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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기가 필요하다.

by Logos Brunch

병원에 가기 좋아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난 중학교 때 기관지염을 앓았다. 주사 맞는 것이 싫어서 병원에서 도망쳐 나와 1시간이 넘는 거리를 걸어온 적이 있다. 그 후로 무려 한 달 이상 매일같이 항생제 주사를 맞아야 했다. 엉덩이에 주사 맞는 것은 죽기보다 싫었지만,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했다.


7 년 전 어깨 수술한 이후 날씨가 조금만 찌뿌둥해도 수술한 오른쪽 어깨가 뻐근하고 시큰시큰하다. 육체적 고통은 그래도 조금 참을만하다. 그러나 정신적 고통은 정말 견디기 힘들다. 어제까지 서로 사랑했는 데, 그때는 어떤 모습이라도 다 용납이 되었는 데 한순간 알 수 없는 이유로 헤어지고 서로 대화조차 할 수 없을 때 삶이 적막해진다. 일이나 삶이 힘든 것은 다름 아닌 인간 관계 때문이다. 사람들이 자살하는 이유는 세상에 자기 마음을 알아 줄 사람 한 명이 없어서라고 한다.


예수님 당시 유난히도 나환자들이 많았다. 그들이 정확하게 오늘날의 한센씨병 환자들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단순한 피부병도 나환자로 취급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을 것이다. 아무튼 나환자로 판명되면, 사회에서 함께 살 수 없었다. 강한 전염성을 염려해서 그들을 철저하게 격리 수용하였다. 가족도 함께할 수 없었다.


한 나병 환자가 예수님께 다가와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하였다.

이 나병환자가 어떤 경로로 예수님에게 다가왔는지는 설명하지 않고 있다. 그는 혼자 스스로 결정하고 다가왔을 것이다. “죽으면 죽으리라.” 결심하였던 에스더와 같은 결단이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살다 죽을 바에야, 예수님께 한번 요청해보고 죽는 것이 나을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을까? 죽음을 각오하는 신앙은 위대한 신앙이지만, 그렇다고 큰 확신이 필요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 나병환자도 단지 다른 길이 없다는 확신이 있었기에 그런 결정을 한 것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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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을 때가 오히려 하나님을 만날 큰 기회이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을 때가 오히려 소망의 기회이다. 예수님께서 큰 믿음을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다. 그저 삶의 작은 희망이라도, 아주 작은 믿음이라도 좋다.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마8:2)

단 한마디면 족하다. 주님을 만나는 면회신청에 큰 선물이나 큰 믿음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가난한 마음, 상처받은 마음이라도 언제든 환영하신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용기를 내어 주님께 나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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