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엡2:20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행2:42)
메시아이신 주님이 떠나신 후 제자들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비록 그들이 3년 동안 예수님에게 제자 훈련을 받았지만, 그들은 막막하였다. 그저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하루 하루를 보내었다. 그래도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사도의 가르침을 받는 데 전념했다.(행2:42) 왜냐하면 사도들은 예수님과 함께 먹었고, 함께 잠을 잤고, 함께 살았다. 어디를 가든 예수님과 함께하였다. 예수님의 호흡, 예수님의 감정, 예수님의 눈물, 예수님의 기쁨, 예수님의 가르침, 예수님의 탄식, 예수님의 기적, 예수님의 모든 것을 몸으로 배웠다. 예수님이 무엇을 좋아하시는지 무엇을 싫어하시는지 그들은 알았다. 누가 이런 만남을 가질 수 있을까? 살과 살을 맞대며 예수님과 인격적인 교제를 한 것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 심지어 베드로는 물 위를 걸어보기까지 하였다. 눈앞에서 보이신 예수님의 수많은 기적은 그들을 변화시켰다. 누가 무어라 해도 예수님은 메시아시다. 예수님이 가르치시고 행하신 것을 그때는 정확히 알지 못했지만, 주님이 떠나신 후 모든 것을 새롭게 깨닫게 되었다.
그들이 마가 요한의 다락방에서 성령을 받은 후 예루살렘에 나가 복음을 증거할 때 누구도 막을 수 없었다.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예루살렘만이 아니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이방의 모든 나라에 복음을 증거하는 그들의 발걸음은 멈출 줄 몰랐다. 학문과 지식은 별로 없어도 그들은 다른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체험이 있었다. 예수님과 인격적으로 만나고 교제하고 가르침 받은 경험을 누가 무시할 수 있을까? 초대 교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는 것은 당연하였다. “예수님은 어떤 분이셨어요?”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은 무엇이에요?” "예수님의 성격은, 예수님의 가르침은, 예수님의 감정은 어땠어요?"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해 알고 싶어서 사도들 곁에 모여들었다. 초대 교회는 그렇게 사도의 가르침을 받았다.
그때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 죽이는 일에 앞장서던 바울이 있었다. 그는 정통 바리새인이었다. 그는 당대 최고 학자인 가말리엘 밑에서 성경을 공부하였다. 그가 알고 있는 성경에 의하면, 예수 믿는 사람들은 정통 유대교를 거스르는 이단이었다. 우상숭배 하는 자들을 창으로 찔러 죽인 아론의 손자 비느하스처럼 바울의 열심도 특별하였다. 그는 스데반 집사를 죽이는 데 앞장섰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으려고 다메섹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그때 그는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예수님을 만나는 신비한 체험을 하였다. 그제야 예수님이 진정 메시아임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사도들을 찾아가서 자신의 회심을 알리고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예수님의 가르침은 무엇인지 배워야 할 것이다. 그는 사도를 찾지 않았다. 그는 사도에게 제자훈련을 받지 않았다. 그는 사도들에게 가르침을 받지 않았다고 고백하였다.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갈1:12)
그는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의논하지 않고(갈1:16) 아라비아 사막으로 갔다.(갈1:17) 아라비아는 문자 그대로 사막이다. 사람이 없는 곳이다. 거기서 무엇을 했을까?
십 년 후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사도들을 만나 교제하게 되었을 때 그는 다시 한번 확실하게 천명하였다.
“그 지도자들은(사도들은) 내가 줄곧 전한 메시지에 어떤 것도 덧붙이지 못했습니다.”(갈2:6, 메시지 신약)
바울은 아주 당당하게 자신은 사도들에게 가르침을 받지 않았지만, 자신이 증거하는 복음은 성경에 근거한 바른 복음이라고 선언하였다. 그는 초대교회의 전통을 따라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수제자인 베드로를 공개적으로 야단치기까지 하였다.
예루살렘 회의에서도 바울의 의견이 중심이었다. 실제로 신약 성경 상당 부분을 바울이 기록하였다. 바울은 다른 어떤 사람보다 먼저 성경을 기록하였다. 신약성경은 기록된 순서대로 나열하지 않았다. 바울의 서신들은 예수님 승천하신 후 20년이 지난 시점에서 대부분 쓰였다. 그러니까 초대 교회 핵심 사상은 바울에게서 나왔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직속 제자들은 도대체 무엇을 했을까? 그들은 예수님에게 직접 제자훈련을 하지 않았던가? 예수님의 가르침을 직접 들었고, 예수님과 함께 호흡하였다. 그들이 체험했던 것, 그들이 보고 들은 것은 세상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다. 그런 놀라운 경험과 체험을 한 제자들이 예수님과 아무런 인격적 경험을 하지 않은 바울 앞에서 말 한마디 하지 못하고 야단만 맞다니. 도대체 무엇 때문에 사도들은 바울 앞에 고개를 숙여야 했을까?
바울은 가말리엘 문하에서 구약을 정통으로 배운 구약 학자였다. 그 당시 성경은 오직 구약밖에 없었다. 사도들이 가르친 예수 복음도 구약을 근거로 해서 가르쳤다. 초대교회는 사도들의 경험에 바탕을 두어서 세워진 것이 아니라 사도와 (구약)선지자들의 터(가르침)위에 세워진 것이다.(엡2:20) 초대교회는 명백히 구약 성경(하나님의 말씀)위에 세워졌다.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 그는 구약을 유대인의 시각으로 보았다. 그러나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난 후 성경을 보는 시각이 달라졌다. 구약에서 예언한 메시아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임을 확신하였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이 구약 성경을 풀어주는 열쇠임을 깨달았다. 비록 예수님을 육신적으로 본 적은 없지만, 그는 계시된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을 만났다. 아라비아 사막에 칩거하면서 성경을 보는 눈이 활짝 열렸다. 하나님의 구원 비밀이 그에게 열렸다.
10년 만에 만난 예수님의 직속 제자들은 여전히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모였고, 유대 전통과 타협하면서 지내왔다. 바울은 예루살렘 회의에서 제자들과 논쟁하면서 성경적인 복음을 설명하는 데, 그것은 곧 예수님의 가르침과 일치하였다. 예수님의 제자들(사도들)이 바울 앞에서 한마디 대꾸도 할 수 없었다. 말씀을 확실히 깨달은 바울 앞에, 예수님과 인격적으로 만나 교제하며 제자훈련을 받고 신령한 체험을 한 제자들은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기독교는 체험의 종교임이 틀림없다. 하나님은 살아계셔서 지금도 역사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은 기독교는 말씀의 종교다. 체험도, 제자훈련도, 만남도 말씀을 벗어나면 아무 소용이 없다. 사도들이 바울 앞에 무릎 꿇은 것은 인간 바울에게 무릎 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앞에 무릎 꿇은 것이다.
한국 교회의 가장 큰 문제는 말씀의 지혜와 지식이 부족하다. 체험을 강조하고, 만남을 강조하고, 큐티와 제자훈련을 강조하는데 말씀에 대한 깊은 지식이 부족하다. 호세아 선지자는 당시 이스라엘을 바라보며 한탄하였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호4:6)" 성경 공부를 해도 한 구절이나 성경 한 부분에만 집중한다. 성경 전체를 꿰뚫는 거대 담론을 이해하지 못한다. 성경은 인류 역사와 문화와 문명과 지식을 관통하는 거대 담론을 담고 있다. 기독교적으로 표현하자면 성경 신학이다. 나무를 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숲 전체를 바라보면서 오늘날 세상을 크고 넓고 깊게 볼 줄 아는 신학적 깊이가 진정 필요하다.
위의 글은 "바울과 편견"(랜돌프 리처즈/브랜든 오브라이언 지음, 홍병룡 옮김, 성서유니온, 2017년)에 의존하여 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