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8년 영국에서 브리태니커(Britannica) 사전을 출간한 이래 200년 이상 백과사전의 대명사로 군림하였다. 2001년 위키피디아(Wikipedia)는 집단지성의 힘을 믿고 인터넷 사전을 시작하였다. 위키피디아는 누구나 백과사전 제작에 참여할 수 있게 하였다. 위키피디아가 출범한 지 불과 4년이 지난 후 12만 개의 지식 콘텐츠를 축적하였다. 2005년 저명한 과학잡지인 네이쳐(Nature)에서 브리테니커와 위키피디아를 대상으로 과학분야 콘텐츠의 정확도를 비교하였다. 결과는 놀라웠다. 브리테니커와 위키피디아에서 각각 123개와 162개의 오류를 발견하였다.
근소한 차이로 브리테니커가 우위를 점하긴 하였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큰 차이가 아니었다. 놀라운 일은 그다음에 벌어졌다. 위키피디아는 다음 날부터 수정 작업에 들어갔다. 위키피디아의 오류는 점점 줄어들었고, 콘텐츠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200년 동안 명성을 떨치던 브리테니커 회사는 기가 질렸다. 오류를 수정하고 새롭게 사전을 출간하려면 최소 1년이 걸리는데 도저히 위키피디아를 따라잡을 자신이 없었다. 결국 브리테니커는 백과사전 출간을 포기하였다. 세상은 바뀌었다.
마샬 맥루한은 '미디어는 단순히 커뮤니케이션 도구가 아니라 인간 능력의 확장'이라고 하였다. 자동차는 발의 확장이고, 컴퓨터는 뇌의 확장이다. 미디어는 눈,코,입,귀를 포함한 감각기관의 확장이다. 신약성경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목소리라는 미디어를 사용하여 제자들에게 설교하였다. 사도들은 편지라는 미디어를 사용하여 초대교회와 소통하였다. 마틴 루터는 팸플릿을 사용하여 종교개혁을 촉진하였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증인의 사명을 주셨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18) Wilter Wilson은 ‘Internet Church’에서 질문하였다. “예수님은 21세기 인터넷 매체를 생각하시고 ‘땅 끝까지’ 복음을 전파하라 하셨을까?”
복음주의 선교대회인 제3차 로잔대회에서 미디어 분야를 통하여 복음전파를 어떻게 할 것인가 고민하였다. “우리는 미디어 문화 가운데 그리스도의 진리를 드러내는 자들로서 미디어와 테크놀로지 분야에 비판적이면서 창조적인 방법으로 참여할 것을 다짐한다.” 랄프 윈터는 현재나 과거에 저지른 몇 가지 실수를 언급하면서 그중 과학을 친구로 여기지 않고 적으로 간주한 실수를 지적하였다. 이제 복음 전파 사역에 디지털미디어를 적절히 그리고 다양한 방법으로 활용하여야 할 시점에 왔다.
디지털 미디어는 몇 가지 특성이 있다. 첫째는 모든 시간과 공간의 물리적 장벽을 넘어 전 지구를 하나로 엮어주는 네트워크성이다. 디지털 매체를 통하여 언제 어디서나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 둘째는 쌍방향 피드백이 가능한 상호작용성이다. 디지털 매체는 일방향적인 가르침과 수직적인 관계가 아니라 수평적이고 민주적인 상호소통을 가능하게 한다. 세째는 협력과 협업을 가능하게 하는 역동성이다. 집단 지성의 힘을 사용한 위키피디아가 대표적인 예이다. 네째는 문자, 음성, 영상, 이미지 등 모든 매체를 다 사용할 수 있는 복합성이다. 비록 온라인 모임이지만, 오프라인 모임만큼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
오늘 한 페친이 댓글을 달아 주었다.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깨어서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해야 하는데 점점 더 책읽기를 싫어하고 자연히 성경 읽는 것도 안 하고 게다가 교회에서도 번영신학이 들어와 예수 믿고 복 받아 잘 살자 하면 아멘 하고 무조건 따르는 중세 시대 사제제도가 다시 발흥한 것 같습니다. 어찌하면 좋을지 게다가 신사도 운동이 교회마다 야금야금 작전으로 침투하고 있습니다. 시대를 보고 가슴을 치는, 이래서는 안 되겠다고 경각심을 갖고 고민하는 무리의 수가 극히 적은 것 같아 가슴이 아플 뿐입니다.”
어떤 대답을 해야 할까 고민하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하였다. 그건 디지털 미디어를 사용한 새로운 형태의 성경공부다.
현재 대형교회의 심각한 폐해와 더불어 작은 교회의 자포자기로 한국 기독교는 나락으로 빠져들고 있다. 어디서 어떻게 손을 써야 할지 모르는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나는 '교회의 교회 됨'을 회복하는 일이 무엇보다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은 바른 성경해석에서 출발한다고 믿는다.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향한 분명한 계획과 목적이 있다. 그것은 교회 자체의 성장이 아니라 교회를 통하여 땅끝까지 복음을 전파하려는 뜻이다. 교회는 단지 도구에 불과하다. 도구는 사용하다 뜻에 맞지 않으면 꺾어 버릴 수 있다. 바울도 자신이 쓰임 받다 버림받을까 걱정하였다. 이스라엘도 목적성과 방향성을 상실하였을 때 패망하였다. 기독교 2천 년 역사를 살펴보면, 영원한 형태의 교회는 없었다. 언제나 새로운 마음과 정신으로 새롭게 시작하는 교회로 세상을 깨우는 일이 있었을 뿐이다. 그런면에서 종교개혁가들은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Ecclesia semper reformanda)’고 하였다. 교회가 보수를 지향한다는 말은 더는 개혁하고 싶지 않다는 뜻이다. 전통을 고수하고, 과거를 고집하고, 변화를 거부하는 것은 교회를 병들게 하고 죽게 한다.
죽음의 골짜기에서 교회를 다시 일으켜 세운 것은 개혁이었다. 그것도 매우 급진적 형태였다. 초대교회와 마찬가지로 조선에 처음 기독교가 들어왔을 때, 깜짝 놀랄 정도로 급진적이었다. 남녀 칠세부동석을 깨고, 예배당 안에서 남녀가 함께 예배하였다. 양반과 상놈을 평등하게 대하였다. 여성의 리더십, 상놈의 리더십, 평신도의 리더십이 세워졌고 그들이 교회의 지도자가 되었다. 망해가는 조선에 급진적 기독교의 모습은 새로운 희망이었다. 민족 선각자들이 대거 기독교로 들아온 데는 그런 이유가 있었다. 그러나 3.1만세 운동 이후 일본 제국주의가 기독교를 회유하고 탄압하면서 교회는 점점 권력 아래 머리를 숙이고 마침내 신사참배를 가결하면서 양심과 지조와 윤리와 정체성을 버리고 세속 권세와 손잡기 시작하였다. 마치 콘스탄틴 황제 아래 기독교가 세속 권력과 타협한 것과 같은 모습이었다. 그걸 전통이라 여기며 지금까지 한국 기독교는 세속의 가치관 아래 머리숙이며 보수라고 주장한다. 그것은 명백히 비성경적이고 거짓 보수이다.
한국 교회는 한 때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지만, 그것은 ‘교회의 교회 됨’ 때문이 아니라 세속의 정신과 가치관에 영합한 일시적 현상이었다. 교회는 거대 공룡이 되어 맘몬 앞에 무릎 꿇고, 권력 앞에 굴종하였다. 끝모를 욕심으로 자기 몸짓만 불려 가는 공룡 교회는 사회적 영향력을 상실하고, 기독교를 중심에서 변두리로 내몰았다. 이런 상황에서 개혁자들이 외친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는 말을 새롭게 새겨야 한다. 디지털 미디어를 이용한 성경공부는 분명 급진적 형태이다. 그러나 새롭게 도전할만한 가치가 있다.
내가 생각한 디지털 미디어 성경공부 형태는 (아직 확실하게 정립되지 않았지만) 대략 이러하다.
“제가 성경 본문과 함께 질문을 올리면, 여러분이 답해주시거나, 새로운 질문을 올려서 서로 토론하는 형식입니다. 그리고 토론이 어느 정도 마쳤다고 생각하면 제가 최종적으로 글을 써서 올리도록 하는 형태입니다. 참여하고 싶으신 분들은 제가 만들어 놓은 “이런 교회를 원한다”(비공개 그룹
https://www.facebook.com/groups/449863578843855/)에 들어오셔서 참여하시면 될 것입니다. 필요하다면 정한 시간에 영상으로 Q&A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신다고 믿으면서 용기 있게 이 일을 시작하려고 한다. 동참해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