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ogos Brunch Nov 20. 2018

온유한 사람

산상수훈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소개하며 사람들을 초청하였다. 삶이 너무 팍팍하고,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고역인 그들을 초청하였다. 영혼과 육신이 갈급하여 아무런 희망도 찾지 못하는 그들을 초청하였다. 가슴을 찢고 울부짖어도 시원치 않을 그들을 초청하였다. 세상 어디에도 기댈 곳 없는 그들을 초청하였다. 


그럼 하나님 나라를 실제로 소유할 자는 누구인가? 그는 온유한 사람이다. 온유한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성격이 부드럽고, 양보를 잘하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일까? 성경에 보면 아브라함이 조카 롯과 목초지 때문에 갈등하였다. 그때 아브라함은 조카에게 모든 것을 양보했다.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사울 왕은 다윗을 죽이려고 여러 번 군대를 동원하였다. 사울은 다윗을 죽이려 하였지만, 다윗은 사울을 죽일 기회에도 오히려 살려주었다. 온유한 사람이다. 


그러나 성경의 온유는 성격이 부드럽고, 무조건 양보하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그건 온유가 아니라 연약함이다. 성경에 온유한 사람은 진리를 부여잡은 사람이다. 진리를 부여잡았기 때문에 진리를 위해서 죽는 사람이다. 순교자들은 온유한 사람들이다. 그들이 칼과 창으로 대항할 수 없어서 순교하는 것이 아니다. 하늘의 열두 영을 불러서 결판내고 싶지만, 그들은 그런 기도를 드리지 않는다. 그들은 기꺼이 생명을 내어놓는다. 왜?


그들은 이 땅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소망을 두었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땅)는 오직 온유함으로 얻기 때문에 그들은 양보하고, 희생하고, 순교하였다. 그건 세상 제국을 이루는 방법과 정 반대다. 


세상 나라가 폭력을 사용한다면, 하나님 나라는 비폭력을 사용한다. 

세상 나라가 증오를 조장한다면, 하나님 나라는 사랑을 실천한다. 

세상 나라가 배제를 유도한다면, 하나님 나라는 환대로 대한다.

세상 나라가 전쟁을 요구한다면, 하나님 나라는 평화를 만든다. 

세상 나라가 눈물 나게 한다면, 하나님 나라는 그들을 위로한다. 

세상 나라가 가난으로 괴롭히면, 하나님 나라는 연대와 공유로 함께한다. 

세상 나라가 무력으로 억누르면, 하나님 나라는 죽음으로 답한다. 


온유는 하나님 나라의 가장 큰 무기다. 예수님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마11:29) 하셨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하여 오신 분이기 때문에, 모든 것을 양보하였다. 그분의 품에 안기지 못할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살인자도, 간음자도, 병자도, 가난한 자도, 나그네도, 이방인도, 난민도, 소수자도, 죄인 중의 괴수도, 그 어떤 사람도 주님은 다 품어 안으신다. 주님의 궁극적 목적은 모든 사람을 이끌어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심이다. 그 뜻을 위해서라면, 양보하지 못할 것은 하나도 없다. 주님은 생명까지 내어 놓으셨다. 


예수님이 증거하는 하나님 나라는 바로 이런 나라다. 사실 예수님 이전에도 하나님 나라를 선포한 사람이 많았다. 구약 시대 선지자들이 선포한 중심 주제도 하나님 나라였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소망하고 설교하였다. 세례요한도 사역을 시작하자마자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이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는 단순한 설교가 아니었다. 


예수님께서 단지 하나님 나라를 설교하러 오실 거라면, 이 땅에 오시지도 않았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시고, 초청하시고, 인도하시면서 동시에 하나님 나라를 이루신다. 신학 용어로 말한다면,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현존(存)’이시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보여주셨다. 말로만 아니라 그들 가운데 하나님 나라가 어떠한지 나타내주셨다. 


예수님께서 문둥병자를 고치신 것을 단지 치유라고 하지 마라. 예수님께서 앉은뱅이를 고치고 거지의 손을 붙잡아 주신 것을 단순히 섬기고 봉사했다고 생각하지 마라. 예수님께서 간음하다 현장에 붙잡힌 여인을 단지 위기에서 건져 주신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실제로 보여주시는 사건이다. 

예수님은 몸으로 행동으로 삶으로 ‘하나님 나라란 이런 것이다’ 보여주었다. 그걸 치유, 용서, 사랑, 섬김, 봉사라는 신학적 단어로 바꾸어 버리고 화석화시키면 잘못이다. 예수님의 삶을 신학교 책상으로 끌고 가면, 안 된다. 예수님의 행동을 교리로 바꾸면, 범죄다. 그건 실천하고 따라야 할 모범이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 공동체를 보여주셨다. 


하나님 나라 공동체는 온유로 만들어 가는 나라다. 세상을 구원하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심은 곧 온유다. 칼을 칼로서 대응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으로 대응하는 행위다. 온유는 증오에 사랑으로, 배제에 환대로, 전쟁에 평화로, 폭력에 순교로 답한다. 그것을 한 마디로 하면, '십자가'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자신의 온몸과 마음과 살과 피를 다 내어주심으로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였다. 진실로 하나님 나라(땅)를 얻기 원한다면, 온유(십자가)로 나아가야 한다. 


예수님은 지금 사람들에게 함께 하나님 나라 공동체를 만들자고 도전하신다. 그들은 떨어지려야 더 떨어질 곳이 없고, 망하려야 더 망할 것이 없는 밑바닥 인생이다. 세상에 아무런 소망이 없는 그들에게 하늘의 위대한 소망을 보여주신다. 그리고 온유함으로 함께 가자고 하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마11:29)


예수님은 그렇게 하나님 나라를 오픈하셨다. 예수님은 그렇게 하나님 나라 공동체를 만드셨다. 그러면 교회는 어떻게 해야 할까? 신학이론이나 만들고, 설교만 하면 되나? 하나님 나라는 말과 혀로 하는 것이 아니라, 행함과 진실함으로 이루어야 한다. 초대 교회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하나님 나라 공동체를 만드는 일에 힘을 다하였다. 죽음의 위협도, 핍박도 모두 온유함으로 극복하며 나아갔다. 


그러다 그만 콘스탄티누스의 계략 앞에 무너졌다. 기독교를 공인한다는 말 한마디에 그만 무너졌다. 물론 콘스탄티누스는 말만 한 것이 아니었다. 빼앗았던 재산도 다 돌려주고, 커다란 금빛 교회도 세워주고, 세상 권력과 물질도 주었다. 정신을 잃은 기독교는 그날 영혼을 팔아버렸다. 하나님 나라 비전도 팔아버렸다. 그들은 세상 나라와 손잡고 세상 나라가 요구하는 대로 나아갔다. 


예수님이 선포하신 사랑, 환대, 포용, 용서, 평등, 평화, 위로는 사라졌다. 대신 증오, 차별, 배제, 분열, 파당, 갈등, 무시, 폭력, 전쟁으로 채웠다. 교회는 세상으로 오염되었고 온유한 마음으로 품어주고, 위로하고, 사랑하고, 격려하고, 마침내 생명까지 바치며 희생하던 공동체 정신은 다 사라졌다. 세상에 취하여 경쟁하고, 싸우고, 남을 밟고 일어서려 하고, 무조건 크려고만 하고, 돈과 명예와 권세만 추구하는 교회는 교회가 아니다. 병따개가 병을 딸 수 없으면 병따개가 아닌 것처럼, 교회가 하나님 나라를 추구하지 않으면 교회가 아니다. 


예수님이 세우신 하나님 나라는 위로의 공동체요, 사랑의 공동체요, 정의의 공동체이면서 동시에 선교적 공동체다. 구원이라는 분명한 목적을 향하여 모든 것을 아낌없이 희생하고 양보하는 온유의 정신으로 만들어가는 구원 공동체이다.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온전히 완성하실 그 나라를 바라보며 나아가는 희망 공동체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애통하는 사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