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11:1-9
바빌로니아 포로로 끌려간 이스라엘 백성은 의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질문하였습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그들은 생각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정말 하나님이십니까?”라는 근본적인 질문에서 “하나님은 정말 나를 사랑하십니까?”라는 관계형 질문도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망한 이유가 무엇입니까?”라는 원망 섞인 질문에서 “이스라엘 나라를 언제 회복하여 주시렵니까?”라는 간구형 질문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질문은 추상적인 질문이 아닙니다. 매우 현실적이고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질문입니다. 자기 몸으로 부딪치며 느끼고 생각하고 깨달은 질문입니다.
시편 저자는 “어찌하여”라는 말을 사용하여 하나님께 질문하였습니다.
“여호와여 어찌하여 나의 영혼을 버리시며 어찌하여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시나이까”(시 88:14).
“어찌하여 뭇 나라가 그들의 하나님이 이제 어디 있느냐 말하게 하리이까”(시 115:2).
“주여 깨소서 어찌하여 주무시나이까 일어나시고 우리를 영원히 버리지 마소서”(시 44:23)
하나님은 신앙인들이 하나님께 질문하기를 원하십니다. 강의를 끝내고 ‘질문 있으십니까?’하면, 모두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 다물고 있을 때 ‘내 강의가 바로 전달되긴 한 건가?’ 의심하게 됩니다. 우리의 마음속 생각마저 아시는 하나님께서 그럴 일이야 없으시겠지만, 그런데도 하나님은 질문하는 사람, 생각하는 사람을 좋아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의 고민과 질문과 의심과 분노를 다루시면서, 함께 이야기를 풀어가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저는 그런 면에서 구약 성경을 좋아합니다. 구약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얽힌 다양한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신약은 그런 구약 이야기에서 핵심 교훈과 의미를 찾아내어 쓴 책입니다. 특별히 신약의 서신들이 그러합니다. 그러므로 신약 서신을 읽을 때, 행간에 숨은 이야기를 읽어야 합니다.
저는 인터넷으로 성경공부를 시작하면서 과연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보여줄까 의심했습니다. 왜냐하면, 인터넷에서 성경공부 한다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선 인격적인 만남과 교제를 하기에 제약이 많습니다.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는 것이 아니므로 의례적인 언어나 혹은 ‘좋아요’ 한 번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얼굴도 모르고 상황도 모르기 때문에, 때로는 폭력적인 언사나, 무시하는 언행을 일삼는 경우도 자주 있습니다.
이런 식의 성경공부를 처음 하기에 여러 걱정과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질문하기도 어려웠고, 대답하는 것은 더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처음부터 반응은 폭발적이었습니다. 그리고 4번째 바벨탑 사건은 가르치고 지도할 필요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성경 말씀에서 의미를 찾아내는 모습을 보고 저는 크게 고무되었습니다.
제가 처음 질문한 것은 “바벨탑 사건을 통하여 볼 수 있는 인간의 본성은 무엇이 있을까요?”였습니다. 어떤 분은 바벨탑을 노후 대책이나 연금으로 보았습니다. 참신하고 재미있는 생각입니다. 홍수를 경험한 사람들은 불확실한 미래를 보며 생존본능이 발동했다고 할 수 있지요. 결국, 그들은 다시는 홍수로 심판하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고 발벨탑을 쌓았습니다.
그리고 많은 분이 바벨탑을 통해 인간의 끝없는 욕망을 보셨더군요. 돈과 권력, 최고가 되고 싶은 마음, 종교까지도 자기를 드러내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려는 죄성.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과 같아지고 싶은 마음 때문에 선악과를 따먹었는데, 바벨탑에서도 인간은 하나님과 같아지려고 하였지요. 그러한 마음은 지금도 그대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인간은 뭉치면 못할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듯합니다. 인간의 지식이 쌓이면 하나님처럼 되려 합니다. 현재 과학이 생명을 창조하고 싶어서 안달이 났습니다. 유전자를 조작하고, 생명을 복제하고, 인조인간을 만들려 합니다. 앞으로 과학이라는 바벨탑이 인간 세상을 어떻게 망가뜨릴지 두렵습니다.
중동에 가면 아직도 바벨탑이라고 불리는 지구라트(Ziggurat)가 여러 개 남아 있습니다. 지구라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들이 아브라함의 고향인 우르와 바벨론에 산재해 있습니다. 지구라트가 창세기 11장에 언급한 바벨탑이란 증거는 없습니다.
그러나 수메르 문명은 일찍부터 탑을 쌓았습니다. 무엇 때문에 쌓았는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어떤 학자는 신전이라 하고, 어떤 학자는 천문관측을 위한 것이라 합니다. 아무튼, 그 규모는 어마어마합니다. 우르에 있는 지구라트는 정방형으로 폭이 약 43.3미터, 길이가 약 62.5미터입니다. 높이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근처에 있는 에사길 신전 유적에서 발견한 서판에 따르면, 지구라트 높이는 약 91.5미터였음에 틀림없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약 26층 높이의 빌딩입니다. 이걸 어떻게 지었을까요? 누가 지으라고 명령했을까요?
저는 바벨탑을 보면서 거대한 권력의 힘, 곧 제국주의를 보게 됩니다. 그 제국주의 아래 무지한 백성은 저항하지 못하고 순종하였습니다. 자기가 하는 행동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도 모른 채 위에서 내린 명령에 생각 없이 따라갔습니다. 그것이 인간의 무지요, 죄입니다. 제국주의는 생각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생각 없이, 무조건 순종하고 복종하라고 요구합니다. 거기 얼마나 많은 사람의 피눈물이 있으며, 얼마나 많은 사람이 희생했을까요? 세상 나라는 힘없는 백성의 희생과 죽음 위에 세우는 나라입니다.
저는 두 번째 질문을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심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흩으심은 저주였을까요? 축복이었을까요? 많은 분은 두 가지 의미를 다 생각하셨습니다. 흩으심은 하나님의 분노요 심판으로, 동시에 흩으심은 각자의 자리에서 욕심 없이 겸손하게 하나님 뜻대로 살면서 새롭게 출발하는 것이라고 이해하셨습니다. 저는 여러분의 생각에 동의합니다.
구약학자 폰 라드는 ‘죄의 퍼짐, 은혜의 퍼짐’이란 말로 설명했습니다. 바벨탑을 쌓던 사람들이 흩어지면서 복음을 전파했을 까닭은 없습니다. 그들이 흩어져서 하나님을 믿었다는 증거도 없습니다. 다만 뭉쳐서 하나님을 대적하고, 도전하고, 하나님처럼 높아지려 하던 제국주의는 무너졌지요. 물론 그들이 흩어져서 다시 뭉치고 또 다른 제국을 만들려고 하겠지요. 예전 같으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보시고 물로 심판하시든 무엇으로 심판하시든 하셨겠지요. 그러나 인간의 죄성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심판보다 흩으심으로 처방하셨습니다.
전 흩으심이 성경의 중심 메시지 중 하나로 생각합니다. 아담이 에덴에서 죄를 범하자 하나님은 에덴에서 쫓아내십니다. 한 명을 흩으셨다고 말하기는 뭐하지만, 아무튼 중심에서 변두리로 밀어내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서 죄를 범하자 그들을 앗수르와 바벨론의 손에 멸하시고 흩으셨습니다.
흩으심은 하나님의 심판만 담고 있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은 제국의 수도인 우르에 살면서 편안하게 노년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고향과 아버지 집을 떠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떠나게 하셨지요.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땅끝까지 나아가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라고 하셨지요. 모두 긍정적 의미의 흩으심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흩어진 나그네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바벨탑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의 흩으심은 의미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뭉쳐서 이루는 것이 아닙니다. 흩으심으로 이루십니다. 낮아지고 내려가는 행위로 이루십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내려오심으로 구원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오늘날 기독교가 바벨탑을 쌓으려고 합니다. 교회를 크게 짓는 일뿐만 아니라 마치 기독교가 세상 나라를 좌우할 수 있는 듯이 행동합니다. 그건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지지할 때만 가능한 일입니다. 설령 그것이 가능하다고 해도 결코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일은 아닙니다.
현재 기독교는 흩어지는 중입니다. 흩어짐은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이제 크리스텐돔을 꿈꾸지 말아야 합니다. 흩어지고, 낮아지고 낮아져서 자신이 바벨론 포로(유배자)임을 깨닫고 변방에서부터 다시 시작하여야 합니다. 기독교의 진정성, 순수성, 야성은 변방으로 밀려날 때 비로소 다시 회복됩니다. 그러므로 폰 라드의 말대로 하나님의 흩으심은 곧 은혜의 퍼짐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