려울 만큼 수많은 죄를 쌓고 살면서 종교인이라 거룩한 척 폼잡는 모습이 얼마나 가증스러웠을까?
예수님은 자신이 서야 할 자리가 어디인지 아셨다. 그것은 하나님의 마음 속이었다. 요한은 그것을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8:32)고 표현하였다. 진리가 무엇일까? 학자들은 책상머리에 앉아서 진리를 정의하려고 애를 쓴다. 마치 빌라도가 “진리가 무엇이냐”(요18:38)물었던 것과 같다. 진리의 정의를 알면, 진리를 실천할 수 있을까?
예수님이 생각하는 진리는 학문적 '정의'(definition)가 아니다. 추상명사로서의 ‘진리’가 아니다. 예수님이 생각하는 진리는 ‘인격체’로서 진리이다. 곧 진리의 근원이신 아버지가 누구냐 하는 것이다. 진리는 말씀이신 하나님께서 육신이 되어 죄인인 우리 가운데 오셔서 인격적으로 실제로 함께 하심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를 아는 자는 곧 아버지를 안다고 하였다.(요8:19) 우리를 정죄하고 심판하기 위하여 오지 않으시고, 우리 편에 서서 우리를 변호하시고, 우리를 위하여 희생하시고,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러 오신 예수님이 곧 진리요 말씀이다.
유대인들은 혈통적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고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이라고 주장하였지만, 그들은 하나님 아버지를 몰라도 너무 몰랐다. 종교 행위만 하고, 종교 예식만 참여하고, 종교 법칙만 준수하면, 하나님을 아는 것으로 생각하였지만, 그들은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몰랐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구원하시려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시는 그 마음을 몰랐다.
이들의 무기(돌멩이)는 “우리 아버지는 아브라함이라”(요8:39)였다. 전통으로, 종교 예식과 규칙으로 자신들의 의로움을 내세웠지만, 그것은 거짓과 위선이었다. 예수님은 선언하였다. 너희 아버지는 마귀다.(요8:44) 너희가 하나님 아버지를 정말 제대로 안다면, 너희가 하나님의 마음을 안다면, 너희가 진리를 안다면, 남을 정죄하고 죽이려고 악을 쓰기보다 오히려 그들을 사랑하고, 그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몸부림칠 것이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던 종교인들은 오히려 마귀의 자녀처럼 타인을 죽이고, 약자를 멸시하고, 죄인들을 정죄하는 일에 앞장섰다. 정말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였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였으리라.(요8:42) 세상을 구원하기 위하여 자신을 기꺼이 희생하려는 예수님을 사랑하고 따랐으리라. 진리를 알면, 하나님의 마음을 알면, 세상의 잘못된 관습과 편견과 전통과 규례에서 자유하게 될 것이다.
“진리를 알면 진리가 너희를 자유하게 하리라.”
진리 안에, 하나님 마음 가운데 굳건하게 서셨던 예수님은 모든 잘못된 고정관념과 사회인식에서 자유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