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상수훈
사람들은 무엇에 굶주려 있을까? 사람들은 무엇에 목말라 있을까? 사람들운 무엇을 간절히 원할까? 세상 사람이 원하는 것은 세상이다. 세상에서 행복, 건강, 물질, 관계 등이다. 그들은 세상이 전부인 줄 알기 때문에 세상을 바라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이 간절히 소망하는 것은 무엇일까? 논리적으로 따진다면, 그리스도인은 하늘의 시민권을 가진 자이니 당연히 하나님 나라를 사모하여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이 세상에 취하여 세상 사람과 같은 소원을 가지고 오늘도 하나님께 응답 해달라고 기도하지 않는가?
주님 앞에 모여든 사람들이 진실한 신앙인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들이 비록 유대인이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현실의 문제가 더 심각하고, 더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믿는다'하는 이름을 가지긴 했지만, 제대로 믿는다고 말할 수 없는 사람이다. 그들에게 주님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이 말씀의 뜻은 무엇일가?
전통적으로 주님이 말씀하신 ‘의’를 바울이 말하였던 ‘믿음으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의’라고 생각한다. 예수님께서 모인 사람들에게 구원의 도를 설명했다는 뜻이다. 주님이 말씀하신 '의'는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는 값없는 의'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런 생각에 동의하지만, 뭔가 부족함이 있다.
로이드존스 목사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렇게 말한다. “여기서의 의는 칭의일 뿐 아니라 성화도 포함한다고 생각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의에 대한 욕구, 의에 주리고 목 마르는 행위는 궁극적으로 온갖 형태의 죄에서 해방되고자 하는 욕구를 의미합니다.”그는 주님이 말씀하신 의는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뜻한다고 말하였다. 나는 그의 생각에 동의하지만, 그래도 아직 2% 부족하단 생각이다.
성경은 ‘의’와 ‘구원’을 연결하여 해석한다. 성경의 구원은 개인적 구원과 사회적 구원을 동시에 포괄한다. 구약 선지자들은 ‘의’를 대부분 공동체의 사회 정의, 경제 정의와 연결하여 해석하였다. 신약의 저자들 역시 ‘의’를 ‘하나님 나라’와 연결하여 해석하는 경우가 상당수다. 예수님도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6:33) 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의’와’나라’를 연결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마커스 보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 구원은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관심을 기울인다. 그러한 면에서 구원은 개인적이다. 하지만 동시에 구원은 한결같이 집단적이다. 구원은 우리가 공동체, 사회, 국가에서 어떻게 함께 사는지 관심을 가진다. 달리 말하면, 구원은 우리가 사는 세상이 어떠한지, 어떠해야 하는지와 관련이 있다.” 예수님께서 모인 청중에게 ‘의’를 말씀하실 때 개인적 구원도 포함하지만, 사회적 구원, 공동체의 구원도 포함하여 말씀하셨다. 당시 사회에서 억압받고, 경제적으로 착취당하여 하루 먹고 살기가 바쁜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구원을 소개하였다. 하나님 나라는 억압하고 착취하는 나라가 아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정의가 세워지고, 하나님의 공의로 다스려지는 나라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는 그냥 주어지는 나라가 아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이 함께 만들어가는 나라다. 거룩한 불만족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세워가는 나라다. 나는 요즘 교회를 바라보면서 거룩한 불만족을 가진 사람이 생겨나기를 소망한다. 그들이 교회에 대하여 불평하고 원망만 한다면, 그건 거룩한 불만족이 아니라 그냥 불만족일 뿐이다. 거룩한 불만족은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동력이 되어야만 거룩이란 말을 붙일 수 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처럼 믿는 것도 아니고, 속화된 것도 아닌, 중간에 서서 우물쭈물하는 사람이 오늘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한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홀로 불신 세계로 들어갔다. 갈 바를 알지 못했지만, 그는 과감히 그곳으로 뛰어들어갔다. 본회퍼는 말하였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원수들 가운데서 살았습니다. 그는 결국 자기 제자들에게 버림받았습니다. 그는 십자가 위에서 악당들과 조롱하는 자들에게 둘러싸여 홀로 있었습니다. 그가 온 목적은 하나님의 원수들에게 평화를 주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도 외딴 은둔 생활을 할 것이 아니라, 원수들 가운데서 살아야 합니다. 거기에 우리의 사명과 일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교회라는 공간에 숨어서 홀로 은둔생활 하는 사람인가? 베드로는 변화산에서 주님과 엘리야, 모세를 보고 말했다.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막9:5) 그는 안주(安住)를 원했다. 그는 평안을 원했다. 죄 많은 세상, 문제 많은 세상은 보기도 싫었다. 그들이 왜 고통당하는지, 그들이 왜 아픈지 보고 싶지 않았다. 그저 나만 구원받고, 나만 은혜 받고, 나만 영광 가운데 있기를 원했다.
보건학자 김승섭은 말하였다. 역학(Epidemiology)은 질병의 원인을 찾는 학문이다. 메르스와 같은 전염병이 유행하거나 시멘트 공장 주변 사람이 단체로 폐렴에 걸릴 때 역학조사를 한다. 이 병이 어디서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알아내어 질병이 확산하는 것을 막아내는 사람이다. 김승섭은 사회역학(Social Epidemiology)을 연구하는 학자다. 사람이 건강을 잃는 이유는 다양하다. 흡연과 벤젠 노출, 차별과 사회적 고립, 고용불안이 건강을 해칠 수 있다. 그는 질병의 사회적 원인을 찾고, 부조리한 사회구조가 인간을 얼마나 피폐하게 만들고 괴롭히고 죽게 하는지를 탐구하므로 건강을 되찾게 하려는 학자다. 그는 수많은 오해와 편견과 괴롭힘을 무릅쓰고 다른 사람의 건강을 위하여 오늘도 싸우고 있다.
나는 김승섭씨가 크리스천인지 아닌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그는 구약의 선지자처럼 사회 여러 가지 부조리함과 문제를 고발하고 바르게 함으로써 공동체의 구원을 이루려 한다. 예수님 당시 사회는 경제적 불의로 가득했다. 지배 계층은 사회 전체 부의 2/3을 독차지했다. 반면 90% 가량의 사람은 최저 빈곤층이었다. 예수님이 ‘의’를 개인적 구원으로만 말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늘 편안한 환경 속에 있는 우리 생각일 뿐이다. 주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의 관심은 개인적 구원을 뛰어넘어 사회의 구원, 공동체의 구원, 하나님 나라의 회복이었다.
초대교회 성도들도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소망했다. 그 나라는 하나님의 정와와 공의가 실현되는 나라다. 억울하게 우는 사람이 없는 나라, 가난하기 때문에 설움 받는 일이 없는 나라, 갑질을 넘어 계급질하지 않는 나라, 어떤 이유로든 차별과 배제와 폭력이 없는 평화의 나라, 병든 것도 없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도 없는 하나님 나라를 소망했다.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 바로 그런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 나라를 세우려고 끝까지 몸부림치는 사람이다. 하나님은 결코 그들을 외면하지 않으신다. 반드시 하나님 나라는 이루어진다. 하나님께서 이루신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바로 그 하나님 나라를 믿었고, 꿈꾸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를 세우려고 노력했고, 헌신했고, 생명까지 바쳤다.
마틴 루터는 말하였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대의 원수들 한가운데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견딜 수 없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나라에 속하기를 원치 않고, 벗들 사이에나 있으려고 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장미와 백합꽃 가운데 앉아 있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악한 사람들과 함께 있으려 하지 않고, 경건한 사람들과 함께 있으려고 합니다. 하나님을 모독하고 그리스도를 배반하는 사람들이여, 만일 그리스도가 그대들처럼 행했다고 하면, 누가 구원을 받을 것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