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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gos Brunch Nov 16. 2018

애통하는 사람

산상수훈

하나님 나라에는 커트라인이 없다. 그런데 지금까지 기독교는 마치 하나님 나라에 커트라인이 있는 것처럼 가르쳤다. 일반적으로 기독교는 산상수훈이나 윤리 규범을 가르칠 때, 마치 하나님 나라의 커트라인을 설명하는 듯하다.


이 정도 수준은 되어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 심령이 가난해야 하고, 죄에 대해 애통해야 하고, 온유하고 긍휼하며, 마음이 청결하고,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아야만 천국 가는 것처럼 가르칠 때가 있다. 이러한 태도는 불신자에게도 그대로 적용한다.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 대표적이다. 그들은 이분법적으로 사람을 구분한다. 나는 커트라인을 넘어서 천국 안에 들어온 사람이고 너희는 지옥 가는 사람이다. 누가 사람을 정확히 구분할 수 있을까? 그들에게 나름의 기준점이 있지 않고서 어찌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흔히들 믿음이라고 말한다. 나도 믿음이 기준점이 된다는 데 동의하지만, 그러나 그 믿음을 어떻게 측정하고 판단할 것인가? 중세 가톨릭은 교회 안에 구원이 있기에 교회 안에 들어오면, 믿음이 있다고 판단하고 구원을 선포하였다. 현재 기독교도 중세 가톨릭을 본받아서 기준점을 그렇게 정하였나?


하나님께서 믿음이란 기준점을 사용하실 때 이분법적으로 두부 모 자르듯이 사람을 구분할까 봐 오해하지 말라고 바로 이어서 ‘은혜로’라는 말을 덧붙여 주었다. '믿음으로' 라는 말을 다르게 말하면, ‘은혜로’라는 말이다. ‘은혜로’라는 말은 사람을 구분하지 말라는 뜻이다. 세상에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지 않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할 사람도 없다. 모두가 은혜 받을 수 있는 사람이다.


나는 구약을 참 좋아한다. 여러 번 말하였는데 거듭 말하자면, 신약의 사도들이나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신약성경은 없었다. 그들이 소유한 성경은 오직 구약성경뿐이었다. 그들은 구약성경을 읽으며 예수를 믿었고, 구약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는 도리를 발견하였다. 유대인이 구약을 율법적으로 해석하였다면, 초대교회는 구약을 은혜로 재해석하여 읽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구약뿐만 아니라 신약까지도 율법으로 읽는 잘못을 범하고 있다.


구약을 보면 하나님께서 저주와 심판을 자주 선포하신다. ‘반드시 죽으리라’, ‘반드시 망하리라’, ‘40일 후에 멸망하리라’ 이런 말이 자주 등장한다. 하나님께서 그냥 ‘죽으리라’한 것이 아니라 ‘반드시’라는 강조형 부사를 사용했다면, 그것은 강력한 하나님의 의지를 드러낸 것이다. 그런데 정말 반드시 죽이고 멸망했을까? 성경을 잘 살펴보면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 뒤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이 숨어 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그것을 발견하고서 하나님의 아버지 같고 어머니 같은 자애로운 성품을 발견하였다.


자녀를 키우면서 나도 아이들에게 혼을 낼 때마다 '반드시’,’절대’라는 말을 자주 사용했다. 그것은 정말 집에서 나가라는 뜻도 아니고, 죽어버리라는 뜻도 아니다. 그것은 부모의 간절한 마음을 담은 것이다. 설령 자녀가 부모의 뜻을 또 어긴다 해도, 그 자녀를 다시 끌어안는 게 부모다. 인간의 죄성과 연약함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도 그와 같이 말씀하신다. 선지자를 통하여 '반드시 멸하리라' 선포하시는 배경에는 “빨리 돌아와라. 빨리 회개하라.”는 뜻이 숨어 있다. 설령 그들이 돌아오지 않아 결국 멸망하며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다고 해서 버리시느냐? 아니다. 하나님은 그곳까지 따라가셔서 그들의 아픔을 돌아보시며 함께 아파하시고 그들을 다시 회복시켜 주신다.

예수님께서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다고 하실 때, 일반적으로 죄에 대하여 애통하는 마음이라고 해석한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꼭 그것만 있을까? 꼭 그렇게 신학적이고 교리적인 뜻만 있을까? 콧물 눈물 흘려가며 회개해야만 하나님께서 그를 붙들고 위로하여 주실까?


지금 산상수훈을 들으려고 모여든 예수님의 청중을 분석해 보자. 그들은 로마 식민지 백성이다.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멸망한 이후 수백 년 동안 유대인은 식민지 백성으로 살아왔다. 일제 36년 식민지 삶을 살지 않아서 식민지 백성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모르겠다고 하면, 역사를 살펴보라고 말하고 싶다. 2,000년 전 식민지 유대인의 삶에 어떤 애환이 있었을까? 어떤 기가 막힌 스토리가 있었을까? 그들의 마음과 스토리를 헤아리는 능력이 없기에, 아주 차갑고 냉철하고 지성적이고 교리적인 신학만 나올 수밖에 없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을 대했던 종교 지도자들이 그러했다. 그들은 자기도 지지 못할 무거운 짐(교리와 신학)을 유대 백성에게 짊어지웠다. 안 그래도 살기 힘든데 종교마저 아무런 위로가 되지 못했다. 예수님은 바로 그러한 청중에게 산상수훈을 선포하고 있다.


애통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위로받는 나라가 왔습니다. 남몰래 베개닛을 적시며 밤새 울음을 삼키시는 여러분, 여러분이 위로를 받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기가 막힌 사연에 귀를 막고 있는 저 종교 지도자들, 세상의 권력자들과 하나님은 다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핏소리를 들으시고, 여러분의 신음에 귀를 기울이십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무너져 어디에도 기댈 곳이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계십니다.


믿음보다 더 중요한 것은 보는 눈이다. 하나님 나라를 보는 눈, 하나님을 보는 눈, 복음을 보는 눈이 열려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여러 차례 세상 사람과 다른 눈을 가져야 한다고 말씀하였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사람을 주님은 안타깝게 여기셨다. 예수님께서는 잃어버린 동전, 잃어버린 어린양, 겨자씨같이 겉보기에 하찮고 작고 보잘것없는 것들에 관심을 가지도록 말씀하셨다. 아무리 말해도 못 알아듣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숨김없이 그대로 말씀하였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나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눅5:31-32)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애통하는 자를 보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억울한 약자의 설움에 같이 울으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에서 행복에 취하여 희희낙락하는 사람을 찾으러 오신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에서 만족하여 즐거워하는 사람을 찾으러 오신 것이 아니다. 강남 60평 아파트에서 풍요롭게 살면서 노래부르는 사람을 찾으러 오신 것이 아니다. 그들에게 세상은 이미 답이고 천국이다. 예수님은 세상에서 알아주는 사람 하나 없고, 답답한 사정을 들어줄 사람 하나 없는 사람을 찾으러 오셨다. 예수님은 세상에서 억압받고 설움 받는 것에 지쳐 이제는 울 기력조차 없는 사람을 찾으러 오셨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소망이 없다고 하는 사람을 찾으러 오셨다. 그리고 말씀하신다. 아니다. 소망이 있다. 하나님께 소망이 있다. 예수님은 교회가 바로 그러한 소망 공동체, 곧 위로 공동체가 되기를 원하셨다.


산상수훈은 하나님 나라 초청장이다. 하나님의 은혜와 위로가 필요한 사람은 누구라도 들어와라. 그리고 그들의 눈물을 닦아주고, 그들의 애달픈 사연을 들어주고, 그들의 억울함을 풀어주면서 하나님 나라를 소개하신다. 하나님 나라 삶의 스타일, 하나님 나라가 삶을 바라보는 시각, 하나님 나라의 비전과 목표를 하나하나 소개하신다. 그리고 함께 뛰어볼래? 초청하신다. 함께 하나님 나라 공동체를 이 땅에 이루어볼래? 초청하신다.


지금까지 세상 나라는 우리에게 온갖 약속을 다하였다. 세금을 바치면 복지혜택을 주고, 의료혜택도 주고, 공정한 재판을 해서 억울함이 없게 하고, 외적의 침입에서 백성을 철통같이 지켜줄 것이다. 그러니 나라에 충성해라. 세금(헌금)도 나라에 하고, 목숨도 나라에 바쳐라. 간혹 누군가 나라를 위해 싸우다 죽으면, 매스컴은 대대적으로 광고한다. 애국이니 순국이니 떠든다. 세상 나라는 온갖 선전술과 장밋빛 약속으로 수많은 사람을 미혹하고 있다. 사람들은 세상 나라가 답이고 기독교가 말하는 하나님 나라는 답이 아니라고 생각하여 교회를 떠난다.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헌신하고 생명바치는 이야기는 오래전 옛날 이야기가 되었다.


그런데 정말 속지 말아야 할 것은 세상 나라의 약속이다. 그들은 결코 약자 편이 아니다. 언제나 강자 편이다. 권력자 편이다. 눈곱만 한 복지혜택을 주면서 마치 이 세상 나라가 천국인 것처럼 호도한다. 돈 없는 사람에게 의료혜택은 먼 남의 동네 이야기다. 공정한 재판은 이미 물 건너간 지 오래다. 외국에 나와서 살아보면 알지만, 국가가 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힘쓰는 것은 없다. 통제하고 다스리기 위해서는 열심이지만 보호하고 살펴주기 위함은 거의 없다. 그런데도 기독교는 세상 나라에 매달려 애걸복걸한다. 우리 기독교를 지켜주세요. 우리 기독교가 말하는 것들을 법으로 만들어 주세요. 그들은 기독교를 단지 유권자로 보지, 기독교 정신이나 윤리는 안중에도 없다.


세상 나라의 실상이 이러한데도 기독교는 그 세상 나라보다 더 못하다는 사실이 비극이다. 마치 로마 식민지하에서 세속 권력이 백성을 이리저리 수탈하고 억압하는데 종교지도자들이 율법이니 도덕이니 하면서 백성을 괴롭히는 모습과 비슷하다.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고 하는 데 현재 기독교가 바로 그러하다. 현재 기독교는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 죽은 종교일뿐이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그 하나님 나라 공동체를 만들 구성원을 초청하고 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 초대 교회 기독교다. 그런데 2,000년 세월이 흐르면서 기독교는 다시 죽은 종교로 바뀌었고 하나님 나라는 관심 밖이다. 기독교가 다시 살려면 주님이 가르쳐 주시고 세워주셨고, 우리에게 사명으로 주셨던 하나님 나라 세우기에 헌신하여야 한다. 한국 기독교가 하나님 나라 공동체를 세우는 데 실패한다면, 이 백성에게 버림받고 결국은 사라지고 말 것이다. 불행하게도 지금 한국 기독교는 죽는 길로 자꾸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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