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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gos Brunch Dec 04. 2018

긍휼히 여기는 자

산상수훈

제자 훈련을 강조하는 달라스 윌라드는 말하였다. “은혜의 반대는 노력이 아니라 공로다.” 은혜와 공로는 태도이고 노력은 행동이다. 노력을 공로로 생각하면 자랑하는 죄에 빠지거나,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고 오직 값싼 은혜만 구하는 잘못에 빠지기 쉽다. 은혜는 자신의 노력을 공로로 돌리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로 해석하는 태도다.


마지막 심판의 날 오른편에 있던 양 무리는 자신이 한 행동을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그들은 주님이 주릴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 영접하였고, 헐벗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 와서 보았지만, 자신의 행위를 전혀 알지 못하였다. 그들은 면류관을 벗어 주의 발 앞에 던지며 모든 것이 주의 은혜라고 고백한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는 놀고 먹는 자가 얻는 것이 아니라, 침노(노력)하는 자가 얻는 법이다. 바울도 믿음의 행위와 사랑의 수고를 강조하였다(살전1:3).


예수님은 군중에게 하나님 나라 비밀을 말씀하시면서 드디어 구체적 행동을 말씀하신다. 긍휼히 여기는 자가 하나님 나라에 합한 자이고 복 있는 자이다. 그는 하나님의 긍휼 하심을 받을 것이다. 장기려 박사는 이 부분을 이렇게 해석하였다. “사람을 생각해 주고 불쌍하다는 마음이 먼저 있는 사람, 꾸짖는 것보다 먼저 용서해주는 사람, 자기를 잊어버리고 자기를 희생하므로 사람을 내세우려고 하는 사람, 받기보다는 차라리 주는 것을 기뻐하는 사람, 그 사람은 행복하도다. 왜냐하면, 자신이 어떤 큰 긍휼을 받는 까닭이다.”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한 첫 번째 행동은 긍휼이다. 불쌍한 사람을 보면 불쌍히 여기고, 눈물짓는 사람을 보면 안아주고, 약한 사람을 보면 곁에 있어 주고, 억압당하는 사람을 보면 함께 분노하고, 소외당하는 사람을 보면 그의 편이 되어 주고, 차별받는 사람을 보면 그를 대신하여 차별받는 사람이 될 때,  하나님 나라는 만들어진다.  

1964년 UC Berkeley 대학 교수 레너드 사임(Leonard Syme)은 독특한 연구를 진행하였다. 그는 익숙한 동네를 떠나 낯선 곳에 적응해야 했던 사람들의 심장병 발병률을 조사했다. 자기 공동체를 떠난 사람은 심장병 발병률이 3배나 높았다. 당시 의료계에서는 아무도 그의 연구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제자들은 공동체와 건강의 문제를 계속 연구하였다. 1979년 리사 버크먼(Lisa Berkman), 1997년 셸던 코헨(Sheldon Cohen), 2007년 니컬러스 크리스타키스(Nicholas A. Christakis)와 제임스 파울러(James Fowler)는 레너드 사임의 연구를 확증하는 논문을 연이어 발표하였다.


미국 펜실베니아의 로세토(Roseto) 마을에 이탈리아 이민자들이 모여 살았다. 1955년부터 1961년까지 사망진단서와 병원 진료기록을 검토한 결과, 옆 동네 같은 이탈리아 이민자 마을인 방고(Bangor) 주민의 심장병 사망률의 절반도 채 되지 않았다. 방고와 로세토는 불과 1.6킬로미터 밖에 떨어지지 않았다. 학자들은 두 마을 주민을 연구하였지만, 이유를 찾아내지 못하였다. 둘 다 이탈리아 이민자의 마을이었고, 삶의 방식이나 식습관, 즐기는 스포츠 모두 비슷하였다.


존 브룬(John Bruhn)과 스튜어트 울프(Stewart Wolf)박사는 로세토 마을을 집중적으로 연구하였다. 마침내 그들은 원인을 찾아내었다. 로세토 마을에 특별한 점 하나는 니스코 신부(Father Pasquale De Nisco)라는 훌륭한 지도자가 있었다. 니스코 신부는 마을이 성장하기 위해 정치적 참여와 교육이 필수란 사실을 알았다. 그는 마을 공동체를 하나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였다. 로세토 주민에게 미국 시민권을 얻어 적극 투표에 참여하게 했고,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도록 권하였다. 마을을 단장하기 위해 씨앗을 나눠주며 꽃을 가장 예쁘게 키운 사람에게 상을 주었다.


그 뿐만 아니라, 지역 채석장 근로자들이 시간당 8센트라는 극단적인 저임금으로 일한다는 사실을 알고 노동조합을 만들어 파업을 주도하였다. 그 결과 근로자들은 시간당 16센트씩 받으며 일하게 되었다. 마을 사람 중 누가 죽으면, 이전 갈등은 모두 뒤로 하고 함께 죽음을 애도하였다. 부모가 사망하면, 그 집 아이들을 함께 돌보아 주었다. 가족을 잃은 사람은 식량과 돈을 주어 살 수 있게 하였고, 경제적으로 파산한 가정을 돌보는 것도 공동체의 역할이라 생각하였다. 자기가 속한 공동체가 자기를 보호해 줄 거라는 확신, 자기가 위기에 처했을 때 주변 사람들이 함께해 줄 거라는 확신이 그들을 건강하게 하였다.


한 여인은 고백을 하였다.

“당신이 이런 것(공동체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그때는 당신도 당신의 십자가(공동체를 위한 희생)를 짊어질 수 있어요.”


로세토 마을 주민의 삶은 즐거웠고, 활기가 넘쳤으며 꾸밈이 없었다. 부유한 사람도 이웃의 가난한 사람과 비슷하게 옷을 입고 비슷하게 행동했다. 로세토 마을을 방문한 사람에게 그 공동체는 계층이 없는 소박한 사회였으며, 따뜻하고 아주 친절한 사람이 있는 곳이었다. 그들은 서로 신뢰하였으며 서로 도와주었다. 가난한 사람은 있었지만, 진정한 가난은 없었다. 이웃들이 빈곤한 사람의 필요를 채워주었으며 특히 이탈리아에서 이주해 오는 소수 이민자에게 그러했다.


1911년 니스코 신부가 죽은 후, 그의 후임 두치 신부(Father Ducci)와 장로교 목사 스카펠라티(Rev. Cyrus Scapellati)는 니스코의 정신을 이어받아 마을 공동체를 이끌었다. 그러나 후임자들도 죽으면서 니스코의 영향력은 점점 감소하였고, 로세토 마을은 자본주의 이념에 빠지기 시작하였다. 공동체보다는 개인의 삶을 우선하였다. 1964년이 지나면서, 이 마을의 심장병 사망률은 점점 올라가 옆마을 방고와 같아졌다. 학자들은 아쉬움 속에 로세토 마을 공동체의 효과를 로세토 효과(Roseto effect)라고 하였다.


구약 신명기는 분배 정의를 강조한다.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로 통칭하는 사회적 약자를 돌보는 것은 적선이 아니라 보호이며 연대이다. 약자를 보호하고 감싸 안는 행위는 이스라엘이 한때 이집트에서 종 생활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행위다. 긍휼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주는 것이 아니다. 긍휼은 우리가 모두 같은 종류의 사람이었음을 기억하고 연대하며 보호하는 행위다. 구약의 십일조는 분배 정의를 실천하기 위한 구체적 방안이었다. 그러나 약자를 돌보지 않고 긍휼을 행치 않는 종교는 십일조를 종교인의 치부 수단으로 바꾸었고, 권세자에게 주는 뇌물로 바뀌었다.


사도바울은 분배 정의를 이렇게 표현하였다.

이제 너희의 넉넉한 것으로 그들의 부족한 것을 보충함은 후에 그들의 넉넉한 것으로 너희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균등(equality)하게 하려 함이라.”(고후8:14)

여기 사용된 균등이란 말은 공평한 경제적 분배를 의미한다. 이는 공산주의처럼 절대적 평등(absolute equality)이 아니며, 사적인 소유권을 인정하는 범위에서 평균적 평등(average equality)을 지향한다. 예수를 믿는 공동체는 예수를 머리로 하는 하나의 몸이다. 예수님은 구약에서 말하는 십일조의 가르침을 무시하지 않았다. 오히려 십일조 본래의 기능을 통하여 분배적 공동체(distributive community)를 이루기 원하셨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마23:23) 십일조는 드리는 것보다, '어떻게 쓰는가'가 훨씬 중요하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은 십일조가 가지는 분배적 정의와 긍휼을 저버리므로 공동체에 대한 믿음도 버리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도 버렸다. 예수님은 십일조 정신이 제대로 실현되어 정의와 긍휼과 믿음이 바로 서기를 원하셨다.


로세토 효과를 소개한 보건학자 김승섭 씨는 책 뒷부분에 충고한다. “자신의 소득과 시간의 10퍼센트를 소외된 약자를 위해 쓰고 있다면, 사회가 지금보다는 훨씬 낫지 않을까라는 생각이에요.” 만일 교회가 십일조의 진정한 정신을 따라 분배 정의를 이루고, 긍휼을 시행하므로 공동체에 대한 믿음을 회복하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회복한다면, 하나님 나라 공동체는 지금보다 훨씬 건강한 공동체, 행복한 공동체, 기쁨의 공동체가 될 것이다. 긍휼은 개인의 적선과 돌봄보다 공동체의 실천으로 이어질 때 진정한 긍휼이 된다.


참고도서

1. 김승섭, '아픔이 길이 되려면', (동아시아 : 서울) 2017년

2. 안계정, '기독교와 정의', (이담 : 파주) 2013년

3. 달라스 윌라드, '잊혀진 제자도', 윤종석 옮김 (복있는 사람 : 서울) 2015년

4. 장기려, '경건한 삶으로 되살린 성경이야기' (KAIST : 서울) 201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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