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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를 원하는가?

by Logos Brunch

1.
“하나님을 믿는가?"
교회 다니는 사람치고 No라고 말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면 매일의 삶 속에서 하나님을 얼마나 의식하는가?
하나님이 당신의 삶에 간섭하고 있음을 느끼는가?
무엇을 결정할 때 하나님은 그 결정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정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이 질문에 부끄러운 대답을 할 때가 많다.
기독교가 영적 능력을 상실한다면, 동네북이 될 가능성이 크다.
경건의 형식과 모양만 남은 껍데기 종교는 아무런 힘이 없다.
누구라도 실실 건드리며 욕하고 두들겨 패도 대응할 방법도 힘도 없게 된다.


2.
니체 당시 기독교가 바로 그러하였다.
기독교는 비웃음과 조롱의 대상이었다.
니체는 자신이 신을 죽였다거나 신이 죽었다는 것을 증명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그 시대의 흐름을 읽고 말했을 뿐이다.
니체는 과거로부터 배울게 하나도 없다고 결론지었다.
아니 쓰레기통에 다 집어넣어야 한다고 외쳤다.
사람들은 니체의 말에 적극 동조하였다.
지금까지 무게 잡던 모든 것을 쓰레기통에 버렸다.
허무주의에 사로잡혀 있던 시대에 니체는 새로운 철학을 설파하였다.
이제 각자의 길을 가라고.
지금까지 권위를 내세운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자기의 의지와 철학을 가지고 자유롭게 살라고.
그것이 인간의 자유라고 선언하였다.
권위 있는 진리는 없다.
그 권위는 이제부터 스스로 만들면 된다고 주장하였다.
니체가 말하는 자유는 단지 억압과 강요로부터의 자유가 아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자기의 의지를 마음껏 표현하는 것이 참 자유라고 말하였다.
오늘날 현대인은 니체의 후예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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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한복음 8:32)
진리가 없다고 주장한 니체와 진리가 있다고 주장한 성경은 서로 대척점에 서 있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가?


가만 생각해보자.
놀이터에서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어린아이의 모습을 보면서 자유롭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럴 수 있을 것이다.
그럼 이런 질문은 어떤가?
피아노 앞에 앉아서 건반을 마구 두들겨 대는 것도 자유롭다고 할 수 있을까?

그건 자유가 아니라 혼돈이다.
그런데 아주 오랫동안 훈련한 피아니스트가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연주를 할 때 나는 진정한 자유, 가장 고귀한 자유를 느낀다.
분명 악보가 있는데, 그리고 악보대로 연주하는데, 악보를 뛰어넘는 자유로움을 발견한다.
가수든, 연주자든, 연기자든, 어떤 직종이든 끊임없이 연습하고 훈련한 뒤에 그 모든 형식과 틀을 뛰어넘어 자신만의 느낌을 표현하는 모습은 정말 아름답다.
거기서 참 자유로움을 본다.


물론 악보의 형태에 얽매여 아무런 느낌 없이 기계적으로 연주한다면, 자유롭다 말할 수 없다.
그렇지만 천방지축 날뛰는 것도 자유라고 말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진정한 자유는 진리 안에서 진리를 자기 몸과 마음으로 완전히 녹여내어 새롭게 창조할 때 진정 자유롭다 말할 수 있다.


내가 니체의 사상에서 많은 영감을 얻긴 하지만, 결코 니체를 따를 수 없는 이유가 이것이다.
그는 자유를 말하기만 했지 길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내가 믿고 따르는 예수는 길을 이야기한다.
처음에는 얽매는 것 같고, 구속하는 것 같지만, 계속하여 따르며 진리를 내재화시키다 보면 어느새 자유롭게 높이 날아오르게 된다.
나는 조금 힘들고 어렵더라도 진리를 따라, 진리 안에서 자유롭기를 원한다.
이 시대 진리를 따라 자유롭게 살아가는 진정한 크리스천이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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