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의 권위가 상실되면 제대로 말할 수도 없고 설교할 수도 없습니다. 설교의 위대함은 항상 주제의 위대함에 좌우됩니다. 어느 영역이든 주제가 위대하면 연설도 위대하기 마련입니다. ... 현대 설교는 오락의 한 형태로 전락하였습니다. 진리를 언급하는 경우에도 지나가면서 잠깐 다루는 정도가 고작일뿐, 형식이 내용보다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 로이드존스
프랑스 작가 모파상(Guy de Maupassant,1850~1893)이 쓴 “여자의 일생(Une Vie)’이란 소설이 있다. 갈색 머리의 아리따운 소녀 잔느는 청순하고 신앙심이 깊었다. 비록 쇠락해가기는 하지만, 귀족 집안의 소녀로서 하나님께 행복을 소원하였다. 그녀가 장 드 라마르 자작의 아들 쥘리앙을 만났을 때 마음이 설레었다. 누구라도 반할만한 외모를 가진 쥘리앙이 그녀의 손을 잡고 사랑을 속삭일 때, 그녀는 세상 모두를 얻은 듯하였다. 마침내 쥘리앙이 청혼하고, 그녀의 앞 날은 밝게 빛나는 듯하였다.
그녀가 쥘리앙의 본모습을 알아차리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첫날 밤부터 쥘리앙은 남자의 본색을 드러내어 난폭하게 잔느를 대하였다. 남편은 천하의 바람둥이였고, 인색하고, 옹졸하였으며 욕심꾸러기였다. 이후 그녀의 삶은 나락으로 떨어졌다. 남편의 외도, 유산, 자식의 타락, 죽음, 고독, 가난. 헤아릴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잔느는 환멸을 느끼며, 마침내 체념한다.
그때 타락한 아들이 창녀와 관계하여 낳은 손녀를 젖동생이며 하녀인 로잘리가 데려온다. 잔느는 두 팔로 아기를 끌어안고 미친 듯이 입을 맞추었다. 손녀만큼은 자신과 달리 행복한 삶을 살기를 소망하는 마음이었다. 그러나 시종일관 염세적으로 그린 소설로 보아 손녀의 삶도 결코 만만치 않을 터이다. 손녀를 안은 잔느를 바라보며 로잘리는 말한다.
“그러고 보면 인생이란, 마님! 사람들이 생각하듯 그렇게 행복하지도 불행하지도 않은 것인가 봐요.”
사마리아 수가성의 여인이 있었다. 그녀도 잔느처럼 행복을 꿈꾸었다. 남들 앞에서 당당하고 멋지고 폼나게 살고 싶었다. 그러나 인생은 그리 만만하지 않았다. 그녀의 꿈은 산산조각이 났고, 행복의 그림자는 눈 씻고 찾으려야 찾을 수 없었다. 40도를 넘나드는 열대의 한낮 사람들은 그늘을 찾아 낮잠을 즐기는 데, 그녀는 사람들과 마주치는 게 싫어 그 시간에 우물을 찾았다. 그녀는 사람들이 뒤에서 뭐라고 수군거리는지 다 알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그녀의 얼굴 앞에서 구박을 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지금까지 다섯 명의 남자를 거쳐 갔는데, 제대로 된 남자를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다. 지금 같이 사는 남자도 그녀의 남편은 아니었다.
그녀가 생각하는 행복은 멋진 남자, 성격 좋은 남자, 돈 많은 남자 곁에 있는 것이었다. 잘못인 줄 알면서도 언제나 행복을 찾아 남자를 찾고 또 찾았다. 그녀의 나이가 얼마인지 알 수 없지만, 이제는 좋은 남자를 만날 가능성이 점점 사라져 갔다. 그래도 그녀는 행복을 포기할 수 없었다. 그래서 지금 또다시 어떤 남자 곁에 서 있었다. 물론 행복하지 않았다. 그러나 행복해지고 싶다. 새로운 삶을 살고 싶었다. 그런데 길이 없었다. 최소한 그녀가 아는 한, 길이 없었다. 방법도 없었고, 능력도 없었다.
혹시 그녀는 신앙인이었을까? 그녀가 예수님과 예배에 대해 토의하는 것을 보면 어렸을 때부터 나름의 신앙교육을 받았음 직하다. 비록 회당 예배에는 참석하지 않지만 - 사실 참석하고 싶어도 사람들이 보이는 경멸적 태도에 참석할 수 없었겠지만 - 그래도 그녀의 마음 한구석에 종교심은 있었다. 종교에 대하여, 성직자에 관하여 토론하자면, 그녀도 얼마든지 할 말이 있었다. 그런 면에서 그녀는 최소한 종교인이었다.
난 교회 다닌다고 해서, 종교 생활을 열심히 한다고 해서 훌륭한 신앙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은 종교 생활에 온 정성을 다하였다. 기도도 열심히 하고, 헌금도 정성껏 하고, 선행을 쌓는 일에도 앞장섰으며, 성경 공부에도 성실하게 참여하였다. 종교인은 자기의 노력과 수고와 헌신에서 기쁨을 찾으려는 사람들이다. 오늘날 교회도 교인들에게 기쁨은 만들어 내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열심히 종교생활하면 기쁨이 넘칠 것이라고 가르친다. 그런데 순 거짓말이다. 그럴 리가 없다. 열심히 종교생활하면서 느는 것은 위선과 거짓과 가식뿐이다. 참된 기쁨은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다. 손뻑을 치며 찬양하면, 엎드려 큰 소리로 기도하면, 교회에서 열심히 충성하고 봉사하면 기쁨을 만들 수는 있지만, 참된 기쁨 영원한 기쁨은 아니다. 그건 순간적이다. 세상이 주는 기쁨도 잠시 잠깐인 것처럼 종교생활이 주는 기쁨도 잠시 잠깐이다.
사도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에게 “항상 기뻐하라”(빌 4:4)고 하신 말씀은 종교생활을 통하여 억지로 만들어내는 기쁨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위장하는 기쁨이 얼마나 오래갈까? 누구보다도 자신이 허전하고 허탈하다. 코미디언이나 연예인이 TV에서 웃는 모습, 행복한 모습을 보이지만, 스크린 밖에서 그들의 삶이 얼마나 공허하며, 괴롭고, 우울한지 알면, 모두 깜짝 놀랄 것이다. 공황장애, 우울증, 강박증, 외로움, 시기, 질투. 인간의 악하고 추한 모습이 거기 다 있다.
그러나! 그러나 나는 주장한다. 누가 무어라 해도 사마리아 여인은 행복할 자격이 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을 만난 이유는 무엇일까? 로이드 존스는 말하였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수록 양심이 우리를 더 괴롭힙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다 아시기 때문입니다.” 누구보다도 우리를 정확하게 아시는 하나님, 우리의 잘못과 죄악과 허물과 악한 마음을 다 아시는 하나님 앞에서 양심은 더할 나위 없이 괴롭다.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의 양심을 괴롭히고, 아프게 하려고 만나셨을까? 물론 거룩하시고 순결하신 주님 앞에 서면 자신의 지나온 모든 잘못이 명백히 드러나는 것은 사실이다. 누구에게도 말하고 싶지 않았던 그녀의 남자 편력이 백일하에 다 드러났다. 우리의 양심을 찌르고 괴롭게 하는 것이 전부라면, 예수님은 구세주라고 할 수 없다.
예수님은 죄인인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흔히들 양심의 고통을 잊어버리려고 술과 마약과 도박과 연애에 의존한다. 때때로 사이비 가르침에 빠져들기도 한다. 그러나 그건 참된 해결책이 아니다. 죄인인 우리의 사정과 형편을 다 아시면서도 우리의 손을 붙잡아 주시는 주님. 우리의 모든 허물과 죄악을 다 짊어지시고 우리를 대신하여 고통당하신 주님. 우리를 정죄하기보다 우리를 이해하시고 품어 주시는 주님은 말씀하신다.
“그래도 나는 너를 사랑한다.”
“그래도 나는 너를 용서한다.”
“십자가의 피로 너를 깨끗이 씻어주리라.”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의 손목을 부여잡고 말씀하신다.
“함께 새로운 삶을 살아보자.”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내가 너를 도와주리라.”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요 11:25-26)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의 사랑을 받고, 예수님에게 생명을 받고, 예수님과 동행하며 살게 된 사마리아 여인은 기뻐 춤추며 뛰었다. 그녀는 더 이상 과거의 죄와 허물에 얽매이지 않게 되었다. 동네로 뛰어들어가 모든 사람을 초청한다.
“오세요. 나와 함께 기쁨을 누립시다. 내가 만난 예수님, 내가 얻은 생명, 내가 얻은 나의 삶을 인도하시는 예수님으로 함께 기뻐합시다.”
로이드 존스는 기쁨의 성격만으로도 그리스도인과 종교인을 구분할 수 있다고 말한다.
“기쁨은 그리스도인의 특별한 표시입니다. 훌륭한 신학자이면서도 기쁨이 없을 수 있습니다. 매우 종교적이면서도 기쁨이 없을 수 있습니다. 매우 도덕적이면서도 기쁨이 없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종교인일지도 모릅니다. 만약 우리가 종교인이라면, 순전히 자기 힘으로 살아가며 별로 기쁨이 없습니다. 바리새인들처럼 종교적이 되며, 하나님을 기쁘게 하려 애쓰고, 주변에 울타리를 치는 데 모든 시간을 보냅니다. 사람들과 전혀 접촉하지 않으며, 그들에게 아무것도 말해줄 게 없습니다. 자신이 옳다고 주장하며 자신이 가진 것을 지키느라 바쁜 나머지 아무것도 줄 게 없어서 주지 못합니다.”
반대로 참된 그리스도인은 예수 안에서 예수 때문에 기뻐하며, 그분이 우리에게 행하신 일로 인하여 진정 감격하고 기뻐하는 사람이다.
바울은 말한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 4:4)
주님을 아는 우리의 지식을, 그분이 우리를 위해 하셨다고 우리가 말하는 일에 대한 우리의 지식을 가늠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우리가 그분 안에서 (그분을) 얼마나 기뻐하며, 그분이 우리 영혼을 위해 하신 일을 얼마나 기뻐하는지 보는 것입니다. (로이드 존스의 '생수를 나누라'에서)