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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gos Brunch Nov 14. 2018

노아 언약과 선교적 사명

창9:1-11

사람의 눈은 1만 7천 가지 색깔을 구별할 수 있습니다. 일부 영장류를 제외하면 포유류 대부분은 색맹입니다. 투우경기에 사용하는 붉은 천은 황소를 흥분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관람객을 흥분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실제 황소는 색깔을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에 흰색 천으로도 황소를 충분히 흥분시킬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자연의 색은 몇 가지나 될까요? 인간을 기준으로 하면 1만 7천 가지 색이면 충분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만드신 자연의 색은 무한대에 가깝습니다. 낭비 아닐까요? 식별하지도 못하는 그 수많은 색을 왜 만들었을까요?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계의 첫 번째 특징은 다양성입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아름답다는 말을 계속한 이유가 다양성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연의 다양성은 말할 것도 없고 사람도 참 다양합니다. 피부색도, 지문도, 얼굴도, 성격도 다 다릅니다. 서로 차별하라고 다르게 하신 것이 아니라 서로 합력하여 조화를 이루라고 하신 것입니다. 


아실런지 모르지만, 다윈은 독실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다윈이 지렁이를 연구하면서 재미있는 글을 썼습니다. 지렁이는 토양을 가꾸어 ‘지구의 얼굴’을 바꾸어 놓는 능력이 있습니다. 다윈은 지렁이의 효과를 계산해 보았습니다. 

“지렁이가 암석의 입자들을 분쇄하여 가루로 만드는 힘을 고려할 때, 우리는 1에이커(약 4,046㎡)의 땅에서 매년 10톤의 흙이 그들의 몸을 통과하여 지표로 이동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지렁이가 서식하려면, 땅은 적당히 촉촉하고, 모래나 자갈이나 암석이 너무 많지 않아야 한다. 영국만 한 크기의 나라에서, 지질학적 측면에서 볼 때 별로 길지 않은 기간(예컨대 100만 년) 동안 지렁이가 수행한 역할을 결코 만만하게 볼 수 없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생명, 지렁이와 같은 작은 생물조차도 자기 역할을 충실히 감당하고 있음에 감사드립니다. 


이 아름다운 자연을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심판하실 때 하나님께서 자연 만물에 얼마나 미안하셨을까요? 아무런 잘못도 없는 데 말입니다. 그래서 커다란 방주를 지어 피조물을 보존하게 하셨습니다. 홍수 이후 노아 가족과 더불어 새와 가축과 땅의 모든 생물을 불러 함께 언약을 맺었습니다. 왜 모든 생물이 언약식에 참여했을까요? 


댓글을 보면 자연 만물이 아름답고 소중하니까 아끼시기 위해서라는 답이 다수 나왔습니다. 맞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웠을까요. 그러나 전 조금 다르게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면서 아름답다고 하셨지 완벽하다고 하시지는 않았습니다. 이신론자들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이 완벽하고 완전하므로 하나님께서 세상에 개입하지 않으신다고 말합니다. 이신론자들은 하나님의 섭리나 인도하심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명백히 잘못된 생각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를 아름답게 하셨지만, 완성은 요한계시록에 가서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께서 우주 만물과 사람을 창조하셨고 그들과 더불어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려는 뜻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아름답고 조화로울 뿐 아니라 완성된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를 소망하셨습니다. 

우리가 나라 하면 국민, 영토, 주권을 흔히 이야기하지요. 하나님 나라의 주권은 하나님께 있고, 국민은 하나님의 사람이고, 영토는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모든 피조물과 세상은 소홀히 할 수 없지요.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하여 가장 밑바탕은 영토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영토인 세상과 언약을 맺습니다. 내가 너희를 보존하리라. 일단 영토가 안정되야 백성이 편안하게 살 수 있지 않겠습니까? 영토를 빼앗기면, 거기 사는 백성의 자유도 빼앗기는 법입니다. 


어떤 분은 질문하더군요. 하나님께서 노아 언약을 통하여 이제 물로 심판하지 않지만, 마지막 날 불로 심판하지 않나요? 그러므로 처음 창조된 것은 다 없어지고 새 하늘과 새 땅을 주지 않나요? 그렇게 물어보는 게 당연합니다. 그러면 저는 반문하겠습니다. 성경에서 옛사람은 죽고 새사람으로 태어난다고 하면, 옛사람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인가요? 성경에서 ‘새’라는 단어는 새롭다는 의미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마지막 날 종말은 창조 세계 전체를 망가트린 죄된 상태의 종말을 의미합니다. 죄를 깨끗이 청소하고 하나님께서 만드신 아름다운 세계가 완벽하게 회복될 것을 뜻합니다. 그때까지 하나님께서는 자연 만물을 보존하실 계획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말했습니다.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롬 8:19-21) 

피조물은 회복의 날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들이 허무한데 굴복하기가 좋아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자연을 훼손하고 오염시키고 파괴하는 일을 보면서, 자연은 괴로워합니다. 


인간은 지배자가 아닙니다. 인간은 자연 만물을 보존할 책임이 있습니다. 복음주의자들은 케이프타운 서약에서 창조세계에 대한 선교적 사명을 발표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세계에 대한 우리의 사랑은, 우리가 지구상의 자원들을 파괴하고 허비하며 오염시키는 데 일조하고 무분별한 소비주의에 대한 해악적인 숭배를 회개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긴박하고도 예언자적인 사명감으로 환경보호의 책임을 완수하는 데 헌신할 것을 다짐한다. 우리는 환경보호를 중요한 선교적 사명으로 깨달은 그리스도인들과, 하나님의 창조세계의 풍성함을 통해 인간의 필요를 채우라는 명령을 성취하기 위해 노력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지지한다. 우리는 성경이 창조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구속적 목적을 선포하고 있음을 확신한다. 총체적 선교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한 복음이 죄로 인해 깨지고 고통당하고 있는 개인과 사회, 창조세계 전체를 향한 하나님의 기쁜 소식이라는 성경적 진리를 명확하게 인식, 이를 선포하고 삶으로 살아내는 것이다. 개인과 사회와 창조세계 모두 하나님의 구속적 사랑과 선교의 대상이다. 또한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의 총체적 선교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


노아 언약은 창조 언약과 달리 동물을 먹는 문제를 다루었습니다. 타락한 인간은 창조 때 주신 명령을 따르지 않고 동물을 잡아먹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짐승을 잡아먹는 상황을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지나치게 욕심을 부리며 무고한 살생은 엄격히 제한하였습니다. 그것은 피째 먹지 말라는 명령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고기를 그 생명 되는 피째 먹지 말 것이니라. 내가 반드시 너희의 피 곧 너희의 생명의 피를 찾으리니 짐승이면 그 짐승에게서, 사람이나 사람의 형제면 그에게서 그의 생명을 찾으리라.”(창9:4-5)

여기서 주의 깊게 보아야 할 것은 짐승의 피 이야기 뒤에 사람의 피 이야기를 붙여 놓은 것입니다. 역으로 이야기하면 사람을 죽인 피 값이나 동물의 피값이나 같다는 말입니다. 단순히 동물을 피채 먹을 때 살인죄와 같이 취급한다는 소리일까요? 아닙니다. 그것은 자기 식욕을 채우기 육식에 대한 욕심을 함부로 부리는 것을 뜻합니다. 


고대 가축은 가족과 같았습니다. 한집안에서 함께 먹고 함께 자고 함께 생활했습니다. 그러한 가축을 자기 욕심 때문에 마구 죽여서 먹는 사람이 있다면 어떨까요? 욕심이 잉태하면 결국 사망에 이르게 됩니다. 고대인 중에 매일같이 육식할 수 있는 사람은 엄청난 부자일 것입니다. 창고에 쌓을 것이 없도록 쌓은 사람입니다. 그 창고에 넘치도록 쌓기 위하여 치러야 희생은 동물만이 아닐 것입니다. 소작농들도 희생했을 것입니다. 다른 모든 만물을 희생해가면서 욕심을 채우는 사람은 결국 사망에 이르는 죄를 짓는 것입니다. 


전 이 말씀이 왠지 인간의 무한한 욕심을 지적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 욕심이 현재 자연을 파괴하고, 피조물을 괴롭히고, 다른 사람을 학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동물도, 자연도 사람의 인권과 비견되는 생명권을 가지고 있다고 하십니다. 고통당하지 않고 학대당하지 않을 권리가 그들에게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욕심으로 자연을 파괴하고 오염시키는 것을 싫어하십니다. 케이프타운 서약에서 밝힌 바대로 창조세계도 하나님의 구속적 사랑과 선교의 대상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참고도서

1. 아서 글라서,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선교', 임윤택 옮김 (생명의 말씀사 :서울) 2016년

2. 크리스토퍼 라이트, '하나님의 선교', 정옥배, 한화룡 옮김 (IVP:서울) 2010년

3. 올리버 색스, '의식의 강', 양병찬 옮김, (알마:서울) 201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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