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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gos Brunch Dec 24. 2018

화평하게 하는 사람

산상수훈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2:14)


예수님이 탄생하실 때 하늘의 천군 천사들이 나타나 찬송하였다. 우리는 천사의 찬송을 매번 크리스마스 때마다 반복하여 부른다. 그러나 첫 크리스마스에 천사들이 불렀던 이 찬송은 매우 이상하였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탄생하셨을 때 이미 평화의 왕이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팍스 로마나(Pax Romana) 시기에 태어나셨다. 로마는 수 세기 동안 끊임없는 전쟁으로 영토를 확장했다. 기원전 4-3세기 이탈리아 통일 한 뒤, 기원전 2-1세기 동안 히스파니아, 북아프리카, 그리스, 소아시아, 시리아, 갈리아를 정복하여 지중해 세계를 아우르는 거대한 제국을 건설했다. 기원전 31년 옥타비아누스가 악티움 해전에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연합군을 물리치자, 로마 원로원은 평화를 선언하였다. 이제 로마 제국의 골치거리는 다 사라지고 평화가 찾아왔다는 선언이다. 원로원은 옥타비아누스를 황제로 추대하였다. 그가 '평화의 왕' 아우구스투스이다. 로마인들은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이룬 평화를 기리기 위해 ‘마르스의 들판’(Campus Martius)에 ‘평화의 여신 아우구스타의 제단’을 건립하였다. 로마인들은 아우구스투스 황제 시대부터 누렸던 평화를 ‘로마의 평화’(Pax Romana)라 하였다.


그들은 아우구스투스가 신의 도움으로 거대한 제국을 세웠다고 믿었다. 사람들은 로마의 평화, 아우구스투스의 평화를 끝없이 찬양하였다. 로마의 시인 아리스티데스(Aelius Aristides, AD117-181) 노래하였다. “당신들이 나타나면서 혼란과 폭동이 사라졌습니다. 곳곳에 질서가 찾아들었으며 삶과 국가에 밝은 빛이 비쳤고 법이 제정되었으며 신들의 제단은 신앙으로 넘쳤습니다.” 스토아 철학자들은 세계를 하나로 엮어내어 질서를 확립한 로마 제국의 위대함에 자부심을 느끼며 로마의 평화를 위한 이론적 토대를 제공하였다. 황제는 신으로 승격되었다. 아우구스투스는 평화의 왕이므로 모든 사람이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절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하였다.


예수님이 태어날 때는 세계를 하나로 묶어내고, 평화를 확립한 왕 아우구스투스가 다스리던 때였다. 그런데 성경은 끊임없이 아우구스투스의 평화는 거짓이고 예수님이야말로 진정 평화의 왕이라고 선언하였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주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주는 것이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르다.”(요14:27, 공동번역)

사도들도 한결같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평화를 위함이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로마의 평화와 예수님의 평화는 무엇이 다른가?


로마의 평화는 로마 시민에게만 평화였다. 국경 지대 식민지 백성에게는 결코 평화가 아니었다. 소수 민족은 독립을 꿈꾸며 반란을 일으켰고, 로마군은 그들을 무참히 학살하였다. 하지만 로마제국 중심부에는 국경과 달리 끊임없는 승리의 기쁜 소식이 전해졌다. 로마 시민은 강대한 제국 로마를 찬양하고 축제를 열었다. 포로들은 노예가 되었고, 제국은 날이 갈수록 번성하였다. 로마는 제국을 통치하기 위하여 법과 질서를 확립하였다. 로마 제국의 평화는 식민지 백성의 입장에서 본다면 공포와 모욕과 두려움이었다. 엄청난 폭력 앞에 침묵과 굴종과 박탈과 고통을 겪어야 했다.


로마는 성공과 승리를 상징하는 기념물을 만들었다. 트라야누스 황제의 동전에는 로마 여신이 적의 목을 짓밟고 있는 장면이 새겨져 있다. 결박당한 포로와 울부짖는 여인들의 형상이 새겨진 동전이나, 포로의 머리 위로 말을 타고 달리는 황제의 모습을 담은 동전도 있었다. 로마의 평화는 무력에 의한 것이었다. 로마의 평화는 로마인에게 무한한 자부심을 불러일으켰지만, 피정복민에게는 수치와 굴욕이었다.


강력한 군사력이 가져온 평화는 억압적 평화다. 로마 군대가 치안을 확보하니 도적이나 강도의 강탈 행위도 현저히 줄어들었다. 로마 권력을 거부하는 자는 죽음밖에 없었기 때문에 로마 제국 안에서 여행과 상거래는 안전하였다. 복종과 굴종은 생명을 보장받고 상대적인 자유를 누렸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로마 시민에게만 해당하였다. 식민지 백성은 엄청난 세금을 내야 했고, 좋은 생산품은 모두 로마로 가져갔다. 로마 제국의 평화는 창과 칼로 만들어진 평화요, 로마 시민을 위한 평화였다.


로마에 나라를 빼앗기고, 무거운 세금에 시달리며, 로마 군대의 폭력에 무릎 꿇던 유대 땅에 예수님이 태어나셨다. 예수님이 선포하신 평화는 로마의 평화가 아니었다. 힘의 논리 앞에 굴복하며 비굴하게 얻어내는 평화가 아니었다. 예수의 평화는 정치적 평화나 이데올로기적 평화도 아니었다. 예수의 평화는 로마 제국을 물리치고 독립을 꿈꾸던 정치적 유대 민족주의도 아니었다.

로마 황제는 상대방을 무차별적으로 죽이는 힘으로 평화를 만들었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희생적인 죽음을 통하여 평화를 만드셨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하여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자들을 화평하게 하셨다.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 공중 권세 잡은 자를 따랐던 우리, 하나님과 도저히 화해할 수 없는 상태에 있던 우리가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과 진정한 평화를 소유하게 되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할 뿐 아니라, 수평적으로도 화목하게 하였다. 로마 제국의 평화는 지극히 불평등한 평화였고, 힘 있는 자의 평화였지만, 예수의 평화는 모든 사람을 위한 평화였다. 예수 안에서 이방인과 유대인이 하나가 되고, 남자와 여자가 하나 되고, 종과 자유자가 하나 되었다. 심지어 하늘과 땅과 자연 만물이 하나되었다.


예수님이 세우시는 평화의 나라에는 힘의 논리가 자리할 수 없다. 억압하는 자, 기득권층, 가진 자, 위에 있는 자들만 누리는 평화는 주님의 평화가 아니다. 예수님의 평화는 십자가를 통하여 완성하신 평화다. 따라서 보복이나 싸움이나 갈등은 존재하지 않는다. 더욱이 무력이나 전쟁이나 죽음은 상상할 수조차 없다. 예수님은 지배하고 높아지고 영광을 누리는 승리자의 평화가 아니라, 섬기고 낮아지고 겸비하여 고난을 당하므로 얻는 평화다. 예수의 평화는 사랑의 평화다. 칼과 창 앞에서 죽어가는 사람을 끌어안고 대신 죽는 비폭력 무저항의 평화다.


불행하게도 로마 제국이 기독교를 공인하면서, 기독교는 평화의 종교가 아니라 전쟁의 종교, 폭력의 종교로 탈바꿈하였다. 로마가 기독교를 옹호하고 후원하고 인정하자, 교회 안에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보다 로마 제국을 조국으로 생각하였다. 로마 제국의 폭력성을 옹호하던 스토아 철학의 뒤를 기독교가 제국의 이데올로기를 제공하여 주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어거스틴이다. 어거스틴은 말하였다. “평화란 무엇이냐? 아무 전쟁도 없는 곳에 있는 것이다. 아무 전쟁도 없는 곳이 어디냐? 아무런 대결, 아무런 저항, 아무런 반대가 없는 곳이다.”, “평화의 완전함은, 아무 다툼도 없는 곳에 있다.”(In pace perfectio est, ubi nihil repugnat) 어거스틴은 질서의 평온함(tranquillitas ordinis)이 평화라고 하였다. 이는 철저히 힘 있는 자의 논리요, 로마 제국의 논리이다.


어거스틴은 제국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자들에게 무력을 사용하는 것은 당연하며, 그것은 평화를 이루기 위한 거룩한 전쟁(holy war)이라고 하였다. 로마 제국의 폭력과 전쟁을 정당화한 어거스틴의 평화론은 그 후 기독교의 중심 사상이 되었다. 힘 있는 자들이 세운 질서를 깨트리는 자는 평화를 깨트리는 자이다. 가진 자들이 세운 질서를 무너뜨리는 자는 반드시 멸해야 할 좌파들이다.


지금 기독교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평화의 의미를 반대로 이해하고 있다. 현재 그리스도인은 로마 제국이 말하던 평화(Pax Romana)를 열렬히 추종하고 있다. 흑백 논리를 가지고, 나와 다른 자들은 무참히 말살하자고 선동하는 자들이 바로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에 개탄을 금하지 않을 수 없다. 원수라도 사랑하며 품어 안아야 할 그리스도인이 총 칼을 들고 거룩한 전쟁을 하자고 외치는 세상에서 예수님은 목놓아 외치고 있다.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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