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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가 표절

by Logos Brunch

헬렌 켈러는 태어난 지 19개월 만에 걸린 병으로 청각과 시각을 잃었다. 그녀가 여섯 살 때 앤 설리번을 만나면서 점자를 배웠고, 잠재되었던 지식욕망을 채우기 시작했다. 그녀는 수많은 책을 읽었다. 물론 맹인이기에 베껴 쓰지 못하였다. 단지 머리에 저장할 뿐이었다. 그녀의 기억 창고에 들어온 지식과 그녀의 생각은 서로 화학작용을 하면서 글쓰기로 옮겨갔다. 헬렌 켈러는 글을 써서 친구에게 나누어 주었다. 열두 살 때 친구에게 생일 선물로 ‘서리 왕’이란 글을 써서 주었다. 그 이야기는 단편소설로 출간되었다. 사람들은 12살 맹인 소녀가 쓴 소설에 칭찬과 격려를 아낌없이 하였다. 그러나 그녀의 ‘서리 왕’은 마거릿 캔비(Margaret Canby)가 쓴 어린이 단편소설 ‘서리 요정’과 매우 비슷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칭찬과 격려는 저주로 돌변하였다. 그녀는 ‘표절과 의도적인 거짓말’혐의로 고소당했다. 어린 켈러는 잔인하고 포악한 심문을 받아 평생 지워지지 않는 마음의 상처를 받았다.


그러나 정작 피해당사자라 할 수 있는 마거릿 캔비는 그녀의 편에 섰다. 캔비는 이렇게 썼다. “재능있는 어린이의 활동력과 기억력은 얼마나 경이로운가!”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도 그녀를 옹호했다. “가장 독창적인 작품은 오로지 타인이 사용했던 표현으로만 구성된다.”


마크 트웨인(Mark Twain)은 헬렌 켈러에게 편지로 격려하였다.

“오, 저런! 표절이라는 게 얼마나 웃기고, 멍청하고, 괴상망측한 코미디란 말인가! 그런 식으로 따지면, 모든 인간의 표현은 말이 됐든 글이 됐든 전부 다 표절인 것을. 왜냐하면, 모든 아이디어는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100만 개의 외부 출처에서 유래하므로, 사실상 간접적인 표절이라 할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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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에 문학적 차용(literary borrowing)은 다반사였다. 셰익스피어는 많은 동시대인의 아이디어를 자유자재로 차용했는데, 그런 점에서는 밀턴도 마찬가지였다. 18세기에도 우호적인 차용은 여전히 흔해서, 콜리지, 워즈워스,사우디는 상호 간에 아이디어를 차용했다. 홈스에 의하면, 심지어 상대방의 이름으로 출간된 책에 자신의 글을 싣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18세기 위대한 부흥사 조지 휘필드는 매 주일 해야 할 설교 부담으로 설교 준비할 시간이 거의 없었다. 그의 전기에 보면, 설교할 시간이 되었는데 원고가 준비가 안되었다. 급한 마음에 그는 메튜 헨리 주석 한 페이지를 죽 찢어 가져가 설교하였다. 사실 조지 휘필드는 매일 아침 두 시간씩 성경을 공부하고, 저녁에도 성경을 연구했다. 그것이 그의 영성의 비결이고, 설교의 근원이었다. 그렇지만 매일같이 설교문을 써야 한다는 것은 조금 다른 문제다.


설교는 학습지도서가 있어서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교인의 상황과 시대의 상황과 성경 본문을 자세히 살펴서 창의적으로 요리해야 하고, 그걸 글쓰기라는 과정을 거쳐서 설교로 완성된다. 결코, 만만한 작업이 아니다. 작가들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작품 마감시한이다. 그래서 한 작품을 끝내고 나면 일년이든 이년이든, 혹은 수년간 펜을 놓고 휴식을 즐긴다. 소위 다음 작품을 구상하고 준비하기 위한 재충전 시간이다.


설교자는 어떠한가? 설교자의 마감시한은 평생토록 매주일 반복적으로 다가온다. 제대로 된 설교 원고를 써야 하는 경우만 해도 일주일에 최소 4번이다. 주일 예배, 오후 예배, 수요 예배, 금요 기도회이다. 심방설교나 새벽설교는 빼기로 한다. 이건 가끔 솟아오르는 창작력으로 기댈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반복적으로 다가오는 마감시한에 맞추어 설교문을 완성해야 한다. 게다가 은혜롭고 참신하고 새로와야 하는 설교문 쓰기는 설교자에게 참으로 고되고 어려운 작업이다.


설교자가 단순히 설교만 준비한다면, 그래도 조금은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설교자는 목회자로서 최고의 감정 노동자이다. 자신이 목양하는 교인 수만큼 자녀가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다고 매주일 어디선가 문제가 터진다. 그러한 문제 가운데, 설교자를 비난하고 후욕하고 비판하는 것이 있다면 설교자가 받는 감정적 상처는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런 감정적 상처를 가지고 설교 준비한다면, 그 고통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다가온다.


미국에 와서 처음으로 미주 신문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미주 어느 큰 교회 담임 목사가 자기 설교를 반복했다고 해서 비판하는 기사였다. 부임한 지 1년 동안 했던 설교를 전임 교회에서 했던 설교와 일일이 대조 분석하였다. 누가 대조하고 분석했는지 정말 꼼꼼하게 하였다. 기사에 따르면 교회의 상황에 따라 비유, 묘사, 예화를 부분적으로 수정, 추가, 생략한 경우를 조사하였다. 설교의 전체적인 흐름이나 메시지가 유사한 것도 표절로 보았다. 그렇게 조사했더니 일년 설교중 70%가 전임 교회에서 했던 설교를 표절했다는 기사다. 소위 자기가 자기를 표절했다는 자가 표절이다. 그것도 자기 교회에서 반복한 것이 아니라 전임교회에서 했던 설교를 또 했다고 비판하는 기사였다.


신문은 설교를 그저 학적 발표를 하는 논문처럼 생각하는 듯하다. 목사가 한 편의 설교를 쓸 때, 거기 목사의 고민과 눈물과 기도와 영성이 담겨 있다는 사실을, 설교는 마치 영적 자식과 같다는 사실을 이해 못 하는 듯 하다. 미국 동부와 서부의 상황이 바뀌면 설교도 완전히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듯 하다. 동부와 서부의 상황이 얼마나 바뀔지 모르지만, 기본적으로 인간의 상황은 대동소이하다. 누구를 타겟으로 한 설교가 아니라면, 자신의 영성이 고스란히 묻어있는 설교를 새로운 성도에게 다시금 반복하는 것이 문제가 될까? 내가 목사여서 이런 생각을 하는걸까?


물론 매주 신선하고 새로운 설교를 새롭게 준비하는 것이 목회자의 기본적인 의무라고 생각한다. 솔직히 나도 목회 20년 동안 반복해서 한 설교가 있었다. 일 년 52주 빠짐없이 설교해야 하고, 심방과 목회 업무를 할 뿐 아니라, 대외적인 노회나 총회 일까지 하는 목사라면, 설교 부담은 정말 무거운 짐이다. 그래도 나 같은 경우는 매일 같이 책을 읽고 공부하면서 새로운 설교를 준비하려고 애를 쓴 편이다. 반면 교인들에게 ‘심방 좀 자주 해라’는 핀잔을 수도 없이 들었다. ‘우리 목사는 교인에게 관심이 없어.’ 라는 비판도 들었다. 목회자가 교인과의 우호적인 관계를 위하여 밤낮없이 뛰는 목사치고 성경적 설교나 신선한 설교를 하는 분을 본 적이 별로 없다. 목사의 첫 번째 과업은 무엇인가?


스탠리 하우어워스는 성공한 목회자가 되려면, 진리를 외치는 설교자가 되기보다, 붙임성 있는 목회자로서 교인들에게 어떻게 하면 인기를 얻을까 궁리해야 한다고 비아냥 거렸다.

여러분은 목사의 주된 사명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목사의 설교 반복은 가능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목사에게 재충전과 재교육할 수 있는 시간을 주기 위한 방안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참고도서

1. 올리버 색스, '의식의 강', 양병찬 옮김, (알마:서울) 2018년

2. 스탠리 하우어워스, 윌리엄윌리몬, '하나님의 나그네 된 백성', 김기철 옮김 (복있는 사람, 서울) 201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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